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0호(여름)책크리틱/한명섭/식물적 감수성의 두 향기―송해동, 최향란 시집
페이지 정보

본문
책크리틱
한명섭
식물적 감수성의 두 향기―송해동, 최향란 시집
1.
송해동 시인과 최향란 시인의 시를 한 자리에서 같이 살펴보기로 하고 어떤 공통된 부분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두 시인의 시집을 덮고 나서 바로 해결되었다. 두 시인이 보여주는 식물적 감수성이 바로 그 답이었다.
송해동 시인의 시집은 조련사를 사랑한 악어로 제목에 동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의 시 속에서는 ‘높이 솟은 나무들은/ 쉼 없이 하늘을 우러르지만/ 더 많은 시간을/ 흙과 보낸다.(「나무를 보며」)’,‘꽃은 제가/ 꽃인 줄도 모른 채/ 피었다 진다.(「꽃에 대한 명상」)’와 같이 식물을 향한 관심과 감수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최향란 시인은 꽃이며 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 제목으로 또 소재로 등장하는 시편들을 통해 식물적 감수성이 마치 잎맥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식물적 감수성이라는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시인의 시에서 굳이 공통된 것을 찾아보려고 했을 때 먼저 눈에 띈 것은 ‘북어가 된 여자’와 ‘먹태, 장사 지내다’에서 다루고 있는 명태라는 생선이었다. 물론 북어와 먹태로 다른 사정에 처해있기는 하다. 둘 다 황태는 되지 못했다. 황태였다면 시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내가 밤의 어둠을
끌고 다닐 때
그 여자,
북어를 두드린다.
북어를 두드리며
세상을 두드린다.
단단한 머리와 뻣뻣한 살점의 저항
여자가 두드리는
완강한 세상,
여자를 두드리는
완강한 세상,
북어를 두드리며
가슴을 두드리며
그 여자,
북어가 되어간다.
두 눈까지 바싹 마른,
― 송해동, 「북어가 된 여자」 전문
송해동의 ‘북어가 된 여자’는 세상에 저항하고 싶은 속내를 북어를 두드리며 풀고 있는 여자가 결국 자신이 두드리고 있는 북어와 동일시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최향란의 시 ‘먹태, 장사 지내다’는 황태가 되지 못한 비루한 먹태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담겨있다.
황태가 되지 못한 먹태 한 마리 살짝 두드렸어요
신문지 세 겹으로 깔고 먹태 등줄기는 바다로 향해야 해요
소주병으로 찧기 시작해요. 콩콩콩, 날이 너무 풀려서
색깔 검게 된 먹태의 꿈은 정말 황태였을까요
쿵쿵쿵, 벌려진 입가가 찢어지네요
목숨 걸고 동해로 몰려온
당당한 지느러미는 있기나 했던가요
몸이 두 배로 부풀어 오르고
머리와 뼈 발라 살들만 가지런히 늘어놓고 보니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죽음, 사람의 생도
누군가의 뜨거운 한 사발 국이 될 수 있을까요
홀랑 벗은 인생
은빛 비늘을 흔들고 있어요
― 최향란, 「먹태, 장사를 지내다」 전문
공통의 소재를 한 두 시를 통해서 두 시인의 시세계가 변별되는 지점이 드러난다. 최향란 시인이 여성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공감과 연민으로 시적 대상에 접근하고 있다면 송해동 시인의 시는 대상에 대한 공감보다는 대상이 처한 상황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주로 보여주고 있다.
두 시인의 목소리는 사뭇 다르다. 송해동 시인이 단단한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건네고 있다면 최향란 시인은 고운 결로 아름다운 그림을 섬세하게 그려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두 시인은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바탕으로 믿음 가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악다구니 쓰지 않고 차분히 건네는 두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시집 2부의 제목과 동명인 시 「눈물의 힘」을 통해 송해동 시인의 시적 지향이 가 닿은 지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울어라 사람아
눈물은
사람을 슬프게 하고
슬픔을 알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묶어
슬픔을 나누게 하고
삶의 얼룩을
조금씩 지워갈 것이니
― 송해동, 「눈물의 힘」 전문
공감 속에서 나오는 눈물을 통해 타인의 슬픔을 알게 하고 그 슬픔으로 사람의 마음을 묶고 슬픔을 나누게 되며 삶의 얼룩마저 지워갈 수 있다는 시는 시인이 세상을 향해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제언처럼 읽힌다.
시 「북어가 된 여자」도 남편을 위한 해장국을 준비하며 단단한 북어를 두드리던 여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세상에 저항하고 싶은 속내를 북어를 두드리며 풀고 있는 여자가 결국 자신이 두드리고 있는 북어와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냉철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나는 시간을 잇는 문/ 생존의 증거가 되어/ 아득히 유전할 것이다’(「유전」)‘애써 내일을 계획해 본다’(「겨울비」),‘끝내는/ 다시 만나지는 것’(「인연」)와 같은 시행에서 볼 수 있듯이 미래를 향한 끝없는 기대를 남겨두고 있다.
