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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책크리틱/백인덕|준거準據와 근거根據-‘삶’을 위한 시적 도전-배진성, 박해성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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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868회 작성일 14-03-0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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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리틱

백인덕|준거準據와 근거根據-‘삶’을 위한 시적 도전-배진성, 박해성의 시집

 

 

1.

시의 한계는 명확하다. ‘시’라는 발화의 양식, 글쓰기의 장르가 발생하는 순간부터 그 기능, 또는 효용의 한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발생했다. 기능과 효용은 ‘사회적’ 측면을 의식한다. 케뮤니케이션을 염두에 둔다면, ‘공동체에서의 역할’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 사태의 원인은 시 내부와 외부, 즉 시의 ‘우주’에서 기원한다. 필자는 지금 어떤 특정한 ‘현상’을 겨냥하지 않는다. 일반론으로 ‘시’는 발화와 작문, 즉 언어의 두 가능 양태에서 일정한 한계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음을 상기하고자 할 뿐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는 특수한 구성 원리에 따라 구조적 요소들이 제 역할을 수행할 때 최선의 효과를 생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작품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기제일 뿐, ‘공감(소통)’을 지향할 때는 더 넓은 범주의 요구항들이 첨가된다. 즉 동시대적, 사회적 요구와 혼융될 때, ‘시’는 작품의 생성 요건 이상의 ‘의미’의 압력과 만나게 된다. 사람의 일이란 언제나 ‘사람’을 지향하는 것으로 그 시작과 종말이 인지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유효한지 판단이 잘 서지는 않지만, ‘힐링healing’이라는 어휘가 이 공동체의 중요한 ‘가치어’로 그야말로 횡행했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는 ‘힐링서적’, ‘힐링방송’, ‘힐링캠프’의 ‘효용성’에 대한 놀랄만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 수많은 ‘힐링’에서 실제로(구체적일 수 없으므로) 도움이 되었다고 응답한 경우(20대 기준)가 전체 응답자의 20%를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는?, 비용 대 효과의 논리로 본다면 필자는 ‘시’가 이 ‘공동체’의 힐링에 더 적합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견에 접어든(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배진성 시인의 <이어도공화국·4-꿈섬>(이하 <꿈섬>이라 한다)과 박해성 시인의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는 (이런 용어가 성립할 수 있다면) ‘시적 힐링poetic healing’의 동시대적 ‘전형’을 보여준다. 이유는 진정한 ‘치유’는 ‘증상’에서 ‘병인病因’을 향하는 방향을 취해야 하고, 진단이 ‘근본적’이어야 하며, 치유책이 ‘본질’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드러내려는 의미/드러난 의미’의 괴리와 ‘표현된 것/이해된 것’ 사이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 두 시집은 ‘삶’의 ‘준거와 근거’를 끔찍하게 되묻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그 정신의 밑바탕엔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란다’는 휠덜린식 자기 인식이 작동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2. ‘자연’이라는 배움터:배진성의 <이어도 공화국·4-꿈섬>

이번 시집에는 백여 편이 넘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배진성 시인은 “바다에 던져졌던 빈 항아리 하나/ 20년 째 묵언 수행 중이다/ 뚜껑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그나마/ 허술한 밑까지 통째로 빠져버렸다”(「항아리」)고 괜한 너스레지만, 그의 ‘입(뚜껑)’과 ‘밑’이 온갖 생명들을 향해 쏟아낸 자양분들은 풍성하다 못해 찬란하다. 그런데 문제는 시집을 충실하게 따라 읽기에도 벅차다. 물론 그 이유는 시집에 있지 않고, 온갖 일을 주무하며, 별 필요 없는 근심과 불안에 사로잡힌 ‘도시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몇 개의 키워드를 설정해 시집을 읽음으로써 이 곤란을 우회하기로 한다. <꿈섬>은 ‘자연’이라는 ‘장’ 위에서, 또는 그 안에서 인간이 살고, 배우고, 꿈꾸는 이유와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당연히 ‘시적 대상’에 의지한 ‘형상화’를 통해서 이다. ‘살고, 배우고, 꿈꾸는’ 것과 정확하게 대응하지는 않지만, 이 글에서는 ‘밥과 똥과 시’에 대한 사유(창조적 재인식)라고 본다. 배진성 시인의 ‘어휘’를 그대로 살리고 싶기 때문이다.

