수록작품(전체)
52호/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3/신동옥
페이지 정보

본문
족쇄와 멀미를 이겨내고 네그리뛰드 대항해
에메 세제르의 「족쇄」
신동옥(시인)
족쇄
대항해는 모든 길들을 묶고 앗아간다
바다 안개만이 힘을 간직하고 도시를 가마 태워 항구로 이끌어온다
그리고 그대 그대를 내 발 아래 데려오는 것은 파도이다
그런데 선잠을 자는 땅거미 아래의 이 배를
나는 항상 이 배를 알고 있었느니
어깨로 허리로 나를 잘 붙잡아라
노예들이여
그것은 열기 식은 울음소리 거품
내포(內浦)의 흙탕물과 이 고통 그리고 아무것도
그곳에서 우리 둘은 옛날처럼 오늘도 끈적거리는 밤의 가운데에서
무거운 가슴으로 차곡차곡 실린 노예들
어쨌든 나의 벗이여 우리는 항해한다
배의 키질에 겨우 조금씩 멀미를 이겨내며
에메 세제르(Aimé Césaire, 1913~2008)는 카리브 해에 자리한 앤틸리스 제도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태생의 시인이다. 브르통이 읽고 ‘한 위대한 검은 시인’이라며 극찬을 한 『귀향 수첩』(1939)과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탈식민주의적 시각에서 다시 쓴 희곡 『어떤 태풍』(1969)으로 한국에도 익숙한 시인이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작품은 1960년에 쓴 시집 『족쇄』의 표제작이다. 15세기에서 17세기 초반 대항해의 시대에 지금의 아시아, 아메리카로의 뱃길이 개척된다. 아프리카 서부의 국가와 섬들, 남부의 희망봉, 동부의 마다가스카르, 인도를 위시한 동양의 남부에서 ‘향료와 비단의 전쟁’으로 불릴 수탈이 시작된다. 고통을 통한 자기 응시로 다가서는 흑인성은 이 시의 주제일 것이다. 흑인들의 정체성을 가리는 ‘노예’로서의 강요된 숙명을 보여주고 있다. 노예라는 존재는 족쇄에 구속된 처지다. 노예는 강요된 노동의 ‘열기’와 고통 속에서 스스로의 인간됨을 깨닫는다. ‘주인들의 배’ 속에서 뒹굴며 차꼬를 차고 키질을 하며 멀미를 이겨내는 순간에 주체성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은 안개가 데려온 도시 너머 어딘가 대륙과 항구 너머 파도 너머 이방의 식민종주국 사이에서 멀미를 하고 흔들리는 수난과 고통의 순간이다. 이들은 떠날 수도 없다. 내포(內浦)를 향해 돌아오는 파도는 이들의 발을 족쇄와 상인들의 배에 붙박는다. 이들의 ‘무거운 가슴’에는 흑인들의 정체성 속에 도사리는 검은 대륙의 열기가 스며 있으나 이들의 울음 소리는 식어버렸다. 무거운 가슴으로 천년도 넘게 끈적거렸을 밤을 응시하는 것이다. “열기, 식은 울음 소리, 흙탕물과 고통, 끈적거리는 밤, 무거운 가슴”의 노예로 전락한 흑인들의 정체성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흑인들의 흑인됨의 정체성, 네그리뛰드négritude는 어디에 깃들어 있으며 어디까지 추구해야 열리는 미래인가? 세제르는 다른 시를 통해 네그리뛰드의 기원과 거처와 행로를 밝히고 있다. “나는 신성한 상처에 깃들여 있다/ 나는 상상 속의 조상들 속에 깃들여 있다/ 나는 막연한 소원 속에 깃들여 있다/ 나는 오랜 침묵 속에 깃들여 있다/ 나는 치유되지 않는 갈등 속에 깃들여 있다/ 나는 천 년 동안의 여행 속에 깃들여 있다/ 나는 300년 동안의 전쟁 속에 깃들여 있다”(에메 세제르, 「나, 다시마」 가운데)
1502년 콜럼버스는 대항해의 도중 서인도제도의 한 섬에 정박한다. 아프리카 서안의 한 섬이 서유럽의 열강의 한 나라에 발견되고 종속되는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1635년 섬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지배와 예속, 수탈과 밀반입, 속국에서 본거지로의 출항과 귀향의 ‘항구’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섬 이름은 마르티니크, 마르티니크는 1660년 프랑스의 식민지로 편입된다. 약 300년이 지나고 난 1946년 3월 19일, 마르티니크는 과들루프, 기아나, 레위니옹과 더불어 프랑스공화국의 일부로 공식적으로 편입된다. 마르티니크는 프랑스라는 나라의 ‘일부’이므로 프랑스 국기를 쓴다. 프랑스라는 국가와 역사를 공유하지 않으므로 파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가른 4개의 면에 흰 뱀을 그려 넣은 마르티니크 국기를 쓴다. 국기의 비독립적인 상징성처럼, 아프리카 대륙 서부 세네갈을 포함해 대륙에서 떨어진 카리브해의 풍광은 아름다운 해변의 깊숙한 이면에 문화지리학적인 면에서 이중구속의 굴레를 숨기고 있다.
