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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흐름/진단/임우기/詩라는 이름의 삶-2013년 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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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737회 작성일 14-06-06 14:32

본문

흐름/진단

임우기

詩라는 이름의 삶-2013년 봄의 시

 

 

 

1.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

올 봄 제가 읽은 새로 나온 시집들과 문예계간지들 가운데서 함민복 시인의 시집과 두 시인의 신작시들을 소개합니다. 강화도에 살고있는 함민복 시인의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 2013. 2. 발행)을 읽으며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고단한 삶과 암울한 상황 속에서 과연 문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반성적인 물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함민복 시인의 시는, 좋은 시란 순수시를 쓴다 해도 암담한 사회 현실을 변혁하는 데 동참하고, 참여시를 쓴다 해도 삶의 근본인 우주 자연의 이치와 한몸 됨을 추구하는 순수한 시심을 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자연과 사물,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유가 뒷받침된 사회 변혁 운동에의 참여야말로 문학이 지닌 특성이요 특권이란 사실. 이렇듯 함민복 시인의 시를 읽으면 문인으로서의 삶과 문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시 몇 편을 소개합니다.

 

양철지붕이 소리내어 읽는다

씨앗은 약

 

씨앗 같은 약속 참 많았구나

 

그리운 사람

내리는 봄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가

가죽을 비틀어 빗방울을 턴다

 

마른 풀잎 이제 마음 놓고 썩게

풀씨들은 단단해졌다

 

봄비야

택시!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

 

꽃 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 「봄비」 전문

 

우선, 시의 첫 행이자 첫 연을 이루는, “양철지붕이 소리 내어 읽는다”라는 시구가 눈길을 끕니다. 시인은 양철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를 “양철지붕이 소리내어 읽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시 의식은 일견 볼 때 소박한 듯이 보이는 시적 표현으로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시의 경우 이 단순한 표현이 어떤 내력來歷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는가를 살피면 결코 간단할 수만은 없는 내공이 담긴 시구임을 알게 됩니다. 봄비 내리는 소리를 “양철지붕이 소리 내어 읽는다”라고 하여 양철지붕을 소리 내어 읽는 주체(주어)로 삼은 것은 양철지붕을 단지 인간화 혹은 의인화한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 첫행에 담겨있는 시적 비유의 심도는, 시적 비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 비유가 함축하는 생활의 심도에 있습니다. “양철지붕이 소리내어 읽는다”에서 양철지붕은 사물이기 이전에 페르소나의 오래된 가난한 삶의 거처이자, 시인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소리 내어 읽는 양철지붕’이라는 시적 비유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이와 같은 시적 표현 속에는 시인 자신과 함께 살아온 양철지붕이라는 사물이 가난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시혼의 상징으로서 교감 또는 공감할 수 있는 시혼의 담지자임을 보여줍니다. 곧 양철지붕은 시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의인화되는 대상에 머물지 않는 저 스스로 주어로서 시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의 첫 시구에서 우리는 시인의 일상생활 속 존재들인 양철지붕, 키우는 개와 같이 시인의 시혼이 접촉하는 사물들이 저마다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 존재들이 지니게 된 어떤 고유한 기운과 교감하게 된다는 것.

이 「봄비」라는 시는 함민복 시인의 시쓰기의 동력이 기본적으로 구체적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과 사물과 자연간의 교감과 공감을 통해 발원한다는 점을 우선 알려줍니다. 자연사自然事 운행의 이치를 통한 인간사人間事에서의 ‘약속’의 의미를 환기하는, “씨앗은 약속/ 씨앗 같은 약속 참 많았구나”라는 표현에도 봄비가 씨앗의 발아發芽를 도울 것이라는 자연 운행의 이치가 전제되어 있는 한편으로, 자연이 지닌 어떤 생활론적 함의含意를 드러냅니다. “그리운 사람/ 내리는 봄비”라는 표현도 인간사와 자연사가 도치되어 ‘그리운 사람’이 강조되어 있을 뿐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에의 그리움은 자연의 질서와 하나를 이룹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가/ 가죽을 비틀어 빗방울을 턴다”에 이르면 가난한 시인이 살고있는 누옥陋屋이 생명력이 가만히 감도는 은근한 봄기운의 거처임을 알립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구가 이어집니다.

