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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원보람/우산을 함께 쓰지 않는 연인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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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원보람/우산을 함께 쓰지 않는 연인 외 1편
원보람
우산을 함께 쓰지 않는 연인 외 1편
비가 오면 알 수 있다
우산마다 하나의 세계가 생긴다는 걸
바깥은 빗소리가 가득하지만
우산 아래는 숨소리와 온기로 팽팽하다
그곳은 어쩌면 잠시 젖지 않는 세계
자신의 세계를 나누지 않는 사람은
어깨가 젖지 않는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씨에도
마르고 단정한 모습으로
자신의 세계를 홀가분하게 쥐고 간다
그는 나와 어깨를 맞대기 위해
자신의 어깨를 적시는 일을 불행하게 여겼다
간혹 선심을 쓰듯이 문을 열어주는 순간에는
나만 규칙을 모르는 게임을 시작했다
우산의 세계는 수시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나는 상자에 들어온 것처럼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날씨 탓을 하다가 지쳐버리고
우산 손잡이를 힘껏 쥐고 있으면
정확한 간격을 유지할 수 있을까
거리는 평행선처럼 계속 이어진다
나는 그와 함께 추억할 어깨가 없다
커다란 우산 속에 잘 보관된 기억
아무리 걸어도 우리는
같은 곳에 도착하지 못한다
비가 그치고 사람들이 우산을 접는다
긴 빈칸처럼 벌어진 것들이 보인다
단면으로 깨끗하게 접힌 세계들이
자기계발
섬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매일 치열하게 살았다 물고기를 전날보다 더 잡아야 해 한 발이라도 앞서나가는 사람이 되어야지 파도가 잔잔한 날이 지나고 물고기 수확량은 늘어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자책했다 나는 왜 이렇게 무능력할까 맑은 날이 지나갔다 체력이 이렇게 약해서 어떡하지 오래 살 수 있을까 비가 내리는 날이 며칠 동안 계속 되었다 그 사람은 인간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괴로웠다 나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 같아 아니면 대화의 기술이 부족한 걸까 떠돌이 개가 지나가며 침을 흘렸다 섬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모두 내 탓이야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길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야 섬에서 태어난 그 사람은 의기소침해졌다 생일에는 광고 문자만 잔뜩 날아왔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고객님 일주일간 고기잡이용 그물 20% 할인 쿠폰을 드립니다 해무가 짙은 날이 지나가고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이제까지 배운 것이라고는 물질뿐인데 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하다니 그 사람은 자기계발서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자세로 노력해야 해 다음날 해무가 짙어진 바다로 나가며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나는 할 수 있다 한다면 한다 파도는 빠른 속도로 높아졌고 그 사람의 목소리는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원보람 201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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