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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호/기획/이천년대 이후, 현대시와 민주주의/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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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 2013년 겨울호, 2000년대 이후의 현대시와 민주주의(1편의 시 선정 읽기) / 2013년 10월 27일한, 30매 이내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안도현의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론
오태호
1. 민주주의의 서거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새벽,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부엉이 바위 아래로 낙하했다. 비상을 예고하는 추락이 아니었다. ‘운명’을 강조하는 일종의 비극적 허무주의를 유포했다. 그러나 이 상징적 죽음이 보여주듯 2000년대 후반 이래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이래로 절차적 민주주의는 퇴색했다. 대한민국의 시계가 1980년대 이전으로 회귀한 듯한 장면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광우병 파동’을 비롯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이나,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파업 등 신자유주의적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가 사전에 봉쇄되거나 사후에 감시되었고, 4곳의 종편 방송 시작과 함께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언론의 기능마저 크게 후퇴했다. 2013년 10월 현재 여전히 한반도 남단의 민주주의는 퇴색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2000년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회고하는 지점에서 그 정점에 선 사건은 ‘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업무에 대한 공과로 인한 자살이 아니라 정치권력과 검찰권력에 의한 타살이라는 심증이 한반도 남단을 휘감았다.
2000년대 대한민국은 책장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꺼내들게 하였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2004년 대통령이 국회권력으로부터 탄핵되었고, 미군 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효순이와 미선이 사건 등으로 주한미군 문제가 불거졌으며, 이명박 정부 하에 4대강 사업의 속도전으로 온 국토가 파헤쳐졌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남북관계는 여전히 냉랭하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을 생전에 남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떨어지며 무슨 생각에 젖었을까?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마지막 길을 떠났지만 살아 남은 많은 사람들은 그걸 운명이라고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부당한 정치권력의 행사에 의해 어처구니 없이 강요된 운명은 운명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운명이라면 극복해가야 하리라.
2009년 5월 29일 오전 11시 경복궁에서 열린 故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 이후 시청 광장에서 울려 퍼진 안도현의 추도시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자살로 인도한 정치권력의 행태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리고 다시 민주주의의 회복을 갈구한다. 2013년 10월 오늘, 가을 바람 앞에서 여전히 그가 그립다. 남북관계가 퇴행적 행로를 걸을 때, 공중파 언론이 황색 언론의 받아쓰기를 감행할 때, 부관참시하듯 서거한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이름을 조롱할 때,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절실해진다. 우리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신동엽)을 아직도 갖지 못한 비운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2. 부활하라, 노무현의 가치
안도현은 추도시의 제목을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로 정한다. 고맙다는 것은 그가 권위주의 시대를 청산하기 위해 ‘바보 노무현’으로 살다가 떠난 삶을 압축하는 말이다. 미안하다는 것은 퇴행하는 민주주의를 바로잡지 못한 것에 대해 하는 말이다. 일어나라는 것은 그가 추구했던 정신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의 사람다운 삶이 고맙고, 그가 목숨으로 지켜내려 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어서 미안하며, 그의 정신과 가치가 다시금 부활하라는 의미에서 일어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그 고마움과 미안함과 부활의 메시지가 전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안도현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무거운 권위주의 의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끝도 없는 지역주의 고압선 철탑에서
버티다가 눈물이 되어 버티다가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편 가르고 삿대질하는 냉전주의 창끝에서
깃발로 펄럭이다 찢겨진, 그리하여 끝내 허공으로 남은 사람
고마워요, 노무현
아무런 호칭 없이 노무현이라고 불러도
우리가 바보라고 불러도 기꺼이 바보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 그러다가 거꾸로 달리는 미친 민주주의 기관차에서
당신은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려 으깨진 붉은 꽃잎이 되었어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팔뚝으로 받쳐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저 하이에나들이 밤낮으로 물어뜯은 게
한 장의 꽃잎이었다니요!