시인은 ‘신께서 지구를 둥글게 만든 것은/ 누구든 세상의 주변이 된다는 뜻/ 주변이 중심을 다잡아 주라는 뜻’(「지구가 둥근 이유」)이라며 자기중심의 사고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집 전반에 걸쳐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시선을 숨기지 않고 있다. ‘손수레를 쟁기처럼 끌고서/ 늙은 소처럼 걸어간다.’(「어느 노인의 밤」)에서 노인들에게, ‘동남아에서 온 듯한/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인이 내미는/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부끄러움을 쓰다」)에서는 결혼이주여성이거나 외국인 노동자일 법한 여성에게 시선을 보내며 우리의 눈물이 같이 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있다. 그 관심은 ‘그대 곁에서만 의미가 되는/ 세상을 그대에게 가져다주는/ 그대 위해 고요히 속삭이는// 투명한 소리였으면 좋겠네.’(「어떤 사랑」)와 같이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힘이 되는 모습일 것으로 짐작된다.
3부 ‘어떤 사랑’에서는 단연 ‘사랑에 빠진 악어’가 시선을 끈다. 시집의 제목인 ‘조련사를 사랑한 악어’와 관련해서 읽히기 때문이다.
입을 다문다면,
식도를 넘어오는 팔이
나의 식욕을 자극할 때
입 안에서 미소 짓는 얼굴이
나의 야성을 일깨울 때
내가 세상과의
결별을 결심한다면,
하지만
나는 사랑에 빠진
악어
우리가 처음으로 마주하던 날
나를 쓰다듬는 경직된 손끝에서
나를 바라보는 떨리는 눈망울에서
너의 두려움을 읽었지.
나보다 더 큰 절망을 느꼈지.
너는 날마다
탈출을 꿈꾸며
1000원, 1달러를 외치지.
유리벽 너머에는,
내가 갈 수 없는 곳
네가 갈 수 없는 곳
우리가 가슴으로만 갈 수 있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
나를 믿어가는 너를 위하여
너의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지, 나는
동상처럼 굳어 있어야지
이빨을 드러내며
포악한 악어가 되어야지
네 서러운 꿈을 위한
쇼를 진행해야지.
― 송해동, 「사랑에 빠진 악어」 전문
‘악어’가 시적화자가 되는 상황을 통해 시인이 품고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객관적이어서 더 절절하게 표현되고 있다. 삶이라는 무대가 서러운 꿈을 위한 쇼라고 보는 악어의 시선에서 인간의 삶이 주는 힘겨운 무게가 더욱 서글프게 다가온다. 아마도 시인은 악어쇼를 관람하는 관람석의 한켠에서 악어의 눈빛을 응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박수치며 환호하고 좋아하는 악어쇼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악어를 조련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기실 조련사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악어의 연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 가 닿았을 순간 시인의 마음은 끝없이 처연하였을 것이다.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난 지경에 가 닿은 시인의 깊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3.
최향란 시인의 시집은 식물적 감수성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파꽃, 뱀딸기꽃, 배롱나무, 물풀나무, 자운영, 문주란, 연잎, 벚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물부터 심지어 곰팡이꽃까지 등장시킨다. ‘배롱나무’는 세 차례에 걸쳐 등장한다.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피운 생 아름다이 털어낼 줄 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오’(「울울창창 열리는 문이 있다」), ‘유리창 너머로 기우뚱 바라보시는 늙은 배롱나무’(「늙은 배롱나무」)에 등장하고, ‘배롱나무’를 제목으로 해서는 다음과 같은 시를 선보인다.