 

봄비야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

 

자연의 생명력을 찬탄하는 이와 같은 시적 표현은 겉보기엔 범상한 듯하나 여기서도 현실적이고 구체적 생활력과 생활 정서의 깊은 힘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은 동심童心의 표현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씨앗이 봄비에게 “택시!” 하고 부른다는! 이러한 동시적 상상력은 물론 시인의 천진난만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습니다만, 그 천진난만이 일상생활과 한몸을 이룬 천진난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지 시인의 타고난 천성이 천진난만하다는 의미 정도로 해석하고 그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함민복 시인의 천진난만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그래서 마음이 허령이 창창한 맑은 기운 혹은 신명으로 지극하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마음의 천진난만함은 외부 존재들과의 접속을 통해 사물들과 서로 교감하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시학의 차원에서 본다면, 시인의 맑고 지극한 마음 상태는 자연이 지닌 일기一氣의 기운 속에서 사물과 사태들의 존재감과 상응하고 대화하고 교감하고 공감하고 이러한 접물接物 또는 관물觀物의 생기 속에서 자신만의 시어를 얻는 것입니다. 함민복 시인의 시는 자기 지식의 힘, 자기의식의 집착에 따라 사물의 언어를 일방적으로 부리지 않습니다. 시인의 시는, 사물들 저마다의 존재감을 느끼고 그 사물의 생기에 따라 사물들 저마다가 내는 침묵의 소리에 시인은 적극 감응하고 상응하여 태어난 시들입니다. 함민복 시인의 시어들은 시인이 부르고 싶은 언어이면서도 사물이 부르고 싶은 언어입니다. 시인은 사물의 언어를 시의 언어로써 부릅니다. 그러한 시를 가리켜 공감共感의 시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사물과 시인과 독자가 모두 함께 마음을 나누는 시어들은 이번 시집 도처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봄비」라는 시도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의 부름에 시인의 맑은 영혼이 화답한 시입니다. 그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시구는 앞서 말한 “봄비야/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라는 시구를 뽑을 수 있습니다. 봄비를 보고서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이 누구냐”라는 물음은 물음일 수 없는 갓난아이의 마음 그 자체라는 것, 그 동심으로 인해 모든 존재의 존재감을 편견 없이 교감하고 공감하게 된다는 것, 택시!라는 생활 속 비근한 이미지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이 순수한 동심의 시적 상상력은 사회적 상상력과 접속한다는 것!

 

함민복 시인의 시는 암울한 사회 현실적 삶 속에서 마주친 사물들을 암울함이나 사회적 갈등이나 모순 관계 속에서 드러내지 않고, 예의 시인의 동심의 맑은 상상력 속에서 어떤 근원적 진리의 세계로서 드러냅니다. 한마디로, 생활 속에서 도를 찾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불탄 집」, 「서그럭서그럭」, 「오래된 스피커」 같은 작품들은 최근 한국시가 수확한 매우 귀한 결실이라고 할 만합니다.

 

불탄 집에 어둠이 산다

불탄 집엔 더 이상 불이 살지 않는다

 

불탄 집엔 소리가 살지 않는다

불탄 집에 고요가 산다

 

어둠이 불을 태워버린 것인가

고요가 소리를 태워버린 것인가

 

어둠이 탄 집에 불이 살지 않는다

고요가 탄 집에 소리가 살지 않는다

 

불은 어둠을 태워 어둠을 만든 것인가

소리는 고요를 태워 고요를 만든 것인가

 

불타기 전 어둠과 불은 동거자였다

불타기 전 고요와 소리는 서로 존재했다

 

불탄 집엔 불탄 냄새가 산다

불탄 집이 불탄 냄새로 운다

 

불은 타올라 어둠이 되는가

소리는 타올라 고요가 되는가

 

불탄 집엔 그림자가 없다 불탄 집엔 그림자만 있다

― 「불탄 집」 전문

 

