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0호(여름)정우영의 시평에세이 8/남북의 권력이여, 남북주민보고서를 읽어라․
페이지 정보

본문
정우영의 시평에세이 8
남북의 권력이여, 남북주민보고서를 읽어라․
1. 불쌍하다, 남과 북의 주민들이여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남북간에 전쟁 벌어지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만큼 초접전의 살벌한 말들이 분단선을 넘어 서로 오갔다. 그 말이 현실화되었으면 어땠을까. 끔찍하다. 생각만 해도 오금 저리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의연한 척하고 있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하루하루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다. 문제는, 이 모든 엄혹함이 언제 그칠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남북간 밀월의 상징과도 같았던 개성공단도 문을 닫았다. 상대방을 헐뜯으며 으르렁거리던 군사정권 시절로 회귀한 느낌이다.
날카로운 말 대립의 현장을 온몸의 스트레스로 받으면서 나는 생각한다. 무엇 때문인가. 어떤 의도로 이들은 양 쪽 주민의 안위를 볼모삼고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는 아주 사소한 꼬투리 하나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양쪽 권력은 한 치의 물러섬 없는 한판 대결을 펼치는 중이다.
옥죄는 시간 속을 헤매면서 나는 혹 이 다툼이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권력 다지기가 아닐까 의심한다. 분단상황을 인민 핍박의 내치 수단으로 삼던 독재정권의 움직임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까닭이다.
이런 걸 권력의 암묵적 동의라고 하는 것인가. 불쌍하다, 남과 북의 주민들이여. 정전 60년을 이렇게 맞고 있구나. 한탄하고 있을 때 하종오의 시선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의 눈빛은 나에게 이렇게 이르는 것 같았다. 권력의 움직임은 권력에게 맡기고 시인은 시의 눈, 시의 귀 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맞다, 시인은 시의 눈, 시의 귀, 열어야지. 그런데 왜 하필 그때 하종오의 시선이 나를 찾아왔을까. 나는 얼마 전 받아 밀쳐두었던 그의 시집을 꺼낸다. 아하, 제목이 남북주민보고서이다. 그가 찾아온 까닭을 이제 알겠다. 그의 이전 시집 제목은 남북상징어사전 아니었던가. 남과 북에 관해 섣부른 객담은 집어치우고 시로 말하라, 하는 뜻일 것이다.
나는 그 무언의 뜻에 적극 동의한다. 동의하면서 나는 그의 시 중 하종오와 하종오를 다룬 시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는 이 시들에서 묻는다. 남과 북이 다른가? 그럼 거기 사는 하종오란 이름의 사람들도 다른가? 하고.
서울 시민 하종오 씨는 걸어서 평양 가고
평양 시민 하종오 씨는 걸어서 서울 간다
두 하종오 씨는 옛 비무장지대에 다다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돌아다니다가 마주치자
멋쩍어 눈인사하지만 동명이인인 줄 모르고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릴지 서로에게 물은 다음
지방도시는 사는 시민이려니 여기고 금세 잊는다
서울 시민 하종오 씨는 처음 밟는 북한 길 걷다가 쉬고
평양 시민 하종오 씨는 처음 밟는 남한 길 걷다가 쉰다
평양에 도착하고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찬찬히
각각 도로 표지판이며 간판 글자며
집 모양새며 옷매무새며 산봉우리며 강줄기며
두 하종오 씨는 낯설어하며 두 눈에 담다가
문득 경건해져서 더욱 찬찬히 걷는다
― 「두 하종오 씨의 순례-상상도」 전문
시집 남북상징어사전에 실려 있는 시 중 한 편이다. ‘상상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처럼 통일 이후 어느 날, “서울 시민 하종오 씨는 걸어서 평양 가고/ 평양 시민 하종오 씨는 걸어서 서울” 가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두 하종오 씨는 옛 비무장지대에 다다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돌아다니다가 마주치자/ 멋쩍어 눈인사하지만 동명이인인 줄 모”르고 지나친다. 다른가, 이 둘이? 두 하종오 씨는 “각각 도로 표지판이며 간판 글자며/ 집 모양새며 옷매무새며 산봉우리며 강줄기며” “낯설어하며 두 눈에 담”지만, 마치 한 사람 같지 않은가. 단지 한 사람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또 한 사람은 평양에서 태어나 자랐을 뿐이다.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새로운 경이 앞에서 “문득 경건해져서 더욱 찬찬히 걷는” 것도 똑같은데.
