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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가을)오늘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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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976회 작성일 14-08-08 11:35

본문

오늘의 시인

김영승 대표시

 

반성․16 외 4편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대표시

반성․743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더우세요

눈물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줄 게 있다고 왼쪽엔

타임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 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류는

선풍기

 

신축 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

 

 

 

 

대표시

반성․608

 

 

어릴 적의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의 껍질엔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 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主는

나를 놓아 주신다.

 

 

 

 

대표시

아름다운 폐인

 

 

나는 폐인입니다

세상이 아직 좋아서

나 같은 놈을 살게 내버려 둡니다

착하디 착한 나는

오히려 너무나 뛰어나기에 못미치는 나를

그 놀랍도록 아름다운 나를

그리하여 온통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자신 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슬픈 사람일 뿐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갖다 버려도

주워 갈 사람 없는 폐인입니다.

 

 

 

 

대표시

 

 

우리는 이젠

그동안 우리가 썼던 말들을

쓰지 않을지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

외롭다는 말

 

그리고

그립다는 말.

 

밤이면 기관포처럼

내 머리로 쏟아지는

별.

 

 

 

 

신작시

자만하라! 외 4편

 

 

자만은

최대의 겸손

 

落雷는 흔치 않으니

벚꽃은 가도 가도

벚꽃이다

 

벚꽃은 피었다가 지지만

一年 내내 벚꽃이었다는 양

一年 내내 벚꽃이라는 양

 

나무와 뿌리가

벚꽃의 虛像이라는 양

幻影이라는 양

 

도끼와 톱은

강풍은

 

더 虛像이고

더 幻影이라는 양

 

눈뜸과

눈감음처럼

 

피었다가

진다

 

쫓겨도

잡혀먹어도

 

至高의

自慢

 

나 이제 다시 自慢하리……

 

나 이제 다시 自慢하리……

 

저  벚꽃보다도

저 포장육보다도

 

나 이제 더 自慢하리

 

나 이제 다시 自慢하리……

 

저 벚꽃보다도

저 포장육보다도

 

나 이제 다시 自慢하리……

 

 

 

 

신작시

콩코르드 시계탑

 

 

미기적 미기적

아기죽 빠기죽

우물쭈물도

소꿉놀이도

다 삶이다

 

대 테러부대 레펠도

UFC도

히키코모리도

長坐不臥도 亂交도

통성기도도 헛둘헛둘

운동장 100바퀴도 저건

가 기요틴 있던 자리

세워진 파리 콩코르드 광장 시계탑 같은

오벨리스크 같은

저건 또 뭔가 저건

우리 동네 연수구 동춘초등학교 앞 공원에 세워진

해시계

저건 화강암으로 제작된

거대한 모뉴망

거대한 색대 같은 해시계

그 해시계에

 

공수낙하하다 행글라이딩 하다 찍히면

몇 시?

묻지 않아도 되는 사망 시간

태양열 발전기처럼

흐린 날엔, 비오는 날엔

더 춥고

더 새벽

저녁 구분 없는

 

저 화강암 흉기는

그 어느 거인이 있어

저 직립한 거대한 화강암 흉기를 부러뜨려

뽑아내어

할복자살을 할까

 

자살도

자살 충동 억제도

시간 알림도

그 어느 것도 못 하게 하는

 

저 불가해한

phallic pole은

 

내 반드시 저것을 뽑아

거꾸로 박아놓으리

완전히 땅속으로

 

아니면

아작아작 씹어

 

서해 만경창파에

 

뱉으리!

 

그 모든 直立은

矗石樓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건

다 누워야 한다 주저앉혀야

한다

 

진달래 개나리

만발한 이 봄날

 

계속 서 있는

 

해시계

 

 

 

 

신작시

연일 강풍

 

 