먼저, ‘밥’이 직접적으로 연상되는 작품들로는 「밥시」, 「취사」, 「된장국밥」, 「나무숟가락」 정도라 할 수 있다. 좀 확장해서 보면, 「공동묘지」, 「퍼물」이 여기에 속한다. 물론 시인이 노래하는 모든 바다와 나무와 풀, 생명과 지형과 이야기가 다 이 ‘밥’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밥’은 인간과 문명의 그것이 아니라 생명과 자연의 그것, 쟁취해야 할 ‘물질’이 아니라 담았다 뱉어내야 할 ‘에너지’라는 것이다.

 

밥 짓기가 쉬운 것 같아도

밥다운 밥을 짓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과 불과 기다림이 관건이다

  

아무리 반찬을 맛있게 잘 만들어도

사람들은

반찬상이 아니라 밥상이라고 말한다

―「밥시」 부분

 

하느님과 어머니와 내가 발전소에서 별빛을 만들고 있다 별빛을 켜고 꽃빛을 켜고 눈빛을 켜고 있다 반짝 반짝반짝, 하느님과 어머니와 내가 발전소에서

그리움―「나무발전소 3」 부분

 

시인에게 있어 ‘밥’을 짓는 건, ‘물과 불’의 기다림을 아는 것이다. 결국 은근한 것이다. 기다림이란 “오지 않을 사람을 밤새도록 기다리는 때”(「액자」)처럼 막막한 것이며, “단 하나의 붉은 꿈을 위하여/ 차라리 라플레시아의 숙주식물이 된다”(「라플레시아」)는 각오처럼 비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밥이 생명의 에너지라는 사유는 개인을 너머서는 단위의 ‘밥’을 연상케 한다. ‘발전소’란 한 지역의 문명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즉 밥을 생산하는 곳인데 시인은 그곳에서 ‘송전’되는 것이 ‘그리움’이라고 말함으로써 생존의 필수조건에 대한 에코eco적 상상력의 일단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똥’을 키워드로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 제목 상 직접적으로는 「똥」과 「시는 똥이다」 두 편이다. 하지만 ‘똥’이 생명에너지 순환의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생명과 생명을 이어준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이어도’를 대상으로 하는 모든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거름이 되지 못하는 똥물은 물러가고

거름이 될 수 있는

따뜻한 똥만 남아라

 

