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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홍순영/낯선 얼굴이 말없이 자라나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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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홍순영/낯선 얼굴이 말없이 자라나 외 1편
홍순영
낯선 얼굴이 말없이 자라나 외 1편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 7)
내가 모르는 돌들이 어디선가 나고, 그 돌들 자라고
돌들도 아프고
돌들도 마침내 죽고 말 텐데
미륵사지 석탑에 눈동자를 풍경風磬인 듯 매달고
소리만 베고 누운 돌무더기, 무더기
무너진 것들은 죄다 살붙이 같아서
허물어져서도 무거운 발등에 손을 얹는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눈먼 풍경風磬이 쌓아 올리는 혼잣말에 귀가 먼 당신은
돌의 옷을 빌려 입었나?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얼굴로 서서
눈과 코가 다 지워진 석인石人 속으로 스며들고
당신의 텅 비어 가는 소매 끝에 매달린 나는
서쪽으로 자꾸 기울어져 가는데
저기, 허공으로 까마득히 밀려오는
시간의 비늘
우리는 저 틈이 함부로 뱉어낸 돌이었을까
돌무더기 속에서 어깨를 들어 올려 천천히 솟아날
문은 닫아놔도 열어놔도 그만
입구도 출구도 돌의 몸속에 있다
심주心柱만이 좀 더 안쪽에 숨어있을 뿐
* 전도서 1장 2절.
사서死書
나는 벌레가 싫은데
책상에 앉으면 먹이를 찾는 벌레가 된다
채 자라지 않은 벌레가 백지 위에 쏟아내는
또 다른 애벌레
제목 없이 떠도는 저것들은 누구의 사생아일까
그늘을 먹고 자란,
서로 엉켜있는 그림자의 긴 손가락이
책장에 숨은 유령들의 목덜미를 잡는다
나란히 기대어 있던 어깨들이 무너진다
읽지 못한 책들이 버려진다
읽지 않은 책들이 버려진다
읽었으나 삼키지 못한 책들이 버려진다
우리는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집에서 쫓겨난 아이처럼 구겨진 얼굴로 묻는
죽음 앞에서 숲을 떠올리는 이는 나무에서 태어난 사람
색 바랜 단풍잎을 입에 물고 해맑게 웃는 얼굴
덮, 는, 다
탈락한 생을 상자에 밀어 넣자 일몰이 걸어와 함께 눕는다
숙주를 잃은 벌레들
때를 놓치지 않고 새카맣게 기어 나온다
나는 잽싸게 도망친다
먹이가 될 수 없는 벌레가
먹이가 되지 않겠다는 듯
*홍순영 2011년 《시인동네》로 등단. 시집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 『오늘까지만 함께 걸어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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