붉은 벽돌 옹벽 밑

거무튀튀한 보도블럭

붉은 벽돌 옹벽과

거무튀튀한 보도블럭이 만나는

직각 모서리 틈엔

가도 가도 제비꽃

가도 가도 제비꽃

담쟁이는 아직

폐가의 폐전선처럼

미라의 핏줄처럼 힘줄처럼

미라 복강의 내장처럼

마치 붕괴 직전의 옹벽을

마치 깨진 바가지를 얽어맨 칡넝쿨처럼

엉성히 꿰매고

촘촘히 얽고 엮어

자일처럼 매듭처럼

덮어 놓았다는 양

겨울 점퍼, 코트 입고

서핑하듯 미끄러져가는 남녀노소들

동아줄이라는 양

지푸라기라는 양

제비꽃은 직각 모서리

그 경계를

수평도 수직도 아니라는 양

제비꽃은 직각 모서리

그 경계를

하늘도 땅도 아니라는 양

文明도 自然도

아니라는 양

그 어떤 接點도 아니라는 양

가도 가도 촘촘히

엉성히 제비꽃은

눕지도 솟지도 않고

아득히

 

 

 

 

신작시

웃을 수 있다니

 

 

그렇게 구슬피

낮은 음성으로

 

무슨 노래를

부르며 걸으니

웃음이 나온다

 

어디를 걸었냐 하면

모른다

 

내가 그걸 알면

그런 노래를 불렀겠냐?

 

자문자답하고 걸으니

더 모르는 길이다

아니 場所다

 

웃을 수 있다니

좋은 일 아닌가?

 

장미를 심을까?

 

그렇게 구슬피

낮은 음성으로

 

무슨 노래를

부르며 걸으니

더 웃음이 나온다

 

 

 

 

신작시

명아주와 소리쟁이

 

 

봄이 오는 우리 동네

나의 산책로가

동영상 속에 갇혀지지 않기를

 

비는 마음은

나의 좌우

명아주와 소리쟁이로 피어난다

 

동영상 속의 시공이

원래의 시공과 동일하다고?

 

大地는 언제나

초유의 광야고

미지의 미로다

 

우리 동네

풍림어린이공원 CCTV 앞에서

그런 正當한 생각을 한참 하다가

너무 추워서 도로 들어왔다

 

물론 CCTV가 빨아들인

時空을

도로 뽑아내어

 

天地間에

흩뿌리며

 

 

 

 

시론

별이 지면 꿈도 지고

 

덥다. 이 더운 한낮 등산 후 삼삼오오, 아니 세 명이서 한 잔 하던 친구가 전화를 걸어, 모 친구의 형이 덕성여대 교수냐 상명여대 교수냐, 홍알홍알 묻는다. 나는 상명여대 교수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 상명여대 교수의 동생과, 아까 나한테 전화를 걸어 확인을 요청한 친구 바로 옆에 있던 친구, 그 모 친구의 형이 덕성여대 교수라고 우겨 바로 해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그 모 친구의 형이 당시 교관이었기 때문에 그 모 친구의 형이 상명여대 교수라는 것을 잘 안다 하니까 아니다 덕성여대 교수다 하고 우기던 바로 그 친구, 그러니까 덕성여대 교수라고 우기던 그 친구와, 바로 그 상명여대 교수의 동생과, 그리고 나, 그렇게 세 명은, 그들 소위 친구들 세계라는 세속에서는 분명 나름대로는 당대 술꾼의 금은동 메달리스트들!

 

그 중 한 친구는 현재 신장투석으로 술을 못 마시고, 또 한 친구는 나의 권면으로 술을 안 마시고, 나 역시 술을 못(안) 마시고 어쩐지 별 셋이 진 듯한 느낌이다. 별이 지면 꿈도 지고 운운은 젊은 날 듣던 독일 번안곡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운운하는 그 두 개의 작은 별이라는 노래인데 그렇다고 별이 진다고 꿈도 지고 슬픔만 남는 것은 물론 아니다.

 

20년 만인가 몇 년 만인가 최장 장마라는 49일인지 얼마인가의 긴긴 장마가 끝나고 연일 덥고 공기는 습했는데 오늘은 그 얼굴에 햇살을 이라는 노래 가사가 떠오를 만큼 화창하다. 참 그 그 얼굴에 햇살을 이라는 노래를 부른 맹인 가수는 우리 동네에 그런 라이브바인가 뭔가 하는 술집인지 뭔지를 냈다. 가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안 갈 것이다.