그의 진의는 이럴 것이다. 다르다고 하지 말고 같은 것을 서로 나누자고. 하종오는 하종오라는 것이다. 하종오가 하종오임을 알면 두려울 게 무엇 있을 것인가. 내가 나를 알고 있는데. 그는 두 하종오 씨를 통해 남과 북이 하나임을 명쾌하게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가 쑥스러울 정도로.
2. 서글프고 아픈 오늘과 내일
서로 갈라선지 60여 년도 넘은 지금 남과 북은 하나이되 하나가 아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한 인간이 태어나 회갑을 넘겼다면 그의 역사는 그의 체험으로 뚤뚤 뭉쳤을 것이다. 전언과 교육으로 이어진 그 이전의 간접적 기억은 그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통일이 된다 해도 우리의 삶에서 정 깊은 교감 같은 것은 슬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그 애틋한 과거와, 서글프고 아픈 오늘과 내일을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지나간 어느 봄날엔
파주로 시집간 이팔청춘의 딸내미와
개풍 사는 중년의 친정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걸어서 올라가고 내려가다가
중간쯤에서 마주치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찬합에 싸가지고 온 음식을 맛보며
서로 닮은 손맛을 칭찬할 때,
에움길이 쳐다보고
산모퉁이가 돌아보고
산줄기가 굽어보아서
둘레에 있던 나무들이 꽃들 화, 알, 짝, 피웠다
요즘 어떤 봄날엔
말년이 된 딸내미는 반찬 간을 보며 파주에서 개풍 쪽을 바라보다가
노환에 든 친정어머니는 입맛을 잃고 개풍에서 파주 쪽만 바라보다가
중간쯤에서 허공이 환하게 밝아 보이면
그 아래 있는 나무들이 꽃들 피워서
산줄기가 슬금슬금 뒷걸음치고
산모퉁이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에움길이 쭉쭉 뻗어간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다가올 어느 봄날엔
개성으로 살림 난 젊은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김포 사는 초로의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꽃구경하러 승용차를 운전해서 내려가고 올라가다가
중간쯤 휴게소에서 마주치자 그곳에 마주 서서
인사치레로 양가 식구들 안부나 물으며
서로 제스처를 쓰며 호들갑을 떨 때,
에움길이 멈춰 서고
산모퉁이가 뒤틀고
산줄기가 꿈틀거려서
둘레에 있던 나무들이 꽃송이들 풀, 풀, 풀, 떨어뜨릴게다
― 「반보기」 전문
“지나간 어느 봄날엔” 우리에게 이런 시절도 있었다. “파주로 시집간 이팔청춘의 딸내미와/ 개풍 사는 중년의 친정어머니가” 서로 그리운 정 사무쳐 “너무 보고 싶어 걸어서 올라가고 내려가다가” 파주와 개풍 중간 어디쯤에서 마주쳤다.(물론 현실에서야 이런 우연이 가당키나 하겠느냐만, 여긴 시 속 아닌가.) 그러자 둘이는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찬합에 싸가지고 온 음식을 맛보며/ 서로 닮은 손맛을 칭찬”한다. 풀어내고 싶은 곡절이 서리서리 쌓였을 테지만, 일단 서로 닮은 손맛을 칭찬함으로써 동질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요즘 어떤 봄날엔” 어떤가. “말년이 된 딸내미는 반찬 간을 보며 파주에서 개풍 쪽을 바라보다가” 울음 터뜨릴 것이며 “노환에 든 친정어머니는 입맛을 잃고 개풍에서 파주 쪽만 바라보다가” 속 끓일 것이다. 그러고는 “중간쯤” “허공이 환하게 밝아 보이”는 자리에 서로의 마음을 끌어다 놓을 것이다. “지나간 어느 봄날” 만났던 서로를 몹시도 애타하면서.
자, 그러면 “앞으로 다가올 어느 봄날”은 어떨까. “개성으로 살림 난 젊은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김포 사는 초로의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그저 잊고 살다가 “꽃구경”이나 할까 하고 승용차 끌고 나설 것이다. 각기 서로 “운전해서 내려가고 올라가다가/ 중간쯤 휴게소에서 마주치자” 그들은 서로 화들짝 놀라 “인사치레로 양가 식구들 안부나 물으며/ 서로 제스처를 쓰며 호들갑을 떨”지나 않을까. 예전 봄에는 딸내미와 친정머니에 감응한 “둘레에 있던 나무들이 꽃들 화, 알, 짝, 피웠다”면, 여기에 이른 봄에는, “둘레에 있던 나무들이 꽃송이들 풀, 풀, 풀, 떨어뜨릴 게” 여실하다. 사람들 불통의 겉치레에 자연도 맘을 돌리는 것이다.
