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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기획/이천년대 이후, 현대시와 민주주의/김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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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냉이골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김수열
도둑처럼 숨어들어 엎드리며 피눈물을 뿌리고 가던
아들딸이 있었으리라
먼발치로 고개 숙이며 여린 어깨 들먹였겠지
숨죽여 울었으리
아내와 형제들과 그 어머니와 할머니가
아버지와 그 할아버지들 기가 막혔으리라
엎어지고 자빠진 주검들이 여기 있네
손가락질당하며 핏발을 곤두세워
삿대질당하던 주검들이 여기 묻혀 있네
강대국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등 떠밀려
서로의 가슴에 총칼을 들이밀던 눈먼 날이었네
우리들 모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주고 또 받았네
어제오늘이 아니네
십 년 아니 이십 년 반세기가 넘도록 아직껏 풀리지 않고
나와 내 이웃을 단죄하며 옥죄는 이념의 사슬에 묶인 채
낙인찍힌 영혼들이 여기 누워 있네
찔레 덩굴 잡목 숲 무성히 우거져 있었네
찔레꽃 무더기, 바람을 부르는 상여꽃 같은 흰 꽃무더기
두런두런거리며 피어나던 곳
4․3의 제주여, 돌이켜보면 여기 이 주검의 자리
내 부모 내 형제의 죽음을 보며 산으로 올라간 이였네
내 이웃과 친구의 죽음을 막으려 총을 잡은 이였네
누가 누구의 얼굴에 침 뱉을 수 있겠는가
누가 누구의 등에 돌을 던지며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겠는가
용서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화해하고 화해하지 않는다면
거기 어찌 평화가 깃들 수 있겠는가
여기 어찌 생명의 씨앗 하나 자랄 수 있겠는가
평화의 섬 제주여
오늘 우리 속냉이골 쓸쓸한 무덤가
반목의 풀을 베고 적대의 덩굴 걷어내며
손에 손에 돌 하나 모아 방사탑을 쌓았네
작은 푯말 하나 세웠네
다시금 고개 숙이네 엎드려 절을 하네
여기 엎드려 머리 조아리는 것
내일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
해묵은 상처를 씻겨주고 닦아주며
서로의 등 다독여주자는 것이네
일으켜주자는 것이네 일으켜 함께 가자는 것이네
속냉이골 맴돌며 떠도는 넋들이여
모두 여기에 오시라 어서 이 자리에 오시어
차린 음식들 나누시라 어서어서 오시라
넋들이여 그 모든 속냉이골 혼백들이여
생명과 평화의 손길로 우리들 위로드리오니
부디 편히 잠드소서
「의귀리 속냉이골에 작은 푯말을 세우다」(박남준 시)
상강 지나 소설이 저만치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 이어 다시 섬을 찾으신다는 얘기를 인편으로 언뜻 들었습니다. 반가운 일입니다. 섬을 찾을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 가는 섬의 모습에 가슴이 아린다는 그 말이 아직도 불도장처럼 제 한켠에 뜨겁게 새겨져 있습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늘길로 오시든 바닷길로 오시든 섬에 내리시면 우선 서귀포시 의귀리를 찾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제주4․3이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는 현장이 바로 그곳, 섬사람들은 ‘옷귀’라고 부르는 ‘의귀리’ 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제주4․3이 국가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이었음을 인정하고 희생자를 포함한 유족들에게, 전 도민들에게 당시 대통령이 머리 숙여 사과했음을 전들 왜 모르겠습니까? 허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권이 바뀌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제주4․3을 부정하고 역사를 비틀어, 왜 죽어야 하는 지도 모르는 억울한 주검을 다시 죽이는 일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로 인해 60여 년을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웠던 유족들의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다시 후벼 파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4․3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다시 의귀리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제주4․3과 관련하여 의귀리, 하면 먼저 ‘현의합장묘’를 떠올리겠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 번 섬을 찾았을 때 걸음을 하셔서 알고 있겠지만 대강 간추려 보렵니다.
