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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신작시/정겸/궁평항* 둘래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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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겸/궁평항* 둘래길 외 1편
아버지와 내가 지게를 지고 다니던 길
올래길 둘래길로 바뀌었네
산그늘 길섶 사이마다
질경이 꽃 지천으로 피었네
미루나무 가지에 먹장구름 걸려 있고
높새바람은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고 갔네
끊어지고 이어지는 시간의 맥을 따라
한 무리 들짐승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고
개똥지빠귀 떼들은 나무 잎사귀마다
날카로운 발자국 선명하게 찍어 놓았네
밟히고 또 밟혀도
줄줄이 꽃차례 따라
하얗게 피어난 그 꽃
흰 와이셔츠 깃 꼿꼿이 세우고
걸어 다닐 때는 보이지 않았네
구름 한 마장 지나는 동안
오체투지로 한참을 바라보았네
순백의 작은 꽃잎들 바람에 흔들리며
별 하나씩 품고 있었네
* 경기 화성시 서신면에 있는 낙조가 아름다운 항구.
초록 자라
물을 떠나 살 수 있을까
엉금엉금 산을 오른다
완만한 산록을 따라 기어가는 동안
앞을 가로막는 계곡물 거친 듯, 조용히 흐른다
홀로 서 있던 산매화 수액이
물관을 타고 심장 속으로 전이되고
심장의 박동소리 점점 빨라진다
순간, 계곡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바람
나뭇잎 방향 없이 흩어지고
계곡물은 급물살 타며 소란스럽다
팥배나무 높은 가지, 우듬지를 붙들었던
동고비와 쇠박새 하늘 높이 솟구친다
우수수 쏟아지는 깃털들
수맥의 끈을 놓친 지 오래되었다
산허리 따라 좁아진 산길, 숨이 턱, 막힌다
도망자의 길처럼 은폐된 등산로
가끔은 나무 뒤에 숨어서 세상을 훔쳐본다
푸른 기운은 하나 없는 바위덩어리
고사목이 널브러져 있는 여기는 깔딱 고개
다시 한 번 숨이 턱에 받치는
순간을 견뎌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산등성이 오르내리고 또 오르기를 몇 번
햇볕은 두꺼운 갑옷을 사정없이 두들긴다
강물이 그리워지고 연못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바위 그늘에 누워 목을 움츠리며 헐떡거린다
세상을 한 바퀴 돌고 돌아
제 자리로 돌아 온 늙은 자라 한 마리
누렇게 탈색 된 옷을 걸쳐 입고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정겸∙경기 화성 출생. 2000년 ≪세기문학≫, 2003년 격월간 ≪시사사≫로 등단. 시집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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