일단 시어들이 잘 여문 철학적 사유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만, 이보다 앞서 이해해야 할 점은 시인이 생활 속에서 경험한 사태(「불탄 집」)의 관찰을 통해 깊은 사유를 펼치고 있다는 점이고, 중요한 사실은 모든 시구와 낱낱의 시어들은 저마다 사회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굳이 여기서 일일이 해석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참담한 사회적 현실의 함의含意가 시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시는 실로 생활의 이치와 자연의 이치와 사회의 이치 같은 것들이 서로 꿰뚫려져 접합된 채로 깊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시어들은 맑고 평이한 시적 비유로 되어 있으면서도 그 시어들은 치열하고 심오한 현실주의적 사유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시인의 특별한 시적 자질들과 만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치열한 삶 속에서 터득한 생활 철학적 사유 세계가 그중 하나요, 또 하나는, 가령 시 제목인 ‘불탄 집’이라는 시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외부 사물 혹은 사회적 사태 자체가 걸어오는 말들에게 호응하고 교감하는 시인의 능력이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앎은 앎이로되, 앎이 시인의 현실 생활과 분리된 앎이 아니라, 앎과 알이 한몸을 이룬, 즉 현실적 생활과 사회적 변화의 열망이 하나의 산 알生卵 즉 원시적 우주 자연의 이치로서 함민복 시인의 시적 사유의 중심을 이룬다는 걸 뜻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시적 우주 자연은 삶에서 유리된 관념도 아니요, 아득한 과거의 기억도 아니며, 늘 생활 현실 속에서 함께 살고 있는 원시성[산 알]이라는 것.

「서그럭서그럭」 같은 작품은 다소 쓸쓸하고 암울한 농촌 생활을 다루면서도, 모든 삶과 존재의 안팎으로 불가결하게 작용하는 우주 자연의 섭리를 노장적 스케일에 담아놓은 명편으로 기억될 만합니다. 「서그럭서그럭」은 텃밭에 쳐놓은 그물에 관한 관찰과 명상이 마치 소요逍遙하듯이 펼쳐집니다.

 

텃밭에

햇살과 바람에 걸리는 그물

 

수직의 꽃밭에

오이꽃이 피고 지고

 

그물에

오이덩굴이 걸렸더니

 

오이 덩굴에

그물이 걸렸더니

 

죽어서도 그물 놓지 못하는

오이덩굴에

 

햇살과

바람이 걸려

 

서그럭

서그럭

― 「서그럭서그럭」 전문

 

이와 같은 시는 고도로 압축되고 절제된 시어의 운용도 빛나고 있지만, 관찰의 절묘함이나 사유의 원만함과 거침없음에 있어서 실로 시의 진경珍景으로 기록될 만합니다. 특히 맨 뒤 두연, 오이덩굴과 텃밭에 쳐 놓은 그물이 서로를 구속하듯 옥신각신 다투는 관계를 그리다가 그 오이덩굴(혹은 그물)에 “햇살과/ 바람이 걸려”(6연) “서그럭/서그럭”(끝연) 소리를 낸다는 시구에 이르면, 가난한 농촌 생활 속에서도 정신의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소요유逍遙遊적 생활, 혹은 무소유無所有의 걸림없음, 낙천안명樂天安命과도 같은 경지를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노장老莊에게 본디 도는 꼭 짚어서 말할 수 없는 생명계의 그물망과 같은 것일 터인데, 이 시의 첫연에서는 “텃밭에/ 햇살과 바람에 걸리는 그물”(1연)이라하여 생명계의 그물망의 비유로서 햇살과 바람에 텃밭의 그물이 걸렸다고 노래하면서도, “죽어서도 그물 놓지 못하는/ 오이덩굴에// 햇살과/ 바람이 걸려(5연, 6연)”라 하여, 오히려 그 오이덩굴(텃밭)의 보잘 것 없는 생활 속 그물에 햇살과 바람이라는 우주적 대자유의 상징물이 걸려있다는 역설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우주적 대자유가 관념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 생활 속의 대자유로서 펼쳐지고 있다는 점. 그 생활 속 대자유, 즉 생활 속 소요하는 삶 혹은 ‘새로운 원시자연적’ 삶의 의미는 “텃밭에/ 햇살과 바람에 걸리는 그물”이 내는“서그럭/ 서그럭”이라는, 구체적이고도 생생한 감각적 소리 언어, 동시에 시원적始原的 소리로서 다가오는 오묘한 현실-초월적인 소리 언어에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생활이 우선이요, 대자유는 생활 속에 내재하는 것이라는 시인의 견고한 현실주의적 사유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정신은 대소大小, 다소多少, 장단長短 따위를 일일이 가리고 따져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근대적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신으로서, 함민복의 시에서 계량기의 속성을 다룬 시들 가령, 「줄자」, 「직각자」, 「수평기」 등의 작품들은 계측計測이 지닌 물질만능주의적 근대성에서 탈피하여 계측이 지닌 근원적 의미로서의 자연성과 인간성에 대해 사유한 작품이랄 수 있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청빈한 삶과 시 의식을 보여주는 또 한 편의 아름다운 노래가 있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그 집에 사내가 산다

