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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특집/하상일|산문화된 일상 언어와 현대시의 방향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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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2
하상일|산문화된 일상 언어와 현대시의 방향에 대한 성찰
할머니의 묘지명墓志銘
여기 펑샹쯔彭相治가 영원히 잠들어 있다.
그녀는 당신들이 알 리 없는 산띵山頂이란 곳에서 태어나,
당신들이 알 리 없는 안텐晏田으로 시집갔다.
남편은 그녀와 혼례를 올리자마자 그녀를 버리고,
당신들이 너무나 잘 아는 난양南洋으로 떠났다.
50년대 그녀가 홍콩까지 갔었지만,
난양에는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편의 집에 이미 자식들이 그득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입양한 아들 둘이 있었다.
첫째는 황딩푸黃定福, 둘째는 황딩바오黃定寶,
맏며느리는 두슈잉杜秀英, 둘째며느리는 라이수쩐賴淑珍,
슈잉秀英은 황쉐렌黃雪蓮과 황쉐샤黃雪霞 두 딸과,
아들 황찬란黃燦然, 그리고 막내딸 황만샤黃滿霞를 낳았고,
수쩐淑珍은 황리화黃麗華과 황샹화黃香華 두 딸과,
아들 황썽리黃勝利, 그리고 막내딸 황만화黃滿華를 낳았다.
70년대, 그녀는 자손들을
잇달아 홍콩으로 불러들여 한자리에서 모여 살게 했고,
90년대, 홀로 안텐으로 돌아가 일생을 마감했다.
자손들은 그녀를 위해 엄숙히 법회法會를 열었고,
2000년에 그녀의 유골을 이곳으로 이장해 왔다.
보시다시피, 이토록 아름다운
췐조우泉州 황지산黃迹山 화교묘원.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시여,
이곳을 지나는 길이라면,
발걸음을 멈추고,
그분의 이름에 주의를 기울여 주오.
만약 좀 더 흥미가 솟는다면
그녀의 소박했던 생애도 읽어 봐 주오.
그분을 위해 탄식해 주오.
그녀의 일생은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으므로.
「할머니의 묘지명墓志銘」은 이른바 1960년 이후 태어난 세대를 일컫는 ‘류링호우六零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황찬란黃燦然의 시이다. 그는 21세기 중국 현대시의 흐름과 방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시는 소박하면서도 꾸밈없는 풍격을 지녔”고, 시에 있어서 기교적인 현란함을 모두 폐기함으로써 “평범함 속의 신기함과 고요 속의 열정”을 지녔다고 평가된다.(링위에, 파미르의 밤, 34쪽에서 재인용) 「할머니의 묘지명墓志銘」은 평범한 집안의 한 여성으로 태어나 가부장적 남성의 굴레 속에서 신산한 삶의 여정을 지나 어느 작은 시골 마을 공원묘지에 묻힌 시인의 친할머니에 대한 서사적 기록을 담담하게 서술한 작품이다. 어떤 시적 기교나 장식 없이 할머니의 가계家系와 살아생전 고단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마음의 풍경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서술하고 후반부에 가서 독자들에게 이러한 할머니의 소박했던 삶을 주의 깊게 봐달라는 당부를 덧붙이고 있을 뿐이다.
베이징대학 중문과 홍즈청洪子城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1990년대 이후 중국 현대시는 일상생활의 경험을 중시하고 구어나 속어를 대량으로 사용하며 서사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감정 표현 방식의 보편화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변화와 혁신은 무엇보다도 1990년대 이후 급격히 변화된 중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비롯된 복잡한 현실생활의 경험을 최대한 담아내기 위한 것으로, 시적 표현의 영역을 더욱 확대하려는 의도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황찬란黃燦然의 시는 바로 이러한 중국 현대시의 변화와 흐름을 온전히 반영하는 일상적 현실의 리얼리티를 구현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일생은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으므로”에서 알 수 있듯이, 거대 역사의 중심에서 시적 사유를 펼치기보다는 주변부적 삶의 일상 한 가운데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일관된 자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변부적 삶의 역사가 모여 거대 역사의 흐름을 형성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재인식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역사의 보편성 앞에서 무참히 잊혀져가는 민중들의 역사적 구체성을 회복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할머니의 묘지명墓志銘」에서 할머니 ‘펑샹쯔彭相治’는 거대 역사가 굳이 기록하지도 않을 주변부 중의 주변부적 인물에 불과하다. 어쩌면 시인의 할머니가 되지 못했다면 시의 주인공으로조차 호출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평범한 일상 속의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할머니의 삶을 기억의 방식으로 재현해냄으로써 21세기 중국 역사의 숨은 궤적을 발견해내고자 한다. 그에게 할머니의 삶, 즉 남편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으면서도 홀로 입양한 자식들을 키우고 그 자손들을 보살펴온 지독한 삶의 여정은 결코 중국의 거대 역사가 부정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될 작은 역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시여,/이곳을 지나는 길이라면,/발걸음을 멈추고,/그분의 이름에 주의를 기울여 주오.”라고 말한다. 지금 중국이라는 거대 국가의 행복한 성장은 모두 이러한 작은 역사의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일구어낸 것이란 점을 더욱 명확히 각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중국의 역사가 성취한 행복은 “그녀의 일생은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는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주변부적 일상을 응시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통찰하려는 그의 시선은 시의 언어나 구조에 있어서도 특별한 장치를 요구하지 않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산문화된 일상 언어로 감칠맛 나게 삶에 대한 깨달음을 토로”(예후이, 파미르의 밤, 34쪽에서 재인용)하는 그의 시는, 시의 제재와 시의 형식이 자연스럽게 교감을 이루는 의미의 소통을 지향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산문화된 일상 언어는 굳이 시라는 형식으로 불리지 않더라도 주변부를 살아가는 일상적 독자들의 마음속으로 온전히 다가가는 공감의 장치가 된다. 