모시나비가 날고

상제나비가 날고

붉은점모시나비가

개미들의 밥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붉은점모시나비가 날던 자리에

곧 부용화가 피어나리라

―「붉은점모시나비」 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이 들려주는 것처럼, ‘따듯한 똥’에서 ‘나비’가 그걸 먹고 ‘개미’가, 탐욕스런 개미가 떠난 자리에 다시 ‘부용화’가 피어나게 하는 것이 ‘똥’의 위력이다. 이어지는 작품들 「연꽃」, 「가파도」, 「산방산」등은 제목이 환기하는 것처럼 단순한 변전變轉이 아닌 승화昇華를 겨냥하고 있다. “하수구까지 흙을 찾아 들어간/ 그 나뭇잎의 안부가 자꾸만 궁금하다”(「굴러서」) 시인은 겨울바람에 떠밀려 ‘굴러서’ 제 본질(흙)을 찾아간 나뭇잎을 생각한다. 여기 핵심은 ‘흙’이 아니라 ‘굴러서’다. ‘똥’은 굴러서 ‘꽃’이 되고, ‘꽃’은 열매로 또 구르고 굴러서 인간의 ‘밥’이 되고 밥은 다시 ‘똥’이 된다. 이 엄연한 ‘자연’에 슬퍼하지 않을 자 몇인가, 그저 모른 척 할 뿐이지만 시인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결국, 배진성 시인의 이번 시집, <꿈섬>은 하나의 중심으로 소급된다.(물론 필자가 읽기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시’ 또는 ‘시인의 자세’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시인’은 처음에는 ‘자기 정위定位’에 불과하다고 느끼지만, ‘묵언수행’이 쌓일수록 그것이 하나의 고리, 자연과 사회와 개인을 연결하는 아름다운, 혹은 찬란한 순간에 불타버리고 마는 ‘연결선’ 같은 것임을 느끼게 된다. 이번 시집을 읽으며 애써 '밥‘과 ’똥‘, ’입‘과 ’밑‘이라는 분별을 설정했지만, 이 순간 커피를 마시며 소변이 마려운 ’나‘는 ’분별‘될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아무래도 시집은 그 접점接點으로 ’시‘를 세워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쓰는 시들은

내가 개발한 나만의 된장국밥이다

―「된장국밥」 부분

 

거름이 되어

나는 다시

내가 싸놓은 똥을

내가 다시 먹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시는 똥이다」 부분

 

인용 작품들처럼 배진성 시인에게 ‘밥’과 ‘똥’은 다 시다. 하지만, 시인으로서 ‘시인’은 자기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그 방면으로는 어리석은 필자지만 이 놀라운 시 한 편으로 생각의 문을 닫으려 한다.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 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사과꽃망울」 전문

 

3. ‘문명’이라는 놀이터:박해성의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

박해성 시인은 유쾌하다. 이번 시집만 본다면, ‘유쾌, 통쾌, 상쾌’하기까지 하다.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라니, ‘비빔밥’은 ‘혼합, 혼융’ 즉 뒤섞임을 통해 부분적 맛을 통합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반면에, ‘계보’란 ‘나/남’을 확실하게 구분함으로써 ‘순혈주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는 음험한 전략이다. 아, 시집 제목에서 부딪치게 되는 이 ‘불편함’이 아마도 시인이 ‘전략적’으로 기획했던 것은 아닌지, 또 불안이 솟아오른다.

이번 시집은 대체로 세 갈래의 ‘의미적 전략’ 과 두 개의 ‘기법’으로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의미전략이란 늘 그렇듯이 ‘과거-현재-현재적 과거’로 규정될 수 있다. 반면, 두 개의 기법은 ‘시니피앙’의 놀이와 ‘의미의 지연’이라는 수법을 말한다.

 

그대,

늘 무표정한

백의白衣의 테러리스트

밀림 속 빗소리가 동공 깊이 배어있다

톱날에 이냥 버히던 비명이 덜 마른 걸까?

 

태양의 암호거나 바람의 진술 받아 적은

안태본 나이테며 새소리 다 풀어낸 몸

하 숱한 담금질 끝에 전생마저 토설하고

이승 반, 저승 반쯤 맨발로 넘나들던

순교자의 핏빛이다, 식물성 득음의 길

캄캄한 씨앗 하나가 공즉시색空卽是色, 하늘 여니

 

함부로 찢지 마라

대자대비 부처시다,

수라 같은 세속의 말 담담히 그러안는

그 가슴 어디쯤인가 사리 몇 과 영글겠다

―「A4 용지에 관한 단상」 전문

 

시는 박해성 시인의 대상을 선택하는 ‘눈’과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을 표본처럼 보여준다. “백의의 테러리스트”는 시인이 내린 정의지만, “밀림 속 빗소리가 동공깊이 배어있다”는 ‘시적 상상’을 동원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다. 누군들 모르겠는가, 필자마저도 대학에서 사용하는 모든 ‘형광용지’가 인도네시아의 깊은 산림에서 ‘몸’ 팔려 온 것임을 안다. 그런데 시인은 덧붙어 ‘함부로 찢지 마라’ 하신다. 이유는 ‘수라 같은 세속의 말’을 받아 안기 때문이다. ‘사리 몇 과’에 맺히든 말든, 그 또한 분란의 소지가 되겠지만, 시인은 이 한 편의 작품을 통해서도 주변 ‘사물’이 그냥 ‘사물’일 수 없음을 증명한다.

