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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책크리틱/오홍진/물고기의 언어로 사각지대를 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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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670회 작성일 14-06-0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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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리틱

오홍진

오홍진|물고기의 언어로 사각지대를 읊다-강희안의 시집

 

 

 

강희안은 맛있는 라면 조리법을 시 양식을 통해 실험하고 있다. 그에게는 맛있는 라면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맛있게 라면을 끓이는 방법 또한 중요하다. 요컨대 시인은 ‘방법’이라는 경유지를 통과하여 시의 세계로 들어서려 한다. 시가 곧 방법이라는 인식은 시를 서정의 양식으로 축소시킨 기존의 시 논의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독자들을 이끌고 간다. 네 번째 시집인 물고기 강의실(천년의시작, 2012)에서 강희안은 시적 방법으로 걸러진 세계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시적 방법으로 걸러진 세계는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니라, 언어를 통해 걸러진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강희안 시의 세계는 시안詩眼으로 재구성된 세계라는 점에서, 현실 세계와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맛있는 라면 조리법」에서 그는 맛있는 라면을 끓이는 실제의 방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라면 조리법은 그에게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현실이 기호가 되는 순간을 그는 시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바, 이 때문에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라면이라는 기호가 불러내는 수많은 현상들을 ‘기호 속에서’ 추체험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독자는 언어 속에 존재한다. 시인이 구성해 놓은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독자는 시인처럼 하나의 기호가 되어 시의 세계를 부유한다. 당연히 시인―독자로 구성된 현실 세계는 거기서 배제되어야 한다. 일상의 흔적들을 간직한 채 강희안이 만든 시의 세계로 들어가면 독자는 제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된다.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이해되는 시, 달리 말하면 독자의 마음에 새겨진 기존의 가치관을 저 멀리 제쳐놓고 읽어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시가 강희안의 시인 셈이다.

기호는 의미를 낳지만, 그 의미가 기호를 완전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환유의 놀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지만, 의미는 대상 자체와 만나지 않고 대상이 환기하는 이미지와 만나 의미의 놀이를 벌인다. 의미가 있되 유일한 의미는 없는 역설의 세계는 여기서 비롯되거니와, 기호의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가상공간은 강희안의 이번 시집을 관류하는 핵심 모티브라고 할 수 있겠다. 「○인의 그림자」에서 이러한 가상공간은 ‘○’라는 부정否定의 공간과 접맥됨으로써 시적 맥락을 함유하게 된다. ○에 의미를 붙이는 건,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자유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인의 바깥은 헐거운 자유”라고 말할 때, 그 자유는 시를 쓰는 자가 만든 공간 속에서만 의미를 얻을 수 있다. ○는 “난생의 형상”일 수도 있고, “통통 공의 탄성에 눈” 먼 존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의 의미가 아니라, ○를 기호로 하여 만들어지는 세계이다. 시인은 ○라는 기호를 매개로 수많은 언설들을 내뱉고 있지만, 그 언설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은 ○라는 기호의 완전한 의미가 아니다. “○안에 ㅇ인의 그림자를 포갠, 그는” ○도 아니고 ㅇ도 아니다. 시인은 ○와 ㅇ를 합해 “◎의 凹凸를 넘보다 두발만 길어졌다 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이 또한 ○라는 기호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기호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제목 ‘○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라는 기호의 실제 그림자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림자는 흔적일 따름이다. 애초부터 대상이 없는데 그림자가 있을 리 없다. 아니, 그림자가 대상을 만든다는 전복의 상상력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라는 기호를 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당신이 보는 것이 진짜인가, 라고 시인이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제 꽃에서 떨어진 그에게 긴요한 일은 약간의 상상력과 함께 아주 간단한 두 가지 오류에 빠진 예시를 들어보는 것이다

 

그는 ‘~시각 때문이다’라고 썼다가 ‘~깨진 안경의 시각으로 인해 혼선을 빚었다’라고 말해야 마음이 잡힌다 그가 ‘~어린 아이의 깨진 안경의 시각으로 인한 혼선 때문에 파행을 빚었다’라고 진술할 수밖에 없는 건 ‘~놀이터에 떨어진 어린 아이의 깨진 안경의 시각으로 인해 혼선을 빚은 것은 누군가가 억압한 파행의 결과다’라고 서술해야 옳았다는 타율적인 강박증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므로 시각은~’이라고 단정했다가 ‘그러므로 바람 빠진 타이어의 시각은~’이라고 자기 소외의 막을 투과해야 마음을 잡는다 그가 ‘그러므로 사막에 버려진 바람 빠진 타이어의 시각은~’이라고 무생물 중심의 시각을 덧붙인 건 바로 ‘그러므로 네바다 바다 사막을 부유하는 바람 빠진 타이어의 시각은~’이라는 대리 경험과 시점의 다변화를 꾀한다는 당위를 믿기 때문이다

 