저 가증스런 낯짝의 거짓 앞에서 슬프다고 말하지 않을래요
저 뻔뻔한 주둥이의 위선 앞에서 억울하다고 땅을 치지 않을래요
저 무자비한 권좌의 폭력의 주먹의 불의 앞에서 소리쳐 울지 않을래요
아아, 부디 편히 가시라는 말, 지금은 하지 않을래요
당신한테 고맙고 미안해서 이 나라 오월의 초록은 저리 푸르잖아요
아무도 당신을 미워하지 않잖아요
아무도 당신을 때리지 않잖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당신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었어요
살아남은 우리는 당신한테 졌어요, 애초부터 이길 수 없었어요
그러니 이제 일어나요, 당신
부서진 뼈를 붙이고 맞추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흐트러진 대열을 가다듬고 일어나요
끊어진 핏줄을 한 가닥씩 이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꾹꾹 눌러둔 분노를 붙잡고 일어나요
피멍든 살을 쓰다듬으며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슬픔을 내던지고 두둥실 일어나요
당신이 일어나야 산하가 꿈틀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동해가 출렁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
안도현의 추도시는 총 7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에서 3연까지는 “뛰어내렸어요”라는 서술어를 필두로 시작한다. 이때 도치적 서술어 ‘뛰어내림’은 중의적 의미를 구성한다. 1차적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자살을 감행한 사실을 말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노무현이 추구했던 가치를 수식하는 말이다. 즉 잘못된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피로서의 ‘뛰어내림’인 것이다. 그리하여 1연에서는 “무거운 권위주의”에서 탈피하여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뛰어내렸다고 요약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이 ‘위계적 권위주의’에 맞서 ‘인권(=사람)’의 가치를 내세운 ‘인간적 평등주의자’였음을 기록한다. 2연에서는 지역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는 ‘상호배타적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 감정의 시대’로부터 뛰어내린 것임을 기록한다. 3연에서는 남북 분단 상황에서 상호 대립과 갈등의 ‘냉전적 사고’를 거부하려다 뛰어내린 것으로 기록된다. 그리하여 1~3연의 뛰어내림을 통해 “끝내 허공으로 남은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임을 기록한다. 정치인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이 걸어온 길을 구시대적 잔재인 ‘권위주의, 지역주의, 냉전주의’로부터의 탈피였음을 압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허공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의 숱한 노력이 결국 좌절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4연에 가서 시인은 ‘노무현’이라는 이름에 대한 호명과 ‘바보’라는 별칭, 바보를 자임하던 모습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한다. 서민 대통령 노무현이었기에 가능한 고마움을 표명하는 것이다. 1~4연까지가 서거와 노무현의 정신을 연결하는 ‘고마워요’ 대목이다.
이제 5연에 이르면 자살을 감행한 전 대통령에 대한 미안함에 대해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백한다. 시인이 보기에 고 노무현 대통령은 “거꾸로 달리는 미친 민주주의 기관차”에서 뛰어내린 셈이다. 역주행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뛰어내림으로써 폭주기관차를 멈추고 왜곡된 대한민국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당위를 읽어낸 것이다. 그러나 고인이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며 “으깨진 붉은 꽃잎”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걸 두 손과 두 팔뚝과 두 가슴으로 받아 안아주지 못한 사실에 시인은 미안해 한다. 미안함은 자책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에 대한 직시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그토록 전 정권의 도덕성을 물고 늘어지던 이명박 정부 하의 정치권력과 검찰 권력이 “한 장의 꽃잎”을 물어뜯은 ‘하이에나’에 불과했음을 직시한다. 썩은 권력의 놀음을 하이에나의 물어뜯음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6연에 이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미안함이 미안함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강조된다. 그것은 ‘가증스런 거짓’에 의해서 강요된 타살이었기에 그저 ‘슬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뻔뻔한 위선자’들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비굴함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무자비한 권좌의 폭력의 주먹의 불의”를 앞에 두고 울음으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왜냐하면 “부디 편히 가시라”는 말조차 지금은 하나의 사치스런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보기에 2009년의 오월의 초록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으로 인해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960년 4.19 혁명의 흔적과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학살의 기억이 그 이후 진달래 핏빛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듯 이제 5월의 초록은 안도현 시인에 의해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푸르름으로 환기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추모의 발걸음은 500만 인파를 넘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미움과 폭력’을 행사하려는 사람이 없음을 환기한다. 죽은 노무현 대통령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었고, “살아남은 우리는 당신한테 졌”음을 고백한다. 승자와 패자, 산 자와 사자에 대한 상식적인 인식이 전도되어 고인의 삶을 애도하는 것이다. 시인은 애초에 당신을 이길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가치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였음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저 세상으로 떠난 고인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유서의 한 부분)임을 남기고 짐을 내려놓았으므로 승리자가 된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가치를 계승해야 할 의무를 가진 ‘시대의 패배자’가 된다.
