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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신작시/박무웅/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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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웅/길 외 1편
한 사람이 길을 떠났다면
거기 새로운 길이 생겼을 것이다
하늘과 바다 혹은 숲속에도 길이 있는데
하물며 한 사람의 의지 속에 길이 없겠는가.
바위를 가로질러 가는 한 마리의 뱀과 같이
담을 올라가는 한 줄기의 담쟁이와 같이
세상의 길 위에
입 꾹 다문 결심하나 없겠는가.
초원의 들소가 들소를 밟고 뛰는 길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해서 도는 길도
제자리 비행을 하는 한 마리의 맹금류도
모두 제 길 하나쯤은 갖고 태어났다.
들판을 지나가는 바람과
그 바람과 동행하는 풀들도 같은 길에 서 있는 것이다.
비틀거리는 길에선 모두 비틀거리는 것이다.
이렇듯 지상의 길들이 진화하면 사람이 된다.
길은 길게 때로는 목적도 없이 누워 있지만
사람은 그 위에서 걸어간다.
잠시 길 옆 바위에 앉아
내가 지나쳐 온 나를 기다려 주는 것
내가 땀 송글송글 맺힌 먼 길이 되는 것.
매
초승달을 눈에 넣은 매 한 마리가
학교 국기봉에 앉아 있다
제자리비행으로 오래 펄럭거린다.
새까맣게 소낙비가 내릴 듯하면
짐승들이 산등성이로 내닿고 작은 날개들이 하늘을 메우고
지상의 닭들은 부산해진다
이 때 공중에는 배고픈 눈빛이 집요하다
오랜 시간을 나선형으로 돌수록
그 옛날 땅에 버린 눈빛은 점점 밝아졌다.
단 일격을 꿈꾸는 조준이 과녁을 오래 바라보듯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생과 죽음이
서로를 마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학교 국기봉 위
음양의 우주가 바람에 펄럭이듯
숲과 들판에도
생과 사가 서로를 먹여 살리고 있다.
우리는 한 끼 밥 앞에서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이다
아주 오래 전 어머니의 빈손에서 보았던 그 발톱
그 맨손을 바라보던 나의 눈에 돋아나던
그 배고픈 발톱
펄럭거리면서 바람을 먹여 살리는 것들이 있듯
깃털이 깃털을 먹여 살리는 숲은 평화롭다
상극相剋으로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그 중간에 나와
매 한 마리가 제자리비행을 하고 있다.
박무웅∙199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내 마음의 UFO 외. 계간 ≪시와표현≫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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