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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수/박사, 밥 사! 외 1편

 

 

讀萬卷書, 行萬里路

책 만 권으로 사각모를 접어

박사, 사랑도 끝나는 만리길의 풀밭에서

내 학문은 끝을 본다

 

금간 창틈에 알몸으로 뛰어들던 싸락눈

천둥과 태풍 속에서도

박사답게, 꽃피는 봄을 낭랑하게 읽으며

학문, 항문 그 깊은 곳에서 붉은 꽃을 피워놓고

마당에 널어놓은 보리는 죄다 소낙비에 휩쓸려 간다

 

그날 밤 그녀는 목이 쉬도록 고봉高鳳의 상투를 잡아 휘둘렀고

내 욕정은 보리밭보다 더 푸르답니다

푸른 지폐를 넘기세요. 돈은 고전이며, 명작이며, 성서랍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세종 그리고 사임당, 그 배꼽을 맞대고

단 하루라도 배부른 사랑을 하고 싶어요

 

헌 책 짊어지고 넘은 보릿고개

이젠 내리막길이거니 살들이 풀어지는데

―박사, 밥 사!

보름달 맑은 국그릇 앞에서

별 하나 뜨지 않은 밥상 앞에서

가족들은 태질이 끝난 보릿단처럼 어깨를 맞대고 있다

 

그래, 박사 위에는 밥사가 있었구나

위대한 밥사를 위해 책을 불태우고

분서갱유, 그 잿더미 위에 물구나무를 서서

조금씩 근육을 기른다.

 

 

 

 

 

사촌 누이의 바느질

 

 

1.

너에게선 북방 초원을 막 지나온 바람 냄새가 난다

누이야, 널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겠니?

 

아내가 꿰매는 양말을 보다가 문득 네 삶의 흔적을 기억했어

남의 상처를 꿰매기 전에 실과 바늘이 먼저 서로를 꿰더구나

구멍 난 상처는 바늘이 지나는 자리인가보다

열린 곳은 닫고

막힌 곳은 뚫는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알다니

이모가 첩으로 살았다는 걸

엄마도 알고 있었을까

너의 얘기를 처음 듣던 안목바다

이젠 바다에 가도 파도까지 첩첩 처업처업 하는 걸

 

2.

나는 첩의 자식이었으나 깔깔대며 자랐다

어떤 비밀처럼, 한 여자가 우리 집을 찾아오던 저녁

바람은 뒤안의 나무를 몹시 흔들었고

내 웃음은 영영 멈췄다

그것은 나의 불행일 뿐 결코 한반도의 불행은 아니었다

전쟁 통에 잃어버린 아내라고만 소개했을 뿐

아버지는 잔가지를 흔드는 바람 같은 변명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믿을 수 없었으므로 울려고도 하지 않았다

낯선 여자는 우리 집 뒷방에서 하룻밤을 잤을 뿐인데

아침에는 마당을 호령하는 큰엄마로 깨어났다

 

구멍 숭숭 난 자리로 찬바람이 지나갔고

비 오는 날엔 양동이 소리가 요란했다

아버지, 날 좀 숨겨줘요

아버지가 십여 년 지켜 온 비밀처럼

첩의 자식이란 걸 나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싶어요

소리치는 구멍마다 비밀을 비우듯 마음의 숲을 베어냈다

 

아버지는 세 집 건너 더 큰 집으로 사랑채를 옮겼고

엄마가 외로울 만하면 큰엄마의 자식들이 찾아와

안방에다 욕설 섞은 거름을 붓기도 하고

어느 이른 아침엔 큰엄마가 마루에다 구정물을 쏟고 갔다

부서지는 장롱과 문짝이 요란하게 울어주었으므로

나도 언니도 오빠도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다

거름과 구정물이 발효된 자리에선 기포가 생겨났다

 

오빠, 나도 내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알았어

당뇨로 자꾸 눈은 멀어지는데

상처는 돋보기 없이도 보인다는 것을

구멍은 늘 빈자리였다는 걸

정신과 의사가 말하더라

상처 속에 머물던 찬바람까지 바느질로 가둬보라고

 

오빠하고 부석사 돌계단 오르던 날

구멍 난 상처들을 한 땀 한 땀 공들여 밟아갔어

돌까지 공중으로 띄우는데, 까짓 내 가라앉은 삶쯤이야

합장을 한 뒤 바늘과 실을 꺼내 상처 난 자리를 꿰매기 시작 했어

오빠, 그거 알아?

구멍을 메우려면 그 주변 촘촘히 또 다른 구멍이 필요하다는 걸

한 땀씩 바늘 뚫고 지나는 자리마다 여전히 통증이 고인다는 걸.

 

정연수∙2012년 ≪다층≫으로 등단. 저서 탄광촌 풍속 이야기. 편저 한국탄광시선집(전2권). 강릉원주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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