고로 그에게 시급한 일은 시각의 사각지대를 통과하는 과오의 시간에도 꽃은 피고 지는 일을 번복한다는 시선의 발견이다

― 「시각의 덫」 전문

 

강희안은 시각의 덫을 말하고 있다. 근대 문명이 시각의 문명이란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시각의 힘이 대상에 대한 폭력의 근원이라는 점은 다시 한 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시각의 폭력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는 당연히 시각의 주체, 곧 인간이다. 시각의 주체―인간은 대상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시각의 사각지대를 철저하게 배제한다. 사각지대를 인정하면 근대 문명의 주체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함으로써 근대 주체는 온전한 주체로 탄생한다. 시인은 위 시에서 시선의 맥락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 “~시각”은 “~깨진 안경의 시각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어린아이의 깨진 안경의 시각으로” 구체화된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대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의 의미는 달라진다. 시각의 혼선은 따라서 대상을 보는 상황의 다양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깨진 안경을 쓴 아이의 시선일 수도 있고, “사막에 버려진 바람 빠진 타이어”의 무생물적 시각일 수도 있다. 인간―주체의 추상적인 시각만 인정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모든 시각을 ‘사각지대’로 내모는 주체의 논리는 무엇보다 이러한 타자들의 시각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뻗어 나온다.

시인은 “시각의 사각지대를 통과하는 과오의 시간에도 꽃은 피고 지는 일을 반복한다는 시선의 발견”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선언한다. 꽃이 피고 지는 자연 현상은 인간―주체의 시각과는 상관없이 운행된다. 인간의 시선은 미칠 수 없는 곳에서 꽃은 피고, 꽃은 진다. 자연을 향한 인간의 끈질긴 정복 욕망에도 불구하고 꽃은 피고 꽃은 진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인간의 욕망의 이면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자연 현상의 법칙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시각의 바깥에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을 사실로 인정해야만 새로운 시선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새로운 시선의 길은 강희안 식으로 풀어 말하면 “즐거운 오독”(「즐거운 오독」)의 길과 맞물린다. “살면서정이드는집”이라는 광고 카피가 있다. 시인은 이 카피를 “‘살면 서정이 드는 집’으로/ 무심코 독해된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살면서 정이 드는 집’을 ‘살면 서정이 드는 집’으로 읽는 행위 속에는 물론 해석 주체의 욕망이 스며들어 있다. 서정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시인이라면, 살수록 서정이 깃드는 집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주목할 점은 시인이 이러한 독해 행위를 방법의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는 데 있다. “띄어쓰기 바로잡지 마라”는 이 시의 마지막 연에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띄어쓰기’를 즐거운 오독의 원인으로 파악한다. 상상력은 먼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광고 카피 하나를 ‘보는’ 일상적 과정에서도 쉽게 펼쳐질 수 있다. 오독이 즐거운 이유는 누구나 생각하는 일에서 아무나 생각하지 못하는 일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띄어쓰기의 오류라고 하더라도, 서정이 깃든 집은 시인의 입장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집인가.

즐거운 오독의 시적 행위는 “‘행복 한복집’과 ‘행복한 복집’ 사이에 ‘밀양’이 있다”는 시구로 시작하는 「밀양 박쥐」에도 이어진다. 영화 「밀양」과 「박쥐」의 서사를 밑바탕에 깔고 있는 이 시는 현실과 기호 사이를 넘나드는 정치시의 한 양태를 실험적으로 보여준다. “이미지로 남은 인간들이 쥐박이놀이를 즐기”는 밀양의 현실(=이미지)은 “뱀파이어와 신부, 속물과 세속의 신으로 강림한” ‘송강호’라는 기호와 어울려 띄어쓰기가 무시된 혼선의 광장을 만들어낸다. 밀양은 현실의 밀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허구 속의 밀양이기도 하다. 제목 ‘밀양 박쥐’라는 말 자체가 「밀양」이라는 영화와 「박쥐」라는 영화에 출연한 송강호의 기호를 환기한다. 요컨대 시인은 두 편의 영화를 상호텍스트로 연결하면서 기호들의 놀이를 벌인다. 그가 벌이는 기호의 놀이는 그러나 언어의 감옥에 갇힌 폐쇄된 놀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현실 정치의 불모성을 풍자하고, 그 바탕 위에서 언어의 놀이를 감행한다. 밀양은 ‘행복한 복집’과 ‘행복 한복집’ 사이에 있다. 띄어쓰기의 오독을 계기로 이루어지는 기호들의 놀이는 기호들의 ‘사이’에서, ‘밀양’이라는 또 다른 기호를 불러낸다. 따라서 밀양의 의미는 기호와 기호의 ‘사이’에 있다. ‘사이’에서 생성되는 의미는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호들’과 만나 다양한 의미의 향연장을 만들어낸다. 강희안은 이러한 기호들의 향연장을 통해 ‘물고기 강의실’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구축한다.