어제 사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오늘은 내리는 눈은 보았다

 

사내는 개를 기른다

개는 외로움을 컹컹 달래준다

사내와 개는 같은 밥은 따로 먹는다

 

개는 쇠줄에 묶여있고

사내는 전화기줄에 묶여있다

사내가 전화기줄에 당겨져 외출하면

개는 쇠줄을 풀고 사내 생각에 매인다

 

집은 기다림

개의 기다림이 집을 지킨다

 

고드름 끝에 달이 맺히고

추척,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에 개가 찬 귀를 세운

 

전화기 속 세상을 떠돌다 온 사개가 놀란다

기다림에 지친 개가 제 밥을 놓아

새를 기르고 있는게 아닌다

이제

바다가 보이는 그 집의 주인은 사내가 아니다

― 「동막리 161번지 양철집」 전문

 

이 시가 불러일으키는 감동의 발원지는 앞서 말했듯이 일단 시적 자아의 삶의 구체적 진실성 속에서 찾아질 것입니다. “고드름 끝에 달이 맺히고/ 추척,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에 개가 찬 귀를 세운 /몇 /날”과 같은 시구들은 남루한 생활공간에 대한 추호의 허위도 없는 친밀함과, 깊은 생명애와 자연애로부터 나오는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 그리고 우주 만물에 대한 공경심 등이 함께 어우러져 낳은 빛나는 시적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적 표현은 어떤 비유나 메타포를 구하려는 노력 이전에 순정한 시심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자족하는 자연인적인 생활인의 차원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합니다. 시 쓰기가 자기 수행과 사회적 실천의 한 의미있는 방편이라고 한다면, 시적 수행이란 굳이 종교적이거나 학문적 차원이 아니더라도, 시인의 일상생활과 그 속에서 만나는 인간과 자연과 사물들과의 정성스런 만남과 교감과 모심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함민복 시인의 시편들은 시적 수행의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시인의 시는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곧 시천주의 뜻)’하는 시를 시인의 삶으로서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시는 노동하고 생활하는 인간사人間事와 자연사가 스스로 말을 하고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생활 속 교감의 능력이 사물 속에 깃들어있는 ‘시적인 것’을 부르고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시라는 이름의 삶이 그의 시에는 살아 숨 쉽니다. 시 자체가 시천주인 셈입니다. 가령, 인용시의 2연은 청빈淸貧한 삶의 외로움이 다름 아닌 시천주의 실천임을 보여주는 인상 깊은 장면이랄 수 있습니다.

 

사내는 개를 기른다

개는 외로움을 컹컹 달래준다

사내와 개는 같은 밥은 따로 먹는다

 

집주인과 개 사이의 관계가 시천주 관계, 곧 자기 안의 신령함이 자기 밖의 존재들과 교감하고 서로 상생의 삶을 살면서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개가 집주인의 외로움을 “컹컹 달래준다”라는 표현은 동심童心의 마음에 가까운 표현입니다만, 이는 동심에 이르러야만 바로 시천주의 마음에 다다를 수 있다는 일종의 역설적 진리를 보여주는 시구이며, “사내와 개는 같은 밥을 따로 먹는다”에 이르러선, 시천주의 뜻은 가장 극명한 일상적 실천(수행)의 표현을 얻게 됨을 보게 됩니다. 수운 선생의 시천주 사상은 그 훌륭한 제자인 해월 최시형崔時亨 선생에 이르러 시천주란 포태胞胎와 같은 의미이고 또한 뭇생명을 밥 먹이는 일以天食天과 같이 양천養天 이치로서 전개되었던 것처럼, 이 시가 지닌 동심의 맑은 시혼과 함께 “사내와 개는 같은 밥을 따로 먹는다”는 시적 서술은 시천侍天-양천養天이 나날의 생활 속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신뢰할 만한 시적 광경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전화기 속 세상을 떠돌다 온 사내가 놀란다