1949년 1월 10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의귀국민학교 주둔 2중대에 의해 의귀리를 포함한 수망리, 한남리 양민들이 집단적으로 학살됩니다. 살아남은 유족들이야 왜 죽였는지 묻고 싶었겠지요. 허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살아남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시대였으니까요. 시신을 수습하러 가는 것조차 두려웠지요. 당시만 하더라도 빨갱이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죽어서는 무조건 ‘빨갱이’가 되었으니까요. 한쪽으로 치워진 시신들은 흙부스러기만 가볍게 씌어진 채 1년여를 방치된 상태로 있다가 마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시신들을 수습하게 됩니다. 유족들이 현장을 찾았을 땐 썩은 시신이 뒤엉키고 문드러져 이미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뒤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한 곳으로 옮겨 구덩이 세 개를 파고 시신을 쓸어 담습니다. 몇 달 후 시신을 찾아야 한다고 다시 파헤쳤지만 도저히 분간할 수 없어 도로 묻었다지요. 의귀리 현의합장묘가 바로 그것입니다. 2003년에 봉분을 파헤쳐 발굴을 하고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해마다 추모제를 하면서 망자의 원혼을 달래고 있지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현의합장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속냉이골’이 있습니다. ‘송령이골’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촌로들이 부르는 ‘속냉이골’로 명명하겠습니다. 의귀리를 찾으시라는 의도는 바로 ‘속냉이골 집단묘지’를 꼭 찾아보라는 의도지요. 의귀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경운기 한 대 겨우 다닐까 말까 하는 소롯길인데 초행이라면 찾기 어려울 수 있으니 명심하시고, 설령 마을 사람들에게 ‘속냉이골’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4․3 이후 찌들대로 찌든 이데올로기 공포가 선한 마을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 겁니다. 이른바 ‘속냉이골’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1949년 1월 12일 의귀국민학교에서는 주둔한 2중대 병력과 무장대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집니다. 3시간이 넘는 교전이었다 증언합니다. 이 와중에 많은 무장대원이 교전 중에 사살됩니다. 그 숫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여 딱히 뭐라 할 순 없지만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합니다. 그 당시 교전 중에 희생된 군인의 주검은 지금 남원읍 충혼묘지에 안치되어 있지요. 반면 무장대 시신들은 학교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가 지금의 ‘속냉이골’로 집단 매장되는데 현의합장묘와도 다르게 지금까지도 방치된 주검들입니다. 누구의 주검인지도 모릅니다. 찾는 유족이 없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달이 가고 해가 가도 메 한 그릇 올리고 술 한 잔 따르는 이 없는 쓸쓸한 주검들입니다. 그렇게 60여 년을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 적지 않은 주검이 있다. 이 주검에 조의를 표해야 한다.’라고 아무도 말하지 못했을까요? 참, 뻔한 걸 물었습니다. 살아서 빨갱이가 아니었던 사람이 죽으면 빨갱이가 되던 시절에 군인들과 교전한 무장대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속냉이골은 다름 아닌 무장대들의 주검이지요. 그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 또한 빨갱이일 수밖에 없는 세월이었지요. 하여 유족도 찾지 않고 그렇게 버려졌던 것이겠지요. 4․3특별법이 통과되었지만 속냉이골은 ‘섬 속의 섬’으로 지금도 남아 있지요.
2004년으로 기억됩니다. 도법스님과 수경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제주를 찾습니다. 섬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순례를 하다 제주4․3연구소와 현의합장유족회와 함께 속냉이골을 찾아 벌초를 하고 천도재를 올립니다. 박남준 시인은 한 편의 시로 그들에게 보시를 합니다. 실로 50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가시낭 덤불을 걷어내고 메 한 그릇 술 한 잔 받을 수 있었지요. 향 내음 맡을 수 있었지요.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이름으로, 그들을 기억하자고 나무판에 몇 자 남겨 다짐했지요.
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먼저 큰절부터 올리고 가라 했다’고 했다.
바로 이 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의 와중에 국방경비대에 의해 희생된 영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 (중략)
우리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 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2004년 5월 13일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일동
그 이후부터 해마다 8월 15일이면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어중이떠중이들이 낫 한 자루 손에 들고 주왁주왁 속냉이골로 모여듭니다. 현의합장유족회에서도 힘을 보태고 있지요. 조촐하지만 과일 몇 개 소주 한 병도 잊지 않고 들고 가서 벌초가 끝나면 제를 올리고 두런두런 둘러앉아 음복을 핑계 삼아 낮술 한 잔 하고 있지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들은 어김없이 속냉이골을 찾을 겁니다.
얼마 전, 제주4․3유족회와 경찰 간부 출신 모임인 경우회가 처음으로 한 자리에 앉아 머리를 맞댔다 합니다. 반가운 일이지요. 반목과 질시를 걷어내고 화해와 상생으로 거듭나자는 의미 있는 자리였겠지요.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왜 이리도 허전한지요. 이데올로기로 인한 반목과 질시는 여전한데 누구와 화해하라는 건지요. 어떻게 상생하라는 건지요. 진정한 화해와 상생, 그날이 오기는 할까요. 속냉이골 희생자 유족들이 무덤을 찾아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마음 놓고 통곡할 그날이 오기는 할까요?
중언부언 말이 길어졌습니다. 무딘 붓끝으로 횡설수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람찬 날에 직접 속냉이골을 만나길 바랍니다. 만나서 못다한 이야기 나누시길 바랍니다. 찾아가는 길에 과일 두어 개, 소주 한 병 챙기는 것 잊지 마시길.
그럼, 속냉이골에서 나오는 길에 연락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김수열
198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어디에 선들 어떠랴』『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바람의 목례』『생각을 훔치다』 산문집『김수열의 책읽기』『섯마파람 부는 날이면』 등이 있음. 제4회 오장환문학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회원, 제주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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