 

그녀는 물속에 들어가 연신 뻐끔 담배를 피운다

일조량과 산소량이 부족하다고 투덜대며

불쑥불쑥 검은 물 밖으로 뛰쳐나올 태세다

물밑 작업하던 강에는 문명이 시작되기 전인 듯

검푸른 바벨의 언어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녀가 봉긋한 C컵 브래지어를 곧추세우며

잠시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살랑거린다

‘신’의 이름에서 ‘ㅅ’을 슬쩍 빠뜨린 그녀는

저녁놀의 입술에 빨려든 빛의 나이트장에서

날렵한 꼬리지느러미로 부킹을 시도하고 있다

 

저마다의 라벨에 따라 조합된 물의 강의실

거들을 입다가 그만 터져버린 부레가 나뒹군다

힘센 물질로 파랑의 등고선을 그린 대가란

바닥까지 샅샅이 들추어 내는 무리를 자초한 일

그녀는, 뻐끔뻐끔 붉은 혀를 말아올리며

조만간 아벨의 문법에 맞춰 손사래를 치리라

 

한밤 내내 난파된 물결 속을 돌아 나와 보면

꼬부라진 캔과 포크, 물고기의 낡은 비늘이

그녀의 방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담배 연기에 그을은 벽에 신의 권세 대신

바벨을 들어 올린 역사의 이름을 휘날려 써본다

 

아침마다 성경책을 필사하던 그녀의 일과는

팽팽한 브래지어 와이어의 압력에 따라

밑 빠진 음모를 더듬어 보는 일로 바뀌었다

교정 구석구석에는 물의 책을 찢고 나서야

다시 문맹을 알리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 「물고기 강의실」 전문

 

물고기에게 물은 언어이다.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물에서 나오면 물고기는 죽는다. 일조량과 산소량이 부족해도 물고기는 “물의 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그러므로 물 자체가 아니라 물―언어의 속성이다. 시인은 “검푸른 바벨의 언어”가 물밑에 아로새겨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바벨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다. 하나의 언어가 여러 개의 언어로 갈라지는 순간을 의미하는 바벨의 언어는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를 암묵적으로 표현한다. 신의 언어가 사라짐으로써 인간은 공통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하나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여러 개의 언어가 사용되었고, 그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 한 인간의 헛된 욕망을 경고하는 표지로 인식되었다. “‘신’의 이름에서 ‘ㅅ’을 슬쩍 빠뜨린 그녀”의 언어는 “한밤 내내 난파된 물결 속을” 떠다니다 “그녀의 방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담배 연기에 그을린 벽에 신의 권세 대신/ 바벨을 들어 올린 역사의 이름을 휘날려 써” 보는 그녀의 언어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침마다 성경책을 필사하던 그녀의 일과가 지금은 밑 빠진 음모를 더듬어 보는 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은 “물의 책을 찢고 나서야/ 다시 문맹을 알리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한다. ‘신’에서 ‘ㅅ’을 밴 결과가 “역사의 이름”이라면, 인간의 언어는 역사의 이름과 더불어 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 시작되면서 인간의 언어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는 바, 그런 점에서 시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언어를 통해 다시 신의 언어로 다가가려는 무모한 실험일지도 모른다. 강희안은 물고기 강의실에서 인간의 역사 저편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언어를 지금 이곳으로 불러내려 한다. 따라서 그에게 시어詩語는 문명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그 문명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언어와 다르지 않다. 물고기가 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달리 말해 시인이 시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물고기―시인이 문맹의 언어를 껴안는 도리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선장힐책禪杖詰責」을 참조한다면, 그러한 언어의 세계는 기록되지 않은 것을 기록하려는 정신세계와 상당히 닮아 있다. 이러한 선의 언어는 「늑대의 비밀」에서는 “누구보다 현실의식이 강하지만, 때로는 지나친 모험을 탐하다가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하는 나는 우우-한 마리 늑대입니다”에 드러나듯, 인간의 언어와는 이질적인 늑대의 언어로 표현된다. 선장禪杖을 든 선사가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지 않는 제후를 향해 늑대의 언어로 포효한다. “그대를 때리는 것은 지팡이였지만, 지팡이는 원래가 때리는 게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도 크고자 하면 남의 말씀을 섬기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선장힐책」) 쉼 없이 지팡이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언어를 고집하는 독자들에게 시인은 선장을 쥐고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늑대의 언어를 알려면 그것을 섬길 줄도 알아야 한다. 시어도 마찬가지 아닌가. 시의 언어를 알려면 그것을 섬길 줄 알아야 한다. 물고기의 언어로 인간 언어의 사각지대를 탐사하는 시인의 시적 행보는 바로 시어를 섬길 줄 아는 이 정신에서 비롯되고 있는 셈이다.

 

오홍진|물고기의 언어로 사각지대를 읊다-강희안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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