현란한 시의 언어나 구조를 의도적으로 배격함으로써 말 그대로 일상의 언어와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시에서 특징적인 장치로 기능하는 역설의 형식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중국 현대시, 즉 중국에서 통용되는 용어대로라면 신세기新世紀의 대표적 시인인 황찬란의 작품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시의 현대성을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말하면서도 구체적 삶의 역사는 찾아볼 수 없고, 정치를 말하면서도 현실 정치의 고통과 상처를 읽어내기 어렵고, 공동체를 말하면서도 그 언어와 형식은 철저하게 개인화된 지금 우리 한국시의 자기모순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에서 생활의 구체성이 사라진지 오래고 철학과 역사라는 담론에 기댄 언어구조물이 시가 확장해서 나아가야 할 현실의 장을 대신하고 있는 상황을 냉정하게 살펴볼 때, 한 시대를 살아온 이름 없는 중국 여성의 삶을 기록한 「할머니의 묘지명墓志銘」은 평범함 속에서 빛나는 비범함의 울림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그분의 이름에 주의를 기울여 주”고 “그분을 위해 탄식해 주오”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러한 요구는 그분(전통 혹은 과거)을 통해 지금의 중국을 넘어서는 미래지향적 현대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는 전언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그의 시 대부분이 할머니로 대변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상당히 많은 정서를 의탁하고 있는 것은, 1930년대 한국의 백석 시가 그러했듯이 전통과 근대의 접점에서 시의 현대적 의미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황찬란의 시를 읽으면서 전혀 영향관계가 없음에도 백석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소 억지스러운 연결임을 무릅쓴다면, 황찬란의 시는 일상의 세세한 사물과 풍경 그리고 사람들을 어떤 꾸밈도 없이 그대로 포착해내고 그것을 나열하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백석의 시작 태도와 상당히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우연의 일치는 황찬란의 시가 지금 중국의 현대시에 대한 첨예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결의 방향이 생경한 언어나 구조를 통한 실험적이고 해체적인 환상성이 아닌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세계의 현대적 성찰이라는 방향에서 찾으려 한다는 데서 비롯된 결과일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지금 우리 모두는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러한 행복에 도취되어 지나온 삶의 “소박했던 생애”를 점점 더 놓쳐버리거나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이와 같은 현대인의 삶에 “주의”와 “탄식”의 감각을 요구한다. 그것도 지금의 행복한 삶에 대한 감각의 재구성이 아닌 지나간 세월의 소박했던 삶에 대한 감각을 다시 호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호출이 단순히 과거의 관념에 기대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 시인 자신의 과거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할머니의 삶이라는 구체성에 기대어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한국의 현대시는 ‘뒤를 돌아보는 근대’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었다. 자본과 문명의 홍수 속에서 방향성을 잃고 떠도는 근대의 표상이 앞이 아닌 뒤를 돌아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균형 잡힌 근대의 목소리를 재현해낼 수 있다는 역설적 전언이었다. 특히 이러한 세계관은 낡고 오래된 것에서 먼 미래의 표상을 읽어내는 서정시의 본질에 깊이 맞닿아 있었다. ‘오래된 미래’라는 모순어법 속에서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진정한 근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 현대시는 과거와 전통을 낡고 오래된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이다. 소통을 전제로 한 시의 생산은 공동체의 장을 잃어버리고 개인의 책상 위에서 혹은 컴퓨터 앞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내는 지식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생활과 현실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공적이고 가공적인 언어의 세계만이 의미를 잃어버린 기호로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의 묘지명墓志銘」을 읽으면서 지금 한국 현대시가 잃어버린 시의 언어를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착잡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의 어구를 빌려 말한다면, 아직까지 우리의 삶도 온전히 행복했던 적이 없으므로 여전히 시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행복과 성찰의 마음을 심어주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시는 공동체를 떠나 전점 더 개인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굳이 중국의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잠시 중국 현대시의 방향에서 우리 시의 현재를 바라보는 지혜를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상일∙1970년 부산 출생. 문학평론가, 동의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저서로 1960년대 현실주의 문학비평과 매체의 비평전략, 재일 디아스포라 시문학의 역사적 이해, 서정의 미래와 비평의 윤리, 리얼리즘‘들’의 혼란을 넘어서 등이 있다. 고석규비평문학상, 애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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