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1호(가을)특집/우석균|난시 모레혼의 「흑인 여성」
페이지 정보

본문
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2
우석균|난시 모레혼의 「흑인 여성」
흑인여성
아직 물거품 내음이 난다, 그들 때문에 건너야 했던 바다의.
그날 밤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바다조차 그날 밤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내가 본 첫 번째 가마우지만은 잊을 수 없다.
구름은 높았지, 마치 천진난만한 목격자처럼.
잃어버린 고향의 바닷가도 조상의 언어도 내 어찌 잊으리오.
하지만 나는 이곳에 팽개쳐졌고, 이곳에서 살아왔다.
개돼지처럼 일한 덕분에, 이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얼마나 많은 만딩고 서사시에 의지하고자 했던가.
나는 저항했다.
주인이 어느 광장에서 나를 샀다.
나는 주인의 연미복을 수놓고, 주인의 사내아이도 낳았다.
내 아들은 이름조차 없었다.
그리고 주인은 영국 귀족의 손에 죽었다.
나는 길을 떠났다.
이곳은 내가 땅바닥에 엎드려 채찍질 당한 땅이다.
나는 이 땅의 모든 강에서 노를 저었다.
이 땅의 태양 아래에서 뿌리고 거두었지만, 내 입에 넣을 것은 없었다.
노예막사가 내 집이었다.
직접 돌을 날라 막사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이 땅의 새들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나는 들고 일어났다.
이 땅에서 나는 흥건한 피와 썩은 뼈를 만졌다.
끌려온 사람이든 아니든,
이 땅의 사람들의.
나는 기니로 가는 길을 결코 다시 상상하지 않았다.
기니였던가?
아니면 베냉이나 마다가스카르, 혹은 카보베르데?
나는 더 많이 일했다.
나만의 천 년의 노래와 희망의 토대를 쌓았다.
이 땅에서 내 세계를 건설했다.
나는 산으로 갔다.
내 진정한 독립은 도망노예 부락이었고,
말을 타고 마세오 장군 부대와 함께 했다.
겨우 1세기 후,
나는 후손들과 함께
푸르른 산에서 내려왔다.
나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내려왔다.
자본과 고리대금업자,
장군과 부르주아를 끝장내려고.
이제 내가 존재한다. 오늘 비로소 우리는 소유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우리 것이다, 대지가.
우리 것이다, 바다와 하늘이.
우리 것이다, 마법과 키메라가.
나와 동등한 사람들, 나는 그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있다.
공산주의를 위해 우리가 심어 놓은 나무 둘레에서.
그 풍성한 나무에서 벌써 소리가 울려 퍼지네.
2012년 여름의 쿠바는 무덥고 습했다. 아바나 시민들은 밤마다 말레콘을 점령하고 있었다. 말레콘은 ‘방파제’라는 뜻이고, 아바나 해변에는 방파제를 따라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있어서 말레콘은 아바나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발굴한 음악인 라이 쿠더가 동명의 영화 첫 장면에서 코코 택시를 타고 달리던 길이 바로 말레콘이다. 방파제를 넘어 달리는 그 차까지 들이치는 파도가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그 장면을 본 이들은 으레 일상에서의 탈출 혹은 자유를 꿈꾼다. 쿠바가, 아바나가, 말레콘이 주는 그 환상은 쿠바를 찾는 많은 이로 하여금 말레콘을 거닐게 만들고, 타인에게 친밀하게 다가갈 줄 아는 쿠바인들에게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말레콘에 그렇게 사람이 북적이는 이유가 그 무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집에 있는 것은 너무 큰 고통이고, 그렇다고 딱히 갈 만한 곳도 돈도 없어서라는 사실을. 또 그들의 친절함의 일단은 밤마다 할 일 없이 말레콘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에 따른 무료함 때문이라는 것을.
사실 오늘날 쿠바 국민의 불만은 크다. 의식주 문제는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고, 번듯한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고, 해외여행 제한 등 규제도 많고, 때로는 감시의 눈초리마저 느끼며 살아야 한다. 혁명정부가 약속한 지상낙원의 꿈은 사라진 지 오래라, 대다수는 그날그날을 근근이 버티고, 쿠바 탈출을 감행하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장 큰 희망을 준 사건인 쿠바혁명은 오래 전에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그렇다면 어째서 쿠바 체제는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미국 같은 슈퍼파워가 쿠바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이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여왔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그래서 쿠바혁명을 완전한 실패로 규정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짧은 지면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없고, 다만 쿠바 혁명 이전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 살아 있는 한 쿠바 체제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만큼 혁명 이전의 삶을 끔찍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흑인 여성」을 쓴 난시 모레혼Nancy Morejón(1944~)이 여전히 열렬한 혁명정부 지지자로 남게 된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난시 모레혼은 2006년에 스투루가 상을 받았다. 쿠바혁명이 없었다면 시 분야의 노벨문학상에 비유되는 이 상을 과연 그녀가 받을 수 있었을까? 1880년에야 뒤늦게 노예제가 폐지된 나라, 소위 노예사회였던 쿠바는 스페인어권 카리브 섬들 중에서 가장 인종차별적인 나라로 꼽혔다. 그리고 쿠바혁명의 가장 큰 성과는 인종차별을 그야말로 획기적으로 일소했다는 점이다. 쿠바의 흑인들은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인종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대표적인 국가로 꼽히는 브라질도 뛰어넘은 수준의 평등을 누리게 되었다. 물론 쿠바혁명이 없었다 해도 모레혼은 결국 작가가 되고 뛰어난 시인으로 예찬 받게 되었을 수도 있다. 아바나의 로스시티오스Los Sitios라는 서민 동네에서 태어났다지만,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은 어머니 덕분에 그럭저럭 미래를 꿈꿀 수 있을 정도는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레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1920년대에는 흑인시 개척에 선구자 역할을 한 니콜라스 기옌Nicolás Guillén(1902~1989)이 있었고, 1940년대에는 페르난도 오르티스Fernando Ortiz(1881~1969) 등을 중심으로 흑인 문화 재평가가 이루었다지만 흑인이 작가가 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흑인 여성의 경우는 더 어려웠다. 실제로 모레혼은 제1세대 흑인 여성시인이다. 