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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책크리틱/차성연|연기의 문장, 碑文 혹은 非文―신용목 시집 <아무 날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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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리틱
차성연|연기의 문장, 碑文 혹은 非文―신용목 시집 <아무 날의 도시>
무수한 나날들을 ‘아무 날’이라 말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묘지일 뿐이다. 어제이거나 오늘이거나, 혹은 내일일지라도 모두 ‘아무 날’이 되는 것은 어제를 알지 못하고 내일 또한 보이지 않기 때문일 터이다. ‘아무 날’의 시간 위에서 환하게 밝혀진 도시는 완전한 어둠, 텅빈 공허의 다른 얼굴일 뿐, 영원히 폐허일 ‘아무 날의 도시’는 시인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시인의 영토는 식민지. 관 속에 누워 자기 무덤의 비문碑文, 눈먼 자들에겐 해독되지 못할 비문非文을 쓴다.
시인에겐 식민지인 세상을 신용목 시인은 ‘바람’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해왔다. 그 바람이 주는 구체적인 고통의 실감과 바람 속에 단단히 박혀있는 ‘뼈’의 내력이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와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의 갈피를 채웠다. ‘뼈’의 내력을 보려 했기에 과거의 나날들은 ‘아무 날’일 수 없었고 거기서 전해져오는 자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며 그것을 받아적는 시인의 서정적인 문장에는 자연이 표상하는 조화롭고 화해로운 세계에 대한 어떤 향수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바람의 오랜 섭정에 나는 부역의 무리가 되어버렸다”는 시구에서 알 수 있듯, 이제 시인에게 세계는 어떠한 향수도 가능하지 않은 “시간의 유적지”이며 하여 시인이 쓰는 문장은 뒤늦게 원군을 청하는 “연기의 문장”일 뿐이다.(「적국敵國의 가을」) <아무 날의 도시>는 꺼져버린 불꽃, 어둠, 무덤, 폐허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다 타버린 잿더미에서 허공 속으로 간신히 피어오르는 연기가 바로 시인의 문장이며 향수했던 세계의 희미한 흔적이다.
우럭이 관 속에 누워 있다
몇 마리 우럭들, 우럭의 영혼으로 헤엄친다 산 것들이 죽은 것의 영혼인 물속
연기의 문장으로 맴을 돈다
한생이 무덤 속이었던 우럭
물속에서 타 죽은 우럭
나도 가끔 창밖을 본다 철 지난 부음처럼 낙엽은 날아와 부딪치고 흘러내리는
손자국, 한 칸씩 허공은 투명하게 질러놓은 관짝들이다
가을은 눈부시게 출렁이는 공동묘지
―「나도 가끔 유리에 손자국을 남긴다」 부분
‘연기煙氣’는 한편 시인의 존재론이기도 하다. 신용목 시인은 처음부터 부유하는 주변부 삶에 눈길을 주었고 이제 폐허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연기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식민지인 세상에서 역모를 꿈꾸었으나 실패하였으며 뜨거운 불꽃이 심장을 뛰게 했으나 심장은 까맣게 타버리고 연기의 형태로만 남아 있다. 그러니 수족관 속에 있는 우럭을 보고 “우럭이 관 속에 누워 있다”고 쓸 수밖에.(「나도 가끔 유리에 손자국을 남긴다」) 묘지와도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관 속에 누워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다. 하여 우럭이 “연기의 문장으로 맴을” 도는 것처럼, “나도 가끔 유리에 손자국을” 남기는 것. “인근 재개발 문 없는 노장에서” “벽돌 하나를 집어” 드는 행위가 유리에 남기는 손자국처럼 미약하고도 희미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 너무나 패배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시인이 보기엔 그것이 살아가는 일 자체이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여태 오지 않은 것들은 결국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그대로인 기다림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라고 쓸 때, “나는/ 비겁하니까”라고 시인이 말할 때(「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그 문장을 패배적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너덜거리는 그림자를 달고 폭우 지나간 창틀 유리의 안쪽을 닦는 자”(「물의 도감」)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 ‘나’에게 주어진 세계는 창틀 안쪽의 것이며 창은 여태까지 열리지 않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결국 열리지 않을 그런 것인데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용하고도 미약한, “창틀 유리의 안쪽”을 닦는 일이다. 수족관처럼 닫혀 있는 세상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으며 “이제부터 나는 뒷걸음질로만 앞으로 나갈 수 있으므로” 무용하고도 미약한 일이라도 해야 한다, 아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시인이 말하는 ‘연기’의 존재론일 터이다. 연기의 희미한 움직임이 곧 연기의 살아있음의 상태인 것처럼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창틀 유리의 안쪽을 닦는” 것과 같은 행위 자체가 살아있음의 상태일 뿐, 그것을 두고 비관적이라거나 저항적이라는 의미를 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미약한 존재로 살아있을 뿐이지만, 살아있음이 부끄럽고 치욕스럽지만, 어떻든 살아가는 것은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때로 역모를 꿈꾸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아무리 피워 올려도 구름이 되지 못하는 연기의 역사 그러나 인간이라는 거푸집에서 뜨거운 쇳물로 끓고 있는 피를” 가진 것이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죽은 자의 노래로부터」) 뜨겁게 불탔던 시간이 있었기에 연기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피가 끓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아무 날의 도시>에 실린 「웃을 수도 울 수도 있지만」, 「맹아이며 농아인」, 「우주의 저수지」와 같은 시들에서, 반으로 접어 펼쳤을 때 양쪽이 대칭을 이루는 데칼코마니 기법과 같은 형식들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의미상 대조를 이루는 단어가 서로 대구를 이룬다. 제목 자체도 “웃을 수도 울 수도 있지만”이지만 그 구절을 중심으로 “어둠에 걸어두고 온 나에게 전할 사과를 딴다”와 “빛에게 씌워두고 온 당신에게 보낼 사과를 싼다”가 포개진다. 또 시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이 대구를 이룬다.