7연에서 시인은 “이제 일어나요”라고 부탁한다. “부서진 뼈를 붙이고 맞추”고 일어나야 “흐트러진 대열을 가다듬고” 민주주의의 부활을 다시금 기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핏줄을 이어 일어난 당신이 있어야 우리들이 “꾹꾹 눌러둔 분노”와 함께 노무현 정신이 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당신의 부활이 우리로 하여금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로의 발걸음을 내딛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일어나야”, 당신의 정신이 부활해야, 산하의 꿈틀거림과 동해의 출렁임, 한반도의 일어남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신의 부활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과 안녕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그리고 “아아, 노무현 당신!”이라고 영탄조로 부르며 시를 마감한다. 행사시나 추도시는 본질적으로 목적성이 강하다. 안도현의 ‘추도시’ 역시 추도의 목표에 충실하며 애도의 성격을 내포하면서 고인의 정신의 부활을 강조한다.
3.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4년 5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이명박 정부는 박근혜 정부로 명패를 달리했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달라지지 않았거나 더 과거로 퇴행한 듯한 역주행도 보인다. 국정원, 검찰 등의 사정기관이 제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초기 호기롭게 권력의 수반인 대통령과 토론장에서 맞짱을 뜨려고 했던 서슬 퍼런 검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던 ‘국가안전기획부’의 비석이 ‘정보는 국력’을 지향하는 ‘국가정보원’ 비석으로 바뀌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비석으로 바뀌었다. ‘무명의 헌신’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공안통치 시절의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의 악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2012년 대선 정국에서, 2013년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둘러싼 정국에서도 국정원은 자신들의 ‘무명의 헌신’이 누군가를 향해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권력이 무섭다. 권력이 국민을 무서워해야 하는데, 국민인 내가 국가 권력이 무섭다. 공포 정치가 국민 개개인에게 스며들어 공포의 내면화를 일상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모골이 송연해온다.
사족 하나를 달면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2010년 5월경 필자는 대학에서 강의 시간에 신동엽의 「산문시 1」(1968)을 수업했다. 학생이 시에 대해 발표를 하고 나중에 필자가 정리를 하는 수업 방식이었는데, 강의 마무리 발언을 하려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만큼이나 울음이 북받쳐 올랐다. 참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이미 온몸에서 주체할 수 없는 신열처럼 눈물과 슬픔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 이후 이 시를 다시는 수업에서 활용할 수가 없다.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을 우리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감 역시 지울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또 다시 조만간에 도래할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을 고대하며 45년 전의 시를 ‘현재적으로’ 읽어본다.
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곤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하지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1968. 11, 월간문학 창간호)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서정주, 「푸르른 날」). 2013년 10월 23일, 눈부시게 푸르른 10월의 가을 하늘 아래 그가 그립다. 이런 날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었으면 좋겠다. 구름 한 점 없이 너무도 현실적이지 않은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며, 그 하늘 아래에서 색색으로 물들어가는 단풍을 보며 노무현과 노무현 정신에 대해 품었던 나의 연정도 물들어간다. 우리 함께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오태호 : 2001년 조선일보 문학평론 등단, 평론집 오래된 서사, 여백의 시학, 환상통을 앓다,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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