기다림에 지친 개가 제 밥을 놓아

새를 기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

바다가 보이는 그 집의 주인은 사내가 아니다

 

만물의 존재를 공경하고 모시는 시인의 마음은, 앞서의 「봄비」라는 작품에서도 보았듯이, 이 시에서도 “집은 기다림/ 개의 기다림이 집을 지킨다”라는 시적 비유 속에 오롯이 담아져 있고, 위 인용 시구들에 이르러, 가난하고 외로운 집에서 “기다림에 지친 개가 제 밥을 놓아 새를 기르고 있는” 즉 뭇생명이 생명을 아끼고 생명이 생명을 먹이는 시천侍天-양천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가난한 외딴 집에서 벌어지는 한울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이 가난하고 외로운 ‘사내’의 집은 더 이상 사내의 집이 아니라 생명을 모시고 키우는 ‘시천-양천의 집’이라는 깨달음이 이어지게 됩니다. 아마 이러한 시적 깨달음은, 시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선물, 시라는 이름의 삶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축복으로서 시적 수행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2. 최승자 시인과 전다형 시인의 신작시

2013 봄 계간지 ≪창작과비평≫ 그리고 ≪리토피아≫에 각각 실린 최승자 시인과 전다형 시인의 시를 접했습니다. 최승자 시인의 시 「사람들이」를 접하면, 우선 최승자 시인의 시가 날로 지극한 기운으로 더욱 깊어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에게 생은 인생이면서 동시에 ‘인생-너머의 생’입니다. 곧 인간적 생과 초인超人적 생이 둘이 아닌不二 마음 상태에서 세상을 직관하거나 관조합니다. 시 또한 마찬가지여서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시어는 늘 ‘시어-너머’를 품고 있어서 ‘시어의 지시 대상’는 ‘시어의 지시 대상-너머’와 늘 둘이 아닌 일종의 아이러니컬한 언어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사람들이 걸어간다

나무들이 걸어간다

시간의 힘 앞에서는

道人들도 詩人이 된다

 

(生에 붙어있는 것들은

좀체로 生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 최승자, 「사람들이」 전문

 

