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77호/신작시/이호준/신新 고려장 시대 외 1편
페이지 정보

본문
77호/신작시/이호준/신新 고려장 시대 외 1편
이호준
신新 고려장 시대 외 1편
숲에서 모니터 없는 컴퓨터를 발견했다
늙은 모니터가 입주한지 한 달만이다
기억을 빼앗긴 컴퓨터는 별만 헤아리고 있었다
승용차가 숲에서 살게 된 건 2주 전이었다
첫날 이후 꼼짝 않고 있는 걸 보면 버, 려, 진, 게 틀림없다
버려진 것들은 기다림에 남은 생을 바친다
석 달 전 거의 통째로 들어온 비닐하우스에 비하면
승용차의 전입은 새삼스럽지 않다
하우스에서는 밤마다 두런거리는 소리가 습관처럼 새어나온다
엊그제 본 나일론 끈에는 죽음의 열망이 묻어있었다
죽음 같은 거 포기하길 잘했지, 그 인간
숲에 산다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몸을 치울 뻔 했다
나를 따라다니는 이 강아지는 지난 봄 숲으로 왔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에 버려져서 나를 어미로 안다
내가 지금 비 내리는 숲을 헤치고 다니는 까닭은
혹시 쓸만 한 간이나 눈을 찾을까 해서다
요즘은 그런 것도 드물지 않게 들어온다
숲은 오래 전부터 나무나 풀 다람쥐가 사는 곳이 아니어서
버려진 것들이 뿌리 내려 물을 긷고
가지를 뻗고 잎을 피운다
사랑이나 그리움 따위가 자라지 못하는 이곳은,
이제 푸르지 않다
오징어 말리는 풍경
거침없이 바다를 가르던 주검들 저기
구겨진 날개로 관성을 어루만진다
등 굽은 햇살이 날숨의 잔해를 염습하는 시간
풍장은 곡哭이 없어도 장엄하다
날개 가진 것들은 모두 허공에서 이별한다
삶 앞에 당당했던 것들은 죽음 앞에도 당당하기 마련
속울음까지 쏟아낸 몸뚱이들
죽음 저쪽까지 보여줄 듯 저리 투명한 것은
발가벗고 있어서가 아니라
욕망과 질시를 내려놓았기 때문,
더 이상 미움의 언어를 품지 않기 때문이다
비우는 건 빛보다 더 빛나는 일이라고
바람이 바람결에 지장경을 독송한다
*이호준 2013년 《시와 경계》로 등단. 시집 『티그리스강에는 샤가 산다』. 산문집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부』,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나를 치유하는 여행』, 『세상의 끝, 오로라』 외.
- 이전글77호/신작시/권순/지하1층 특1호실 외 1편 22.12.29
- 다음글77호/신작시/홍순영/낯선 얼굴이 말없이 자라나 외 1편 22.1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