계급, 인종, 젠더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소수자였던 흑인 여성들은 쿠바혁명 후인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모레혼 등을 통해 겨우 그들의 존재를 가시화되고,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모레혼의 시 중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흑인 여성」은 1975년 쓴 시로 한 시대의 장소들(Parajes de una época, 1979)이라는 시집에 수록되었다. 대서양 횡단, 노예생활, 도망노예 생활, 19세기 말의 독립전쟁, 쿠바혁명 등의 사건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시적 화자는 중간 중간 선언한다. “나는 저항했다”, “나는 길을 떠났다”, “나는 들고 일어났다”, “나는 더 많이 일했다”, “나는 산으로 갔다”, “나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내려왔다”고 말이다. ‘나’라는 시적 화자는 물론 흑인 여성 전체이고, 이런 선언을 통해 시적 화자는 흑인 여성이 항상 역사의 중심에 서서 주체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독립전쟁과 쿠바혁명 같은 쿠바 역사의 분수령에 이르기 전에 흑인 여성은 이미 노예가 아니라 자유를 찾아 탈출한 도망노예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리고 독립전쟁에 우발적으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결정으로 마세오 장군 부대에 합류한다. 크리오요(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주도의 독립전쟁에서 예외적으로 물라토로서 독립의 영웅인 된 마세오와 함께 흑인 여성 역시 역사의 주인이 되려는 노력을 같이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쿠바혁명과 흑인 여성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은 혁명의 성지이다.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으로 추방된 카스트로를 비롯한 82인이 혁명을 일으키고자 멕시코에서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 해안에 상륙했지만, 정보 누설로 기습을 당하면서 겨우 12인이 시에라마에스트로 도망쳐 혁명의 횃불을 든 것이 쿠바혁명의 시작이었다. 따라서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혁명의 성공을 뜻한다. 그런데 모레혼은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 12인의 혁명가만 산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흑인 여성들도 같이 내려왔다고 노래한다. 이는 1880년 노예제 폐지 이전 도망노예들이 주로 깊은 산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살았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고, 이들이 깊은 산으로 숨어든 것이나 12인의 혁명가들이 시에라마에스트라로 숨어든 것이나 자유를 위한 갈망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점을 주장한 것이고, 이런 갈망이 혁명 성공의 밑거름이었다는 일종의 민중사관을 피력한 것이다.
「흑인 여성」의 독특한 점은 ‘나’와 아프리카와의 관계 설정이다. 화자는 “나는 기니로 가는 길을 결코 다시 상상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아프리카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향이 기니인지 혹은 베냉이나 마다가스카르, 아니면 카보베르데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렇다고 아프리카 뿌리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땅의 새들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라고 이야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모레혼은 아프리카 어디에서 왔든지 간에 흑인들에게도 수백 년 세월 동안 이미 쿠바가 고향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러한 사유는 오르티스의 문화횡단transculturación론에서 비롯되었다. 문화횡단론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문화 이론 중 하나로 오르티스가 그의 대표적 저서인 담배와 설탕의 대위법(Contrapunteo cubano del tabaco y del azúcar, 1940)에서 정립한 이론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1차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면서 최초로 담배를 유럽에 소개했으며, 2차 항해 때는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신대륙에 전해주었다. 그런데 사탕수수 재배는 주로 흑인 노예에 의해, 담배 재배는 주로 카나리아 제도에서 이주한 스페인인과 그 후손인 크리오요에 의해 이루어졌다. 농작물도 사람도 바다를 건너면서(‘trans-’) 쿠바만의 삶의 방식과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오르티스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백인들만 쿠바의 주인이 아니다. 흑인들도, 또 혼혈의 산물인 물라토도 모두 쿠바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인종차별 등의 이유로 혹은 뿌리가 아프리카라는 이유로 아프리카만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것은 쿠바의 주인이라는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다. 물론 흑인들에게 주인이 되는 길은 험난했다. “개돼지처럼 일한 덕분에” 겨우 “이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주인이 될 그날을 위해 “나만의 천년의 노래와 희망의 토대를” 쌓는 일이 필요했고, 드디어 “이 땅에서 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었다. 모레혼에게 쿠바혁명은 그 기나긴 과정 끝에 맞이한 정점의 순간이다. 찬란한 그날을 맞이하여 모레혼은 감격에 겨워 힘주어 “우리 것이다”라고 되풀이한다. 흑인들도 그리고 흑인 여성들도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 대지, 바다, 하늘 등을 온전히 소유한 주인임을 선언한 것이다.
우석균∙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페루 가톨릭 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스페인의 마드리드 콜플루텐세 대학교에서 중남미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라틴아메리카를 찾아서』,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 인카 in 안데스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마술적 사실주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있다. 이 밖에도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의 현대 문학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 이전글51호(가을)특집/고인환|조국을 위한 “기도” 혹은 “마지막 인사” 14.08.08
- 다음글51호(가을)특집/하상일|산문화된 일상 언어와 현대시의 방향에 대한 성찰 14.08.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