시의 1행의 ‘사람’과 2행의 ‘나무’는 두 문장(1행과 2행)의 형식이나 형식 논리로 본다면, 사람과 나무는 서로 동격 관계이면서 동시에 접속된 관계에 있음을 비유합니다. 사람과 나무가 둘이 아니고不二 서로 다르지 않다는不異 인식은, 시의 표면으로 본다면, 1행과 2행이 동일율적 관계에 있는 시 형식에 의해서도 추론될 수 있습니다만, 앞서 말했듯이 무궁한 그물망을 이룬 생명계의 깊은 의미에서 보면, 사람과 나무는 ‘둘이면서 서로 접속되어 있는 하나’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사람과 나무가 서로 불이不二이지만, “사람들이 걸어간다/ 나무들이 걸어간다”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은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현상이지만, 나무들이 걸어간다는 것은 주관적 환상이거나 초월적인 현상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걸어가고 나무도 걸어간다는 시적 상상력은 사람과 나무 사이의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보여주는 표현으로서, 이러한 시적 상상력은 공간 속에서라기보다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공간은 물리적 연장이 전제되지만 시간은 초월이 가능한 주관적 의식 혹은 무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시간의 힘”은 객관적이고 선적인 시간이 아니라, 현실 속에 깃들어 있는 ‘무궁한 마음 속 무궁한 시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무궁무진한 그물망의 시간. 그 순환하고 반복하고 편재하고 진화하는 동시다발적이고도 무궁무진한 “시간의 힘 앞에서는” ‘사람’과 ‘나무’ 사이의 관계는 서로 불이不二의 관계에 놓이게 되어 ‘사람들이 걸어가고, 나무들이 걸어가는’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무궁한 ‘한울’ 안의 무궁한 시간에 따라 사람과 나무는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면서 둘이 되는 이치를 삶 속에서 수행 정진하는 사람을 가리켜 도인道人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적 사유 속에서 최승자 시인의 세계관의 본질이 담겨있다고 생각되고, 시인의 독특한 시인론은 아마도 이러한 사유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시간의 힘 앞에서는/ 道人들도 詩人이 된다”고 최승자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는 것. 시인과 도인은 둘이면서 하나라는 것. 그런데 ‘道人들도 시인이 되는’ 세상은 역설이기도 하고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간단히 말하여, 도는 말이 필요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역설이 성립합니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老子의 1장)이라고 한 도의 본질을 떠올린다면, 역설적으로 말해, 시인은 비로소 말을 하지 말아야 하고, 도인은 비로소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도와 시 사이의 역설이 시와 삶의 근원적 진리를 겨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승자 시인의 초인적 의식과 고유하고 치열한 현실적 삶의 언어를 절절히 공감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시가 지닌 깊은 감동의 뿌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용시 「사람들이」와 함께 발표된 시 「먼지들로」로 미루어보건대, 최승자 시인은 시는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시라는 이름의 허가 존재할 뿐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먼지들로 새곰새곰 세월의 집을 짓는다/그 세월의 문간에 무슨 기둥을 세울까/ 기둥이란 게 있을까, 잡을 길도 없는 虛”-「먼지들로」 전문) ‘시간의 힘’‘세월’이라는 ‘虛’가 시로 또는 삶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시가 허한 채로 존재하니, 시는 누구의 피조물도 아니고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는 ‘허한 마음’과도 같은 것일 겁니다. 허공의 시정신이랄까. 허와 도의 세계를 위해서 생으로부터 말을 떨어내었던 ‘도인道人’이 시인詩人이 된다’는 것은 “좀체로 생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말을 살린다는 뜻과 동일한 뜻이 됩니다. 이 시에서 시는 가까스로 말을 하지 않아 비로소 도를 이루고, 도는 가까스로 말을 하여 비로소 시를 이루는 형국입니다.

윗 시의 괄호 속 시구는 최승자 시인의 시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도인이 시인이 되는’ 역설의 시 의식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없음과 말은 역설적 관계이지만 말없음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으려할 때 가까스로 시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를 시인은 괄호를 쳐서 “(生에 붙어있는 것들은/ 좀체로 生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윗시의 괄호 속 말들은 그 말없음에 가까스로 붙어있는 말의 모습을 보여주며, 따라서 최승자 시에 있어서 괄호라는 형식은 정녕 살아있는 시 즉 ‘시라는 이름의 삶’은 언어적 존재의 자기 부정의 역설이 불가결함을 보여주려는 시적 장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괄호 속 언어들은 시인의 마음의 표현이라기보다 시의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리토피아≫ 봄호에 실린 전다형 시인의 시를 읽으면, 현세적 삶과 사물에 감추어진 ‘시적인 것’과 접속하여 그것을 저만의 시어로 드러내기 위해 성찰하고 고투하는 시인의 인상적인 모습과 마주치게 됩니다.

 

선산 고구마 밭에 사람거름을 내고 온 날

남은 유족들이 둘러앉았다

유품으로 물려받은 반닫이 속

골방신세 웅크린 시간을 펼쳤다

유정유정 잘 접힌 반닫이의 행간

무정무정 강물소리가 강둑에 차올랐다.

젖은 걸레 마른 걸레 번갈아 흔적을 문질렀다

삐걱삐걱 반닫이 다락방에서 치워지고

열쇠 잃어버린 잠글세 우두커니 집어들다

부르다만 후렴구 한 소절

음울음울 돌림노래가 쏟아졌다

열쇠 잃은 반닫이 곁에 장손, 장남 어깨에

대들보다, 가문이다, 지워놓고

서로에게 삿대질로 노를 저었다

소나기 내리고 강둑 물 불고

남루한 나룻배는 흙탕물에 주정선,(몸체가 작은 배, 상륙용 주정선)

가속도를 잡아 탄 오해가 급물살을 부추겼다

발만 동동 굴리던 육지는

달리는 물살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를 멀리 저어갔다

흙, 흙, 봉분 접안

서로를 껴안고 부른 돌림노래

― 전다형, 「접안」 전문

 