그는 직관으로 아는 것이다. 지금같이 남과 북이 적대적이라면 통일된 뒤 어느 날 우리의 가족 관계는 이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걸. 그러니 그는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누군가는 잔소리 계몽으로 치부하더라도 성심껏 남과 북을 향한 구애의 시, 계속해서 쓸 수밖에는.
그가 보기에, 남과 북의 차이는 깊고도 넓다. 이 차이를 얼른 되돌리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고 그는 진심으로 생각한다. 북의 의주 시골을 배경 삼은 「멱」을 보자.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삶의 양태로 보면 엄청난 차이가 거기에는 담겨 있다. 남쪽 75세의 김해성 씨와 북쪽 33세의 김해성 씨 목욕 모습이 거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 서술되는 것 같은 착각도 불러일으킨다. “그날 밤 개운한 몸으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의주의 김해성 씨는 자라는 아들이 걱정되어서/ 서울의 김해성 씨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서/ 단잠을 자지는 못했다”의 두 김해성 씨가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통일의 내일을 내다보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내어민다고 해도 이 현실은 비켜가지 않는다.
어느 먼 뒷날 기차 타고 여행하다가
옆자리에 앉은 한 주민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는 북한 출신 농부라는 걸
나는 남한 출신 시인이라는 걸
서로 알고는 그가 나에게
풀을 매다가 산을 바라볼 때면
밭고랑이 산 위로 올가더라거나
알갱이를 거두다가 마을을 바라볼 때면
밭두둑이 마을 쪽으로 몰려가더라는
이런저런 느낌을 풀어놓는다면
나는 기꺼이 적은 후
문장을 만들고 다듬어놓겠다
― 「대필가와 기록자」 부분
우리에게 마침내 평화한 시대가 와서 이 시에 나오는 것처럼 “풀을 매다가 산을 바라볼 때면/ 밭고랑이 산 위로 올가더라거나/ 알갱이를 거두다가 마을을 바라볼 때면/ 밭두둑이 마을 쪽으로 몰려가더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풀어놓고 또 받아 적는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당신도 알고 나도 알건대 현재의 상황에서 이 정경은 말도 안 되는 꿈이다. 그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3. 몽상하고 몽상하라
하종오의 시 「복숭아」를 보라. 그의 현실인식은 냉혹하다 싶을 만큼 객관적이다. 이는 물론 여기에서만 보이는 태도는 아니다. 그는 실은 시집 곳곳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나이, 성별 등을 굳이 밝혀 놓고 있다. 사실적, 객관적 글쓰기 방식을 표방하는 것이다. 왜 그는 이와 같은 방식을 고집하는가. 시적 정황은 그가 만들어 낸 것이지만, 실제 현실에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그는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 「복숭아」도 예외는 아니다.