박해성 시인의 ‘유쾌한’ 시적 진술은 ‘음성적 유사성’과 ‘의미적 유비’에서 비롯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시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고 볼 수 있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의미’를 훼손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준다고 쓰고 싶다. 먼저 「프라이드 치킨’」의 ‘프라이드’, 「참치통조림」의 ‘깡통’ 등처럼 ‘월인천강지곡’을 분해한 것도 있지만, 음성적 유사성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는 수법이나 「바리데기」, 「정읍사」, 「아마조네스」, 「배트맨」처럼 고대와 현대의 이야기를 되살려 ‘시인’의 표현적 도구로 ‘재정의’하게 하는 힘이 뛰어나다.

 

윗대 할아버지는 몽골의 전사라 했지, 본디 고운 할머니 여진족 규수였는데 청동기 거울을 깨고 게르촌으로 도망쳤단다

 

(중략)

 

하필이면 내 딸인가 식지 않는 유목의 피, 어느 집안 내력인지 바람의 길을 따라 세상을 한 바퀴 반쯤 신들린 듯 누빈 낭자, 숱 많은 검은 머리 코리아 처녀에 반해 도원에 둥지 틀었지 미국산 청교도 후예, 머잖아 초록별 닮은 대지구인 나겠다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 부분

 

이 시집의 표제작인 작품은 박해성 시인의 시적 역량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것은 먼저 ‘윗대 할아버지는 몽골의 전시’라고 밝히는 자기 고백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순환’의 표지는 결국 “머잖아 초록별 닮은 대지구인”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데서 끝난다. 그러므로 박해성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보여준, 가령 “달면 꿀떡 삼키고 쓰면 뱉는 사바에서/ 최신형 명품 독감에 입맛 잃은 그대 위해/ 유기농 은유 한 잔쯤 반주로 곁들이세요“(「퓨전요리강습」) 같은 진술은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정신’에 대한 반어적 힐난이다. 이번 시집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 박해성 시인의 상상력이 그 본질적 기반 위에서 조금 슬픈 ‘놀이’로 ‘환’하는 작품을 보려 한다.

 

그예 놓쳐버렸는가, 바다로 가는 길을

지하철역 한 모퉁이 고래가 졸고 있다

어쩌다 척추가 굳어 헤엄치는 법을 잊은

 

빙하기 이전에는 어느 판板에 살았을까?

 

찬밥 같은 생을 덮은 사과상자 옆구리엔

고딕체 붉은 외마디 ‘취급주의’ 선명한데

 

스치는 하이힐소리 꽃잎인양 흩날리면

퇴화한 지느러미 환상통이 도지는 듯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중력을 벗어나는 이,

 

뼈만 남은 생선처럼 비릿한 그믐달 이고

살얼음판 건너간다, 뭍에 오른 저 돌고래

―「날아라 돌고래」 전문

 

이 작품에는 박해성 시인의 ‘유쾌함’의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아무리 상상해도 ‘노숙자’일 수밖에 없는 ‘청자’를 ‘고래-돌고래’, 그것도 지나치게 ‘꿈(환상통)’에 사로잡힌 존재로 보는 데서 시인이 ‘현실’을 참혹한 ‘놀이터’로 인식하고 있음이 반증된다.

어쩌면 이번 시집, <꿈섬>과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는 ‘취급주의’가 지나치게 선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여, 독자들은 이를 이불 삼기도 하고. ‘밑’ 닦게라도 삼으시라. 아름다운 시는 그렇게 쓰여야 하지 않나?

 

백인덕∙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단단함에 대하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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