1887년, 고갱은 마르지 않는 순수, 협잡과 이해타산이 없는 피의 정열을 갈구하고 찾으려고 이 섬에 자신을 유폐한다. 고갱은 마르티니크에서 폴리네시아에서 원주민들 틈에 어우러진 시기에 인상주의 화풍을 벗어던진 그림들을 그린다. 그 중 한 점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그림 제목은 고갱 스스로의 주제였을 것이다. 제목은 그림 속 등장인물인 흑인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묻는 수도 있다. 제목 그대로 프랑스어로 쓰인 아프리카 문학 또는 아프리카의 프랑스어 문학의 주제, 또는 검은 아프리카의 아프리카인 문학의 주제 네그리뛰드의 근원적인 문제의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고갱이 그림을 통해서 묻는 주제는 계몽과 변형을 넘어서는 어떤 근원적인 순수의 지점일 것이다. 때문에 그림 속에 예수의 모양으로 물동이를 지고 팔을 벌린 채 기다랗게 서 있는 여인들은 고갱의 의식의 타자일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있을 그 무엇’으로서의 ‘순수’의 이름들인 동시에, 자신을 포함한 문명이 더럽히고 짓밟은 ‘없는 근원’의 타자라는 점에서 망상에 가까울 수도 있다. 과연 이 흑인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과연 흑인만이 가지고 있는 이 흑인성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1873년, 랭보는 시집 『지옥의 계절』에 수록한 시 「나쁜 피Mauvais sang」에 과학과 종교와 이성으로 눈을 떴다는 아집에 사로잡힌 ‘가짜 흑인’을 등장시킨다. 랭보는 1880년을 전후로 프랑스를 떠나 유럽을 종단해 마르티니크의 반대편인 아프리카 동북부와 홍해 일대를 떠돌았다. 랭보는 썼다.
그렇다. 내 눈은 당신들의 불빛에 눈을 감는다. 나는 짐승이다. 흑인이다. 그러나 나는 구원받을 수 있다. 당신들은 가짜 흑인이다. 미치광이다. 잔인한 자이다. 탐욕자이다. 상인이여, 너는 흑인이다. 법관이여, 너는 흑인이다. 장군이여, 너는 흑인이다. 황제여, 늙은 무뢰한이여, 너는 흑인이다. 너는 세금 붙지 아니한 악마의 공장에서 나온 술을 마셨다 ―― 가장 멋진 것은 이 대륙을 떠나는 것이다. 여기선 이 한심한 자들에게 볼모를 마련해 주려고 광기가 횡행한다. 나는 캄Cham의 진정한 어린이 왕국에 들어간다.