잘 늙은 배롱나무 손바닥으로 만지니 좋아요
여름날 피웠던 빛깔 더 이상 붉지 않아
향기는 가고 마른 꽃잎 흔적만 남았어요
수고했다 오래오래 칭찬하고 어루만지니
잎마저 멀리 보내려는 곧은 생
때로는 숙연히 바라볼줄 알아야 하네
남은 손으로 가슴 쓰다듬어요 치료가 필요한 나의 병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아요
나무의 마음에도 길이 있어
아각 같던 이파리 마침내 그 길 따라 보내고 있네요
내게도 누가 수고했다며
햇살처럼 따듯한 손바닥 내어주면 좋겠어요
― 최향란, 「배롱나무」 전문
배롱나무는 한자어로는 자미화紫薇化라 하며, 개화기가 길어서 백일홍이라고도 하며 백일홍은 국화과 식물에도 있으므로 구별하기 위하여 목백일홍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7월에서 9월 사이에 피는 꽃인데, 시에서는 개화기의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고 꽃이 떨어진 이후의 나무를 언급하고 있다. 최향란의 시는 특히 자연과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어 시를 읽는 중간 중간 지명이나 꽃이름, 나무 이름에 대해 찾아보게 만든다. 찾아볼수록 그 특성과 시적 정서가 절묘하게 맞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솔사에 일주문이 없다는 거 알고 바깥으로 향하는 둥근 문을 생각했소 삼나무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는 향기의 길을 더듬어 그 문을 연다오
천도제를 올리는 사람은 눈 먼 물고기처럼 멈춘 시간 속에서 웅크리고 나는 뿌리가 들려진 어린 삼나무였기에 부처가 내준 자리 빌려 지친 영혼 잠시 쉬고 있을 뿐이오 우리는 위로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만나는 사람들이잖소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피운 생 아름다이 털어낼 줄 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오 부처꽃이란 또 하나 이름으로 그늘조차 붉게 누운 날을 본적 있다오 꽉 쥐었던 주먹 펼쳐서 얼키설키 복잡한 손바닥 길 간적 있다오
뿌리를 올곧게 내리려면 상처 몇 개는 아무렇지 않은 듯 건너야 하는 거라오 내 주먹 안 깊숙이 묻혀있던 주름 잡힌 생, 두드리지 않아도 울울창창 열리는 문 있어 투명한 인사로 깨어나 맘껏 들어오는 한 세상을 꿈꾸기도 한다오
― 최향란, 「울울창창 열리는 문이 있다」 전문
절까지 이르는 500m의 숲길이 일주문을 대신하는 사천 봉명산 다솔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용운 선생이 독립선언문 초안을 작성했고, 김동리 선생이 등신불을 쓴 곳이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적멸보궁이 있는 사찰이다. 일주문에는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일주문이 없는 다솔사를 나서려는 시적 화자는 ‘향기의 길을 더듬어 문’을 연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 속에 더 많은 진리와 아름다움이 있다. 주먹 속 손금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왔던 과거에 더 이상 붙들려 있지 않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길의 시작에서 울울창창 열리는 푸르고 싱싱한 기운을 받고 있는 시적 화자를 만날 수 있다. 시인은 ‘손금은 손바닥 안에 철저히 가려두었다’(「모과」)라며 운명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시를 읽으며 시 속의 ‘나’에게 ‘파이팅’이라고 외치며 힘을 더해 주고 싶었다. 지친 영혼을 보듬고 있는 이 시는 ‘우리는 우리가 위로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만난다고 사람’들이라는 부분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슬픔의 극복에 머물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까지도 그 위로가 전하자는 적극적인 시인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용주리에 기대기」, 「옛날 국밥집에서」, 「옥녀를 위한 노래」 등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뛰어난 서사성도 최향란 시인의 시를 만나는 기쁨 중의 하나이다. 그와 함께 다음 시편의 마지막 연에서 보여주는 시행은 일반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오늘은 눈이 멀어 심장소리 콩닥콩닥 듣고 싶은 날이야
정말로 싸울 생각은 아니에요
그냥 싸움이란 두 글자 써 놓고 노려보고만 있을 뿐
공평하단 말을 좋아하고 객관적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나는 정말 객관적이란 말의 안쪽에 자리 잡은
모두를 사랑한다든지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든지
매일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들은
뻔뻔한 가면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누구의 발길질도 예상하지 못한
글쎄 아직 벙글지 못한 목련인데
내 앞에 툭하니 떨어져 부끄러워하는 그 꽃
한참을 두고 본 하루
객관적이란 말의 안쪽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싶네요
내가 길에서 누구와 싸우는 걸 우연히 보신다면
당신은 잠시 순간 눈멀어 객관적이지 말아요
그저 내 편이 있는 어스름한 봄밤을 꿈꾸는 시간이에요
― 최향란, 「오늘은 눈이 멀어」 전문
‘당신은 잠시 순간 눈멀어 객관적이지 말아요/ 그저 내 편이 있는 어스름한 봄밤을 꿈꾸는 시간이에요’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시행으로 변형시켜 놓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가는 봄날」과 같은 시 편에서는 ‘꽃이 진다고 나무가 죽은 건 아니겠지요/ 더 크고 곧은 나무가 되는 거지요’와 같은 시행으로 역사와 사회현실에 대한 시선도 동시에 보여준다. 최향란 시인은 다양한 관심의 스펙트럼 속에서 생생하게 숨쉬는 우리의 언어와 자연을 담은 서정성 짙은 시행을 보여주고 있어 즐거운 독서를 선사한다.
한명섭∙소설가, 2009년 계간『서시』로 등단, 현재 가천대, 동덕여대 강사.
- 이전글50호(여름)책크리틱/신주철/상처의 응시와 다른 세계의 시작-김주대의 시집 14.06.06
- 다음글50호(여름)책크리틱/오홍진/물고기의 언어로 사각지대를 읊다 14.06.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