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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책크리틱/허희|오빠와 춤을-신동옥 시집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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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리틱
허희|오빠와 춤을-신동옥 시집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동경에서 졸하기 반년 전 이상李箱은 「여동생 김옥희에게—세상 오빠들도 보시오」라는 서간을 ≪중앙≫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의 누이는 가출하여 연인인 K와 함께 북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자기를 포함한 삼남매를 “불효자식”이라고 칭하면서도,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을 그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덧붙인다. 이 역접의 문장은 ‘모더니스트 이상’의 것이다. 반면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여동생의 장래를 축복하는, “너를 사랑하는 큰오빠 쓴다.”라는 결어는 ‘장남 김해경’의 발화이다.
김기림을 수신인으로 하는 여러 편지에서 스스로 ‘이상’임을 주지하던 고집스러운 자의식을 염두에 둘 때, 기꺼이 ‘오빠’를 자인하는 그의 모습은 기묘하게 느껴진다. 집요하게 ‘나’를 궁구하는 근대적 주체가 가족 관계에 의해 규정된 ‘역할’을 선택적으로나마 수용하기 때문이다. 아들이기는 거부하면서도 오빠임을 긍정하는 아래의 시들이 있어,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로의 첫걸음을 이상 ‧ 김해경의 글로 인유하여 내딛었다.
누이, 잠옷을 마저 벗고 이마를 쓰다듬도록 질끈 눈감았지
손샅을 오므렸다 폈다 머리카락을 쓸고 볼을 매만지는 사이
포근한 그림자 이불 그늘의 빙점
부끄러운 몸짓으로 서로가 서로를 생식하는
부르튼 종아리에 돋아나는 실핏줄을 마저 닦는
—「동복同腹」 부분
누인
더러운 입맞춤이 버린 배를 찢고 태어났다. 처마와 서까래
담벼락은 이상하리만치 식물적인 퇴락을 거듭했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익숙해간 누인 이따금
따뜻한 창문 너머 낮게 뻗은 뒤란
어딘가
비밀한 삶을 식재植栽하리라
다짐하는 것인데
—「이복異腹」 부분
‘누나’와 ‘여동생’이 일상어로 쓰인다면, 본래 ‘누이’는 노스탤지어의 정감을 환기하는 시어였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와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송수권, 「산문에 기대어」)와 같은 시들을 떠올려보라. 그러나 “국문학사는 역겨워 그곳으로 돌아갈 순 없어.”(「위경僞經」)라는 선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의 ‘누이’는 한국시의 전통적인 계보에 기입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동복」의 누이는 ‘쓸고 만지는’ 촉각적인 에로스의 현현이다. 시기만 다를 뿐 공통의 장소에서 배태되어 출생했다는 점에서 동기同氣는 시원을 공유하는 극히 내밀한 사이다. 그러므로 성性이 다른 남매가 서로를 성애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흔히 ‘근친상간(금지)’은 부모와 자식 차원에서 논의되지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여 불가능한 이상적 합일에 이르려는 무의식의 기제에 근거한다면, 보다 정치하게 논구해야 하는 것은 ‘나와 (또 다른 나이기도 한) 누이’와의 상관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동복」의 주어가 “우리”인 한에서,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대화 장면에서, 이들은 구분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생식하는” 나와 누이는 근친상간이 아니라 애당초 불가분한 관계의 형식을 드러낸다.
「이복」의 누이는 “비밀의 삶”을 담지하는 ‘절반의 나’이다.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는 다른, “더러운 입맞춤이 버린 배를 찢고 태어”난 것은 누이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예기치 않은 운명”을 타고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에 대한 애정 안에서는 완벽하”다. 그러니까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소여는 방기한 채 이들은 「동복」의 사랑으로 차가운 “눈길을 헐어 이생을” 살고, 갈가리 찢기며 자신의 종말을 상상하는 와중에도 “서롤향해뻗는질기디질긴시선”을 교환한다. 부모에게 계승된 핏줄의 힘보다는 본질적인 하나였음이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에 침윤된 여러 비극적 형상들을 나락에서 최소한도로 지켜내는 것이다. 설령 “우린 ‘우리’를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스스로 앗아버렸습니다”(「1년 후의 개봉관」)라고 자괴할 지라도 복수로서의 나‘들’—우리이기에 가능한 역능이다.