어둠은 어쩌다 사지를 잃었을까 사방을 더듬어도 몸통만 둥글다
굴릴 수도 던질 수도 있지만
익으면 꼭지가 환하게 타지,
나는 불빛을 그렇게 믿는다 모든 흙이 벽돌이 되거나 타일이 되거나 기와가 된 이후의 폐허
(…)
불빛은 어쩌다 가죽을 잃었을까 사지를 껴안아도 허공만 환하다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있지만
익으면 밑동이 까맣게 타지,
나는 어둠을 그렇게 믿는다 모든 집이 무덤이 되거나 유적이 되거나 기록이 된 이후의 폐허
―「웃을 수도 울 수도 있지만」 부분
이러한 구조는 시의 형식미를 더해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시인의 세계관을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로 든 다른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둠-불빛, 밤-낮, 처음-끝, 사랑-증오, 생명-죽음, 자장가-장송곡 등 의미상 대조를 이루는 것들이 거울에 비쳐진 상처럼 마주보고 있는 형식은, 우주 만물 또한 양가적인 두 의미를 모두 품고 있으며 그러한 존재가 거하고 있는 우주 또한 그러하다는 시인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동양적 세계관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신용목 시인은 우주 만물의 본질이 그러하다기보다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시간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현 상태는 비가시적으로 누적되어온 시간의 결을 품고 있으며, 그러한 겹겹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죽음은 생명을, 끝은 처음을 품을 수 있다고 시인의 문장은 말한다. 물론 폐허인 세계의 완벽한 어둠 속에서 ‘사랑’이거나 ‘불빛’과 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문장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신용목 시인이 때로 비문처럼 보이기도 하는 복문들을 쓰면서 이미지를 정교하게 직조하여 펼쳐 보여주는 것은,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품고 있는, 누적된 시간의 결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두꺼운 책은 언제나 반으로 펼쳐져 있다”고 한다면(「그 숲의 비밀」), 볼 수 있는 현재의 페이지 이면에 쌓여있는 무수한 페이지의 누적층이 시인의 문장에는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이 ‘연기의 문장’으로서의 시론일 터이다. 연기 또한 장작과 불꽃과 공기의 모든 요소들을 품고 있듯이 ‘지금-여기’의 폐허는 “모든 집이 무덤이 되거나 유적이 되거나 기록이 된 이후의 폐허”이므로 폐허를 말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언어와 정교하게 다듬어진 이미지가 필요했던 것이리라. 그러므로 시인이 연기에서 불꽃을, 어둠 속에서 불빛을 본다고 해서, 시인이 실감하는 고통의 무게가 덜어지거나 깊고 깊은 자괴감과 우울의 농도가 엷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용목 시인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어떤 출구를 발견하기보다는 더욱 더 슬프고 절망적인 이미지를 주조하기 위해 시를 쓴다. 이는 물론 세계의 실상이 그러하기 때문이거니와 폐허를 폐허로서 고통스럽게 감내해야만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반으로 접혀 펼쳐지면서 폐허 이후의 나머지 반의 시간들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날의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모두 “눈먼 자”이다. “가라앉은 대륙의 지도”가 보이지 않으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으므로(「얼굴의 고고학」), ‘지금-여기’는 눈먼 자들이 살아가는 ‘아무 날의 도시’가 된다. 펼쳐진 책의 층층의 겹들을 읽을 수 없으니 앞으로 펼쳐질 페이지들도 보이지 않는 것. 그러니 어제이거나 오늘이거나, 혹은 내일일지라도 모두 ‘아무 날’일 수밖에. 시인은 층층의 겹을 읽어 비문처럼 보이는 복문을 쓰고 겹쳐진 이미지를 펼쳐 보여주려 하지만 시인의 시도 또한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여 시인에게도 이곳은 ‘아무 날의 도시’이며 다 타버린 잿더미이며 참담한 절망이다. <아무 날의 도시>는 시인의 말할 수 없는 절망을 쓴 비문碑文 혹은 비문非文이다.
차성연∙서울 출생. 2010년도 <세계일보>로 등단. 경희대에서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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