아르튀르 랭보, 「나쁜 혈통」에서
랭보가 말하는 ‘가짜 흑인’은 엉큼한 백인을 싸잡아서 비난하는 말일테다. 그들은 신앙의 빛으로 눈을 떴다고 믿으며 강요된 거짓 위계를 만드는 자들이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이다. ‘가짜 흑인’들은 부패한 정치에 빌붙어 협잡을 일삼는 관리들이고 군인들이다. 인간을 팔고 사며 매질을 일삼는 상인이며 법관들이다. 그들은 백인들 가운데서도 위선에 사로잡힌 협잡꾼이며 자본주의의 분화된 이윤의 흐름을 좇아 ‘악마의 공장’을 건설하는 자들이다. 문명 이후의 세상에 문명의 이름으로 열등한 종족이 태어났다는 비유, 랭보는 차라리 중세 이전을 꿈꾸는가? 문명이라는 발전의 고리를 벗어난 ‘나쁜 피’가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고 랭보는 말하는 듯하다. ‘나쁜 피’를 지니지 않은 백인들은 랭보에 의하면 차라리 자의식이 없는 ‘가짜 흑인’들이다. 랭보는 자신의 운명을 야만적인 피의 어쩔 수 없는 순환의 고리에 놓는다. 시 속에서 ‘나’는 ‘당신들의 옳음’으로부터 과감히 눈을 돌려버린다. 시 속의 ‘나’는 태생부터 ‘당신들’ ‘가짜 흑인들’이 가진 도덕률을 비껴간다. 랭보가 택한 ‘나의 숙명’은 백인의 것인가? 흑인의 것인가? 여기서 주인과 노예 사이의 ‘상대적 도덕관념’의 문제가 생긴다. ‘진짜 흑인들’의 절박한 정체성 물음으로 돌려놓으면 ‘도덕률의 상대주의’ 문제는 위계가 한층 복잡해진다. 여전히 문제는 랭보의 비유가 품고 있는 흑인의 이중적인 의미이다.
진짜 흑인들의 문제는 ‘검은 아프리카’ 자체에 대한 문학으로 쓰일 수 있다. 아프리카가 가진 아프리카만의 아프리카에서 얻은 경험에 의지한 문학일 수 있다. 노아의 둘째 아들 캄(Cham)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흑인의 근원은 무엇이며 아프리카라는 범주와 범위는 어디서 어디까지인가? 16세기 선교사들이 휘두르는 총과 칼 아래 배운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아프리카인들의 한편에는 ‘가짜/진짜’의 대립구도를 내면에 새긴 크레올의 나라들이 존재한다. 인도양과 카리브 해와 아프리카 대륙에 자리한 크레올의 나라는 강제에 의해 두 번째 언어로 프랑스어와 같은 구미어(歐美語)를 ‘선택’당했다. 강제당한 주인의 언어로 인종을 넘어서는 문화적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조선의 김사량이나 이효석 또는 이상이 보여준 이중 언어적인 글쓰기와는 차원이 다른 ‘식민/탈식민’의 질문을 던진다. 크레올어는 문제가 언어대중의 피부에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복잡한 차원의 질문을 던진다. 진짜 흑인들이 던지는 물음은 기원 찾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우리로부터 소외를 당하기 전에 우리는 무엇이었나? 와 같은 물음이 그것. 저들 백인이 우리를 지배하기 전에, 저들을 알지 못하고 저들과 우리의 구분조차 없었던 ‘분리 인식’ 이전에 우리는 무엇이었나? 와 같은 물음 말이다. 여기서 기원 찾기는 ‘귀환’이나 ‘회귀’의 의미가 된다. 하나를 알고 둘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를 알고 모르는 것들을 지워가는 과정이다. 종합하고 통합하는 자아화의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기원을 파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이다. 거기에는 문명의 공통존재로서의 원형archetype이 피와 살을 입고 살아 약동할 것이다. 세네갈의 시인 셍고르(L.S. Sengor, 1906~2001)가 말한 ‘근원의 네그리뛰드’는 이런 의미에서 흑인 아프리카 문명이 인류 문화의 변이태로서의 공통의 문화적인 가치와 정신을 배태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아울러 흑인이라는 전체상을 되찾아야한다는 의미를 내장한다. 그러나 강제된 식민 언어로 글을 쓴다면 인종주의적인 표상과 만들어진 전통으로서 아프리카의 이미지와 이식된 근대성이 충돌하는 모순을 노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셍고르는 이런 이중 삼중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혼합의 방법을 선택한다. 셍고르가 불어를 선택하는 논리는 이런 방식이다.
불어가 보편적 사명을 가졌으므로 또 우리의 메시지가 프랑스인과 다른 이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불어로 자신을 표현한다. 우리 언어 안에서(즉 아프리카어에서), 단어를 둘러싸는 후광이 그 성격상, 수액이나 피의 후광 같은 것이라면 불어 단어는 마치 다이아몬드 같은 수천의 광선을 내뿜는다.
