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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권순/지하1층 특1호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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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권순/지하1층 특1호실 외 1편
권순
지하1층 특1호실 외 1편
흑석동 전철역에 내려 돌고 돌아서
국화 만발한 너의 영정 앞에 선다
너는 여전히 환하게 웃는다
속없어 보인다고 스스로 타박하던 잇몸을 드러내며
고요하게 웃고 있다 네 앞에 향을 꽂는다
버스가 맞은편 차선을 넘어서 달려왔다고
그 넓은 길은 늘 누군가 달리고
누군가 다치고 누군가를 죽게 하는 길이다
엊그제 비슬산에 간다는 통화를 했는데
국화꽃에 둘러싸여 속없이 웃기만 하는 너는
핸드백을 든 날보다 배낭을 짊어진 날이 더 많은
너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게 너무 싫다던 너는
유목민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별빛 쏟아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던 너는
말을 건네면 눈빛으로 돌려주곤 했지
말에 묻은 독기는 눈빛으로 품어야 하고
아픈 말은 듣는 사람 품이 더 넓어야 한다던
네가 이렇게 빨리 눈 감을 줄은 짐작도 못했다
예전처럼 먼 설산에 가서 그림엽서라도
보내 줄 거 같은 너를 기다리며
오늘은 네가 아닌 네 식구들을 위로하는
너의 영정 앞이다
낙서
동네 목욕탕에서 낙서를 읽었다
‘난 지금 모든 걸 잃었다’라는
연필로 눌러 쓴 낙서였다
지금과 모든 걸이란 말이 눈에 걸렸다
목욕탕에서 지금 모든 걸 잃은 아이는 누구일까
벌거벗은 우리는 서로 얼굴을 살피고 있다
미술관에서 양볼에 뿔 달린 노인을 읽었다
그의 뿔은 머리 위가 아닌 얼굴 아래로 쏟아지듯 자라고 있었다
하도 기이해서 만져보려다 물컹한 뿔에 찔렸다
그 뿔의 공격성을 읽지 못한 것이다
미술관 화장실에서 낙서를 읽었다
‘난 지금 모든 걸 잃었다’라는
볼펜으로 여러 번 겹쳐 쓴 낙서였다
잃었다는 말의 속뜻이 궁금해 잃었다를 혀에 올려놓고
우물거리다가 인기척에 멈췄다 그 사이 잃었다 는 말은
잊었다 라는 말을 달고 왔다
나도 낙서를 하고 싶다
우리 동네 새로 지은 도서관이면 좋겠다
열람실 옆이랑 화장실 중 어디가 좋을까
난 잃은 것과 잊은 것을 빼곡하게 늘어놓을 것이다
빼곡한 그 말들을 금방 잊어버릴까봐 허공에 입술로
낙서를 한다 먼저 ‘난 지금 모든 걸 가졌다’라고 쓴다
가졌다와 잃었다 사이에 빼곡하던 말들이
조용히 꼬리를 물고 집으로 돌아간다
*권순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사과밭에서 그가 온다』. 아라작품상 수상. 시동인 <현상>과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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