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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홍순영/낯선 얼굴이 말없이 자라나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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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229회 작성일 22-12-2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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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홍순영/낯선 얼굴이 말없이 자라나 외 1편 


홍순영


낯선 얼굴이 말없이 자라나 외 1편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 7)


내가 모르는 돌들이 어디선가 나고, 그 돌들 자라고 

돌들도 아프고

돌들도 마침내 죽고 말 텐데


미륵사지 석탑에 눈동자를 풍경風磬인 듯 매달고

소리만 베고 누운 돌무더기, 무더기

무너진 것들은 죄다 살붙이 같아서

허물어져서도 무거운 발등에 손을 얹는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눈먼 풍경風磬이 쌓아 올리는 혼잣말에 귀가 먼 당신은

돌의 옷을 빌려 입었나?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얼굴로 서서

눈과 코가 다 지워진 석인石人 속으로 스며들고

당신의 텅 비어 가는 소매 끝에 매달린 나는

서쪽으로 자꾸 기울어져 가는데

저기, 허공으로 까마득히 밀려오는 

시간의 비늘

우리는 저 틈이 함부로 뱉어낸 돌이었을까

돌무더기 속에서 어깨를 들어 올려 천천히 솟아날


문은 닫아놔도 열어놔도 그만

입구도 출구도 돌의 몸속에 있다

심주心柱만이 좀 더 안쪽에 숨어있을 뿐


  * 전도서 1장 2절.





사서死書 



나는 벌레가 싫은데

책상에 앉으면 먹이를 찾는 벌레가 된다

채 자라지 않은 벌레가 백지 위에 쏟아내는

또 다른 애벌레

제목 없이 떠도는 저것들은 누구의 사생아일까


그늘을 먹고 자란,

서로 엉켜있는 그림자의 긴 손가락이 

책장에 숨은 유령들의 목덜미를 잡는다

나란히 기대어 있던 어깨들이 무너진다


읽지 못한 책들이 버려진다

읽지 않은 책들이 버려진다

읽었으나 삼키지 못한 책들이 버려진다

우리는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집에서 쫓겨난 아이처럼 구겨진 얼굴로 묻는


죽음 앞에서 숲을 떠올리는 이는 나무에서 태어난 사람

색 바랜 단풍잎을 입에 물고 해맑게 웃는 얼굴

덮, 는, 다


탈락한 생을 상자에 밀어 넣자 일몰이 걸어와 함께 눕는다

숙주를 잃은 벌레들

때를 놓치지 않고 새카맣게 기어 나온다 

나는 잽싸게 도망친다

먹이가 될 수 없는 벌레가

먹이가 되지 않겠다는 듯





*홍순영 2011년 《시인동네》로 등단. 시집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오늘까지만 함께 걸어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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