레오폴 세다르 셍고르, 「에티오피아적인」(1954.9.24.) 서문 가운데
불어가 내 모국어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나는 7살 때 잼, 초콜릿 같은 단어에서부터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자연스레 불어로 생각하고 불어를 이해한다. 그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어떤 다른 언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 즉 내게 있어 불어는 단지 ‘이방의 매개수단’일 뿐 아니라 새 사고의 자연적 표현 형태라는 것이다. 불어에서 내게 낯선 것은 아마 그 스타일이리라. 그 고전 건축물 같은 스타일이다. 나는 감성적 열정의 부추김 없이도 자연적으로 그 좁은 틀을 이미지로 부풀릴 수 있게 되었다.
레오폴 세다르 셍고르, 「레오폴 세다르 셍고르」, 『아프리카의 존재』(1962) 가운데
셍고르에게 네그리뛰드는 흑인의 정체성을 되찾을 때마다 저 미지의 기원에 자리한 문화적 유산을 찾아 긍정하고 숨결을 돌려놓아야할 근원의 다이아몬드와 같은 의미다. 불어는 강제된 민족성이나, 타고난 인종성과 같이 부정적 폄훼의 바깥도 내부도 아닌 ‘매개수단’에 불과하다. 불어를 네그리뛰드로 전유해 불어의 의미 차원으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논리다. 흑인성은 그 본질에서 우주의 숨결에 가닿는 정서적 태도와 감수성을 힘으로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성이 내장한 “감동성의 열기가 말에 생명을 부여하여 말을 동사로 변환”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어가 가지고 있는 스타일이 흑인인 셍고르에게 낯선 것은 ‘자연적으로 좁은 틀’에 정서적 기반을 두기 때문일 것이다. 강요받지도 선택하지도 않은 제국의 프랑스어로 쓴 프랑스의 문학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감성적인 열정’을 부추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개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정신을 변형시키는 다양한 실험과 문학적 전통이나 역사를 갈급할 수밖에 없다. 셍고르의 말이 네그리뛰드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부여로 읽히는 이유다. 반대로 해석하자면 흑인성 안에는 이미 ‘감성적인 열정’이 포함되었다는 것인데, 이 때 셍고르의 방법적 논리와는 반대의 결론에 닿을 수도 있다.
에메 세제르의 네그리뛰드 논리는 근원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의 핵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이다. 자기 기원에 대한 긍정을 뒤집으면 근원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근원을 추구하려는 열정이 될 터다. 이런 열정을 넓게 보면 무의식의 근원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질 테고, 천착을 통해 흑인문화의 내면성에까지 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구성의 탈맥락화는, 파편화된 무의식을 넘어서는 통합의 기제를 거쳐 종합을 통해 개별 자아가 재구성된다는 통념을 뒤집는다. 흑인성은 그 자체 안에 감성과 열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해 아프리카라는 우주에까지 정신적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통합된 자아가 아니라 분열하고 파편화된 자아의 핵 속에서 오롯이 객체가 된 네그리뛰드의 역사를 발견한다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스타일은 곧 정신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흑인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까지 추구한다는 의미가 된다. 스타일은 흑인성이라는 정신을 바탕으로 무의식의 근원을 파고들어가서 객체화하는 방식으로 얻어진다. 이렇게 “네그리뛰드에 기초한 이념에 반대하고, 인종차별주의와 격화된 유럽중심주의와 자기민족 중심주의를 반대하고, 휴머니스트의 변모를 내보이는” 것이 에메 세제르의 방식이다. 에메 세제르의 방식은 흑인 ‘다중’ 중심적이며 비판적이다. 세제르의 시각은 마르티니크 출신의 제자인 프란츠 파농에게 이어져 확대 심화된다. 파농은 흑인의 정체성에 대한 기원추구와 식민주의 비판을 넘어서서 ‘흑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타자로서의 백인과 백인성’에 대한 접근으로까지 시각을 넓힌다. 이러한 관점은 가야트리 스피박 등에 이르러 ‘탈식민주의론’으로 확대될 문제의식을 정초하기에 이른다.
신동옥
1977년 전남 고흥 출생. 2001년 《시와반시》 등단.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 이전글52호/기획/이천년대 이후, 현대시와 민주주의/김수열 15.06.12
- 다음글52호/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3/장시기 15.06.1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