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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특집/고인환|조국을 위한 “기도” 혹은 “마지막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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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2
고인환|조국을 위한 “기도” 혹은 “마지막 인사”
마지막 인사
잘 있거라, 흠모하는 조국이여, 사랑하는 태양이 있는 땅,
동방 바다의 진주, 잃어버린 낙원!
너에게 기꺼이, 서글프게 시들어가는 내 삶을 바치노라.
더 빛나고, 더 싱싱하고, 더 활짝 핀 삶이었다 해도
너에게, 너를 위해 바치리라.
다들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망설임도 회한도 없이 목숨을 바치는데,
사이프러스나 월계수나 백합 있는 곳이든,
교수대나 공개 처형지, 전쟁터나 잔인한 고문실이든,
조국과 고향의 요청이라면 어느 곳인들 마다할까.
날이 밝으면 최후를 맞이할 텐데,
어두운 두건 뒤에서 마침내 새날을 알리네.
조국이여, 그 여명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면
기꺼이 내 피를 뿌려라.
아침 햇살에 내 피도 황금빛으로 물들게.
청년기 문턱에 꾸던 꿈도
한창인 지금의 꿈도
동방 바다의 진주, 네 꿋꿋한 검은 눈동자와
구김살 없는 얼굴을 언젠가 보는 것이었지.
찡그림도 구김살도 눈물자국도 없는.
내 인생의 염원, 생생하게 타오르는 열망이여,
곧 떠나갈 넋이 네가 외친다, 건배!
네 비상을 향한 나의 추락, 네 삶을 위한 나의 죽음,
네 하늘 아래서의 죽음, 네 매혹적인 대지에서의 영면.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건배!
먼 훗날 잡초 무성한 내 무덤 위에
수수한 꽃 한 송이 피었거든
내 넋에 입맞추어다오.
그 차가운 무덤 속에서도
네 다정한 입술과 따스한 숨결을 얼굴에 느끼도록,
은은하고 부드러운 달빛을,
여명의 순간적인 빛을,
바람의 나지막한 웅얼거림을 허락해다오.
내 무덤 십자가에 새가 내려앉아
평화의 노래를 지저귀게 해다오.
작열하는 태양에 증발된 빗물이, 순화된 그대로,
내 절규를 이끌고 하늘로 돌아가게 해다오.
내 이른 죽음을 친구가 슬퍼하게,
평화로운 오후면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게 해다오.
그리고 조국이여, 너도 기도해다오. 내 명복을 빌며!
불행하게 스러져간 모든 이,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을 겪은 모든 이,
사무치는 한에 목 놓아 우는 우리의 가련한 어머니들,
고아와 미망인, 고문당하는 죄수들을 위해 기도해다오.
네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다오.
묘지가 어둠에 싸일 때,
죽은 자들만 남아 밤을 지새울 때,
그들의 안식과 신비로움을 깨뜨리지 말아다오.
사랑하는 조국이여, 시타라나 살테리오가 울리면
바로 나일세, 내가 너에게 노래하는 것일세.
내 무덤이 아예 잊혀져
십자가도 비석도 남지 않거든
누군가 곡괭이로 갈아엎어다오.
내 재가 완전히 무無로 돌아가기 전에
너를 위한 양탄자가 될 테니.
그렇게만 되면 사람들에게 잊힌들 무슨 상관이랴.
조국의 대기와 공간과 계곡을 가로지를 텐데,
네 귀에 울리는 낭랑한 소리가 될 텐데,
향기와 빛과 색채와 소문과 나지막한 노래가 되어
내 신념을 영원히 되풀이 말할 텐데.
숭배하는 조국, 고통 중의 고통,
사랑하는 필리핀이여, 내 마지막 인사를 들어다오.
너에게 모두 맡기네, 내 부모님, 내 사랑하는 이들을.
나는 가네, 노예도 사형집행인도 억압자도 없는 곳으로.
신념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는 곳으로, 신이 다스리는 곳으로.
안녕, 부모 형제여, 내 영혼의 한 부분들이여,
빼앗긴 고향의 어릴 적 친구들이여.
이제 고단한 삶을 벗어던지는 나 대신 감사를 드려다오.
안녕, 달콤한 외국인, 내 여인, 내 기쁨!
안녕, 사랑하는 사람들. 죽음은 안식이리니.
필리핀은 16세기 초 마젤란에 의해 유럽에 알려진 이래 19세기 말까지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1898년 필리핀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필리핀을 미국에게 양도한다. 이후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된다. 한편, 1941년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이듬해 마닐라를 점령하고 1945년까지 통치한다. 필리핀은 1945년 독립한다. 이후 지금까지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지속되고 있다. 이렇듯 필리핀은 스페인, 미국, 일본 등 제국주의 식민 지배의 격전장이었다.
호세 리살(1861~1896)은 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부유한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식민 모국 스페인에서 유학하였다. 유학 당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한 소설을 발표하여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 대한 비판 여론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그는 스페인 정부의 추방령에 따라 퇴학당하고 필리핀으로 돌아온다. 필리핀에서 ‘필리핀 연맹’을 결성하고 민족의 자각과 해방의 기운을 촉진시켰다. 1892년 스페인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필리핀 혁명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1896년 마닐라 시내에서 공개 총살형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은 필리핀인들에게 독립 의지를 불사르는 계기가 되었다. 필리핀 혁명(1896~1902)과 필리핀 민족주의의 사상적인 기반은 그의 문필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마지막 인사」는 사형 집행 전날 쓰여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조국(“동방 바다의 진주, 잃어버린 낙원”)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서글프게 시들어가는” 삶을 바치는 애틋하고 비장한 어조가 인상적이다. 시인은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도 의연하게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있다. “찡그림도 구김살도 눈물자국도 없는” 온전한 조국을 위해 “곧 떠나갈 넋”이 외치는 “건배”의 노래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시인과 민중과 조국은 하나다. 하여 시인을 위한 기도는 고통 받는 민중들을 위한 기도이자 조국 “스스로의 구원”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불행하게 스러져간 모든 이,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을 겪은 모든 이,
사무치는 한에 목놓아 우는 우리의 가련한 어머니들,
고아와 미망인, 고문당하는 죄수들을 위해 기도해다오.
네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다오.
시인은 조국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마지막 인사”를 한다. 그리고 떠난다. “노예도 사형집행인도 억압자도 없는 곳으로.” “신념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는 곳으로, 신이 다스리는 곳으로.” 그는 “고단한 삶을 벗어던지”고 영원한 안식처로 길을 나선다. 그리고 아름다운 언어로 부활한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불꽃같이 스러져간 리살의 짧은 삶은 “아시아의 첫 번째 민족주의 항쟁”(베네딕트 앤더슨)으로 기억되고 있다.
고인환∙2001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저서 결핍, 글쓰기의 기원, 말의 매혹:일상의 빛을 찾다, 공감과 곤혹 사이, 한국 근대문학의 주름 등이 있음, 젊은평론가상 수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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