 

런닝셔츠 바람으로 이 글을 쓰는 지금 그나마 기분이 좋은 것은 나팔꽃이 엄청 많이 피었기 때문이다. 오직 그 사실만이 오늘의 기쁨이다. 나는 지난 20여 년 간을 나팔꽃을 길러왔는데 나팔꽃과 나팔은 선후관계로 볼 때는 당연히 나팔꽃이 먼저임에도 그 명명은 나팔 이후의 일이니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도 좀 그렇다 싶어 그냥 나팔꽃의 영문명 그 모닝 글로리를 떠올리며 그냥 고개를 한 번 끄떡여 보았다. 내 꿈이 있다면 나중에 트럼펫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혼자 연주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기르는 그 나팔꽃의 꿈일지도 모른다. 내 나팔꽃의 나에 대한 소망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팔꽃은 빨간 큰 나팔꽃과 파란 작은 나팔꽃 두 종류인데 아침엔 만발하여 장관이다. 나팔꽃이 진다고 꿈도 지지 않듯 그리고 내가 어떤 시인처럼 일년 삼백 예순 날 하냥 울고 있지 않듯 정작 그 나팔꽃도 그 나팔꽃의 꿈도 그렇다. 시와 시인도 그렇다.

 

아침에 활짝 핀 나팔꽃을 소가 끄는 수레에 잔뜩 실어 장에 내다 팔았다 해서 나팔꽃을 견우화牽牛花라고도 한다던데 다른 사람의 나팔꽃이 아니고 시인 김영승의 나팔꽃은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한 송이에 3천 억 달러, 혹은 5천 억 달러에 경매가 된다면 그 사악함에 인류는 멸망이다. 내 나팔꽃이 무가無價이듯 내 시도 그렇다. 무란 니힐이기도 하지만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아닌가?

그런데 또 무슨 무극無極이 태극이냐?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나팔꽃은 나팔꽃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내 나팔꽃은 내 나팔꽃이라는 얘기인데 소유를 말하는 것은 아니고 관계를 말함이기에 나는 정당하고 순천順天이며 합자연合自然이다. 한 때는 두주합자연斗酒合自然했었지만. 그리고 또 무슨 두주斗酒가 합자연이냐? 그런 면에서는 인간은, 아니 인류는 참 일본의 그 오타쿠 족인지 뭔지 하는 족속들 모양 자연 코스프레가 심하여 귀엽고도 위험하다. 시도 그렇다.

 

별이 지면 꿈도 지고 그리고 그 노래 가사의 후렴구처럼 슬픔만 남냐? 그럴 수도 있겠다.

나팔꽃이 지면 아들이 온다. 나팔꽃은 어쩌면 그때까지도 많이 피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팔꽃이 지면 공군에 입대한 아들이 제대를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별이 지면 그 꿈이 실현된 세계가 펼쳐진다. 나도 그렇고, 나의 시도 그렇다. 영원히!

아까 나한테 모 친구의 형이 덕성여대 교수냐 상명여대 교수냐 전화를 바꿔가며 물었던 친구들이 문득 진시황릉의 병마용 같다.

그 진시황릉의 병마용은 인류가 저지른 어리석고 못된 짓 중의 하나이지만 그들 친구들은 내 가슴에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운운하는 시인이 그 병마용을 만든 자보다는 별과, 그 별의 노래를 부르는 자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그 모 친구의 형이 덕성여대 교수냐 상명여대 교수냐는 바로 그 모 친구의 형 자신에게도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다. 가을이다.

 

김영승∙1958년 인천 출생. 제물포고등학교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졸업.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반성․序」외 3편의 詩를 발표함으로써 데뷔. 1987년 시집 반성(민음사) 간행. 1988년 시집 車에 실려가는 車(우경), 시집 취객의 꿈(청하) 간행. 1989년 에세이집 오늘 하루의 죽음(문음사) 간행. 1991년 시집 아름다운 폐인(미학사) 간행. 1994년 시집 몸 하나의 사랑(미학사), 시집 권태(책나무) 간행. 2001년 시집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나남출판) 간행. 2002년 제3회 현대시작품상 수상. 2008년 시집 화창(세계사) 간행. 2010년 제5회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2011년 제29회 인천시문화상 수상. 2013년 시집 흐린 날 미사일(나남출판) 간행. 제13회 지훈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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