림선희 씨(여, 당시 22세)는 돈을 벌어
부모 형제에게 보내려고
복사나무에 복사꽃이 피던 날
두만강을 건넜다가
복사나무에 복사꽃이 지기도 전에
한족 사내에게 붙잡혀서
조선족 중년사내에게 팔려갔다
어떤 한족 농부에게 팔려와 강제로 결혼한
어떤 북조선 처자가 도망치다가 붙잡혀
치마 벗겨진 채 끌려다니는 광경을 보며 웃던
조선족 중년 사내를 본 뒤로
림선희 씨도 날마다 틈만 노렸다
복사나무에 복사꽃이 피던 날
림선희 씨는 몰래 길을 나섰다가
복사나무에 복사꽃이 지기도 전에
다시 다른 한족 사내에게 붙잡혀서
다시 다른 조선족 중년 사내에게 팔려갔다
조상이 일제시대 때 조선에서 건너왔다지만
조선족 중년 사내 두 명과 강제로 동거했던
림선희 씨가 십여 년간 시도한 끝에
마침내 복사나무에 복숭아가 열릴 무렵 한국에 들어와
북조선 탈출 중에 겪은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 「복숭아」 전문
현대판 바리데기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이 비현실이 현실이다. 탈북자들의 현실은 이시에 보이는 림선희 씨의 인생처럼 가혹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족 중년 사내 두 명과 강제로 동거했던/ 림선희 씨가 십여 년간 시도한 끝에/ 마침내 복사나무에 복숭아가 열릴 무렵 한국에 들어와/ 북조선 탈출 중에 겪은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그는 시를 끝낸다. 하지만, 당신은 그녀의 이후 삶을 상상해 보았는가. 나는 그녀의 한국 삶이 저 조선족 중년 사내의 수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여긴다. 탈북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문젯거리로 전화한 것이다. 더 이상 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소위 루저로 취급하는 것이다. 탈북자가 적합한 증거가 아닐 수는 있겠으나 이것이 남과 북의 엄연한 현실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통일과 평화의 날들을 운위할 것인가. 몽상 아닌가.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하종오는 아마도 바람이나 기원이라는 어휘를 펼쳐들 것이다. 그도 그렇다. 몽상이라니! 우리 현실이 너무 절망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몽상에 기꺼이 동의한다. 몽상이면 또 어떤가. 꽉 닫힌 현실의 두터운 벽을 허무는 건 정상적인 대화와 타협이 아니다. 일순간 놀라운 몽상이거나 비상식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숱한 논리의 벽에 에워싸여 있을 때에는 더욱이나 그렇다. 몽상하고 몽상하라, 하고 외치고 싶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히려 그의 다소간 뻔한 몽상이 불만이다. 더 확장해야 하는 것이다.
개성공단에 근무하는 리영숙 씨(여, 20세)는
업간체조 시간을 가장 기다린다
미싱 앞에선 한눈팔지 않지만
운동할 땐 짐짓 딴생각한다
동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상상, 이를테면
간식으로 나온 초코파이를 더 먹고 싶은 날엔
남한에 가서 실컷 사먹는 광경을 그려보는 것,
그러다가 도리질하기도 하고
남한에서 또래들이 가지는 직업을 알고 싶은 날엔
인사성이 밝은 남자 직원에게 물어보는 것,
그러다가 곁눈질하기도 한다
업간체조 시간이 주어진 까닭을
노동 잘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리영숙 씨는
남한에서도 누군가
업간체조 시간에 팔다리를 움직이며
이런 자신을 상상할지도 모른단 딴생각 또 하다가
나중에 그를 만나 그걸 확인하게 되면
개성공단에서 즐거운 인생의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고 싶다
팔다리 한 번 더 돌리고 나서
미싱 앞에 서면 팔뚝과 장딴지에 힘이 붙어도
자신이 박음질한 옷을 입어보지 못한 숙련공 리영숙 씨는
언젠가는 입어보고 싶다는 딴생각도
업간체조 시간엔 몰래 해볼 수 있어서 좋다
― 「업간체조 시간」
개성공단에서는 ‘업간체조 시간’이라는 걸 두는 모양이다. 연속적으로 일하다 보면 피곤도 하고 능률도 떨어지게 마련이니 체조를 통해 몸의 긴장을 풀자는 뜻이겠다. “개성공단에 근무하는 리영숙 씨(여, 20세)는” 그 “업간체조 시간을 가장 기다린다.” 일할 땐 “한눈팔지 않지만/ 운동할 땐 짐짓 딴생각”이 가능한 까닭이다. 어떤 딴생각일까. “간식으로 나온 초코파이를” “남한에 가서 실컷 사먹는 광경을 그려보는 것”, “남한에서 또래들이 가지는 직업을” “인사성이 밝은 남자 직원에게 물어보는 것”, “남한에서도 누군가” “업간체조 시간에 팔다리를 움직이며/ 이런 자신을 상상할지도 모른단” 것, “자신이 박음질한 옷을” “언젠가는 입어보고 싶다는” 것 등이다. 딴생각이라고 해서 특출난 그 무엇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상들이다. 욕망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작은 바람들인 것이다. 남에서 보기에는 당장 실현가능한 아주 사소한 바람이 북에서는 속엣욕망으로 잠자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삿된 유혹은 없어 보인다.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는 생각이 강하다. 숙련공 리영숙 씨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만든 옷을 언젠간 입어보고 싶다는 상상을 “업간체조 시간엔 몰래 해볼 수 있어서 좋다”는 것 아닌가.