이 작품은 장례식을 소재로 삼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흥미로운 까닭은 죽음을 다루면서도 죽음에 접한 삶에 대해 깊이 관찰하고 그 삶의 내용을 시의 삶으로 전화시키는 시적 능력이 각별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삶이 죽음에 가닿는, 차안에서 피안에 닿는 접안接岸의 풍경을 그리는 언어의 솜씨가 남다릅니다. 무엇보다도 시어가 지닌 민감한 음소音素의 기능을 적극 활용하여, 시어가 지시하는 의미론 위에 음악적 생기를 머금은 소리가 지닌 새로운 의미론적 차원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 그 뚜렷한 예로서, “유정유정 잘 접힌 반닫이의 행간/ 무정무정 강물소리가 강둑에 차올랐다./ 젖은 걸레 마른 걸레 번갈아 흔적을 문질렀다/ 삐걱삐걱 반닫이 다락방엣 치워지고/ 열쇠 잃어버린 잠글세 우두커니 집어들다(……)”같은 시구들은 요란한 소리들의 카니발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각각 시어들이 지닌 저마다의 의미들과 함께 음운을 겨냥한 조어造語와 부사어의 음소들이 서로 접합하여 이루는 ‘소리의 축제’는 망자를 피안으로 떠나보내는 죽음의 시 공간 속에 오히려 구체적이고도 생기발랄한 삶의 의미를 아로새겨 넣습니다. 마지막 시구들인 “(……)그렇게 서로를 멀리 저어갔다/ 흙, 흙, 봉분 접안/ 서로를 껴안고 부른 돌림노래/ 세상에 없는 악보,”에 이르면, 이 시가 품고 있는 주제 의식이라 할 ‘피안에의 접안’이란 장례의 의미도 갈등과 분열의 차안此岸을 극복하고자 하는 “서로를 껴안고 부른 돌림 노래”로서 귀일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리의 시적 표현에서도, 죽은이를 떠나보내는 시끌벅적한 속세의 모습과 생사에 걸쳐진 복잡한 장례의 정서를 “세상에 없는 악보”의 노래로서 인식하고 표현하려는 시적 의식은 그 자체로도 비범한 것으로서, 단단히 야문 시적 내공이 느껴집니다. 그 시적 내공은 현세적 삶에 대한 반성적 의식의 치열함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삶에 대한 자기 반성적 치열함으로 하여, 전다형 시인의 다른 시 「매미의 허물」과 같이 내 삶의 현재 즉 차안에서의 삶의 허물에 대해 반성적으로 통찰하는 시가 생산되는 것이겠지요.

 

문상객 모여드는 빈소

문밖까지 불, 효 울음줄기 뻗어나간다

 

어디든지 헐헐 날아갈 수 있겠다

겁나라, 내 허물

― 전다형, 「매미의 허물」 전문

 

이 소품의 시에서도 언어의 유희와도 비슷한 언어의 음성성과 음악성이 은근하고도 절묘하게 발휘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죽은 이의 빈소에서 벌어지는 어떤 정경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만, 그 빈소 밖까지 뻗어나가는 상주들의 울음소리를 시인은 “불, 효”라고 묘사합니다. 이 “불, 효”는 의미를 지시하면서도 울음소리 자체를 지시합니다. 그런데 “불, 효”라는 시어는 객관적인 곡소리의 음성적 비유이지만, 그 ‘불, 효’라는 곡소리는 객관적 물리성에 머무는 소리가 아니라, 시적 자아의 주관성에게 반성적으로 들리는 쟁쟁한 내면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어디든지 헐헐 날아갈 수 있겠다/ 겁나라, 내 허물”라는 둘째 연의 시구가 이어집니다. 여기서도 죽음 앞에서 자기 삶을 성찰하는 의식과 함께, “헐헐” “내 허물”이라는 음운론적인 환유가 이어짐으로써 자기 반성적 시 의식이 지시하는 고정된 의미론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 어떤 활달한 시적 생기가 발산되고 확장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임우기∙1985년 「세속적 일상에의 반추」(김원우론)로 비평활동을 시작하여 ≪문학과 사회≫ 창간 편집 동인으로 일했다. 살림의 문학, 그늘에 대하여 등의 평론집을 펴냈다. 현재 솔출판사 대표. 대한민국출판문화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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