나는 하종오의 이와 같은 한정적 몽상이 불만이다. 기왕이면 더 확장해도 되지 않겠는가. 보다 본질적인 부분, 이를테면 남과 북의 현재적 갈등과 충돌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나, 남과 북 60여 년 별리의 정신질환 등은 어떤가.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주민 임금차별 문제나 핵 문제를 다룰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 물론 이해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르바이트」와 같은 시에서 보면 외국 노동 현장에서도 남과 북을 잘 그려내고 있다. 보다 깊게 핵심을 짚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외국 어느 건설 현장에
배치된 북한 노동자 김성환 씨(남, 40세)가
몰래 돈을 조금 모아서 돌아가려고
남한 사장 최장호 씨(남, 40세)가 운영하는 공장에
밤이면 아르바이트하러 나온다고 했다
북한 노동자와 남한 사장이
피고용인과 고용인이 되는 동안,
감시에 걸릴까봐 겁난 북한 노동자 김성환 씨는
근무시간이 짧아지기를 바란다고 했고
시급을 더 주고 싶은 남한 사장 최장호 씨는
근무시간이 길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실재인지 뜬소문인지 모를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외국에서나마 서로에게 도움 되는 사이로 보여서
가슴이 흥건해지기도 하고
언젠가 관계 맺을 남북 주민의 축소판으로 보여서
마음이 씁쓰레해지기도 했다
내가 남한 노동자로
외국에 나갔다가 생활비 모자라
밤이면 아르바이트하려고
북한 사장을 만나러 갈 날이 온다면
가슴이 흥건해지기도 하고
마음이 씁쓰레해지기도 할까
그때에 북한 사장과 나는
근무시간을 늘이지도 줄이지도 않고
시급도 알맞게 주고받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되면 좋겠다
― 「아르바이트」 전문
물론, 이 시 「아르바이트」에서도 그는 평상적인 남과 북의 인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남은 고용인, 북은 피고용인 하는 관계가 역전되는 세상을 그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기계적인 인식 안에 갇혀 있다.
나는 이제 우리의 인식이 그 너머를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누가 봐도 뻔한 설정과 인식은 더 이상 문학적 아우라를 움켜쥐지 못한다. 당연히 상황을 타개하는 문학적 울림과 감동도 제시할 수 없다.
평화와 통일, 그리고 남과 북의 온전한 삶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시인이여, 이제는 우리 민족의 동질성을 넘어 존재하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라. 다름을 알아야 같음이 보이지 않겠는가.
4. 하종오라는 가교마저 없다면
생각해 보면 하종오는 넘친다 싶을 만큼 넓고 깊게 남과 북의 현재를 시로 써왔다. 책제목으로 오른 것만 두 권일 뿐, 남과 북을 다룬 시들이 정말 많다. 그에게 남과 북은 둘이 아니다. 안타까이 나눠져 있는 한 민족이며 한 겨레이다. 그러니 아마도 그는 이 한 겨레가 진심으로 하나 되는 날까지 쓰고 또 쓸 것이다.
그런데 참 아쉬운 게 이 지난한 작업의 의미를 잘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어떤 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의 미학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어떤 시인의 작업이 모자라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예술창작에서는 때로 주류를 비켜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빚곤 한다. 외로운 작업을 함부로 폄하하지 말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모자라다고 여긴다. 좀더 깊게 파고들어야 하고 좀더 확장해야 한다. 또 다른 하종오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와야 하는 것이다. 하종오는 하종오 식으로 계속해서 써갈 것이니 그를 멈추게 할 필요는 없다. 다른 시인들이 그와는 또 다른 작업들을 더해 이를 풍성하게 채워야 한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이렇게 쓰다가 문득 타이핑 세우고 생각한다. 누가 그와 함께 시를 통해 남과 북을 들여다보려 할 것인가 하고. 씁쓸하게도 자신이 없어진다. 그만큼 남과 북의 관심도는 우리에게서 멀어져 있다. 하종오의 이 작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하종오라는 이런 가교마저 없다면 남과 북의 미래는 얼마나 암울할 것인가.
정우영
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살구꽃 그림자.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시는 벅차다.
- 이전글50호(여름)흐름/진단/임우기/詩라는 이름의 삶-2013년 봄의 시 14.06.06
- 다음글50호(여름)/미니서사/김혜정 14.06.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