지금까지 애써 시인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다. 한 권의 시집에 들끓고 있는 다성성을 작자의 것으로 환원하여 작품을 폐색하는 위험을 경계하려는 까닭이다. 작품으로서의 시와 창작자로서의 시인은 떼려야 뗄 수 없으나, 반드시 이와 유관하게 텍스트 분석과 해석을 행할 이유는 없다. 형식주의를 옹호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시를 차치하고 시인의 정신분석에만 몰두하는 글을 볼 때 비평의 허망함을 절감한 탓이다. 그렇지만 “가공할 가공한 누이들”(「몰일沒日」)을 빈번하게 호출하는 시인의 실제 가족사는 자세하게 알 필요가 없을지라도, 자전적인 시를 경유하여 짐작해 볼 수는 있으리라 믿는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의 좋은 시들은 대체로 ‘가족’ 서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할아버지‧아버지‧어머니‧삼촌이 등장하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 진술하는 「포역暴逆의 무리여, 번개의 섭리를 알고 있다」가 적확하게 해당한다. 아래의 인용은 여섯 쪽에 이르는 이 시의 전문 중에서 “당신들”을 상정하여 토로하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당신들의 고통과 그 고통의 질을 걱정하는 당신들은 결코 당신들의 고통의 원인인 그가 사라졌다는 것을 결국에는 고통의 그가 죽었고 고통이 떠났다는 것을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 당신들의 삶에서 결국은 빠져나갔고 당신들은 많은 것을 잊게 되리라는 것을, 당신들의 고통과 당신들의 그 고통의 질량과 무게 속에 당신들의 꿈을 가두기에는 당신들의 현실이 어떠한 편경偏傾에 함몰되는 것은 아닐까?
—「포역暴逆의 무리여, 번개의 섭리를 알고 있다」 부분
여기서 “당신들”은 “—싸가지 없는 근본 없는 새끼.”로 비하되는 시적 주체의 대립항처럼 보이지만, ‘나’를 객관화하여 아우르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의 “당신들”은 ‘나’ 혹은 ‘우리’로 치환하여 재독해야 한다. “당신들의 고통의 원인인 그”는 실상 ‘나’를 가장 처참한 상태로 내모는 통각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네 아비는 쓰레기라고.”, “나는 아버지가 싫다.”라는 언술에 따르면, ‘그’의 기표에 대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일 터이다. “우리는 고아야, 아무도 먹을 거 입을 거, 주지 않아”(「콜라 먹고 춤췄지」)라는 중얼거림도 끊임없이 부父를 상기하는 행위에 다름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누이’를 통한 시적 주체의 “오라비”(「첫, 월경하는 누이를 씻는 백야의 푸주한」) 되기는 가장인 ‘아비’의 부재를 대리하려는 책임감의 소산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술한대로 ‘나’는 ‘누이’의 보호자가 아닌 ‘우리’로서 존재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는데, “다정하자// 서로는/ 서로를/ 잉태하자/ 끝내 남은 다정함의 윤리로/ 임하자”(「무궁동無窮動 왈츠」)라는 언명이 바로 그러하다. “다정함”은 상투적인 술어가 되어버린 “윤리”를 수식하는 단순한 기능을 넘어 「동복」에서는 “생식”으로 제시되었던 “잉태”와 결부된다. 둘이 결합하여 하나를 낳는다는 탄생의 일반론은 배격되고, 둘은 서로를 품어 다시 둘로 갱신된다. 마치 다음의 전언처럼. “나의 윤무에 끼어들어 너 자신을 발명하라”(「친친」)
그렇지만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의 “윤무에 끼어들어” 함께 춤추기는 매우 어렵다. 가령 ‘왈츠’만 해도 이 시집에서는 한 쌍의 경쾌한 춤곡이라기보다 현란한 독무에 가까워서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용기를 가져라 나를 마음껏 분탕질하길……”(「역접逆接」)은 동무同舞하기를 주저하는 이들에 대한 독려이자 당부로 읽힌다. 이렇게 한 번 더 각오를 다지고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의 표제가 출처된 다음의 시를 향해 손을 건넨다.
나의 마당 비밀한 지도를 나는 읽을 수 없어 당분간은 네 안에 살기로 한다, 나의 마당에 자라는 수피 여자야, (…중략…) 그래 내가 사라지면 내 앗김은 고롱고롱 물이 되어 네게 흐르고 비로소 우리는 울울창창할 테다 나의 마당에서 뿌리까지 한데 엮인 겨드랑이에 사타구니에 새싹은 돋아, 돋는 싹에 이파리에 우리의 이름을 새기자 그러고는 상냥히 웅얼거리자 가을봄여름겨울 풋잠에 취해 나부끼자
여자야, 웃고 춤추고 여름하리라
―「수피 여자」 부분
‘나’에게는 나무의 껍질을 가리키는 수피가 여자로 받아들여져 “수피 여자”로 결합한다. 바꾸어 말하면 ‘나’에게 여자는 “비밀한 지도”를 간직한 “나의 마당”에서 잘 자랄 수 없는 말라버린 나무껍질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적 주체는 “내가 사라지면 내 앗김은 고롱고롱 물이 되어 네게 흐르고 비로소 우리는 울울창창할 할 테다”라면서 스스로를 삭제하는 답안을 도출해낸다. 일견 소멸로 귀결될 듯한 이 변화는, 놀랍게도 “새싹은 돋아, 돋는 싹에 이파리에 우리의 이름을 새기”는 새로운 생성으로 전환되어 “웃고 춤추고 여름하리라”라는 종결을 낳는다. ‘내’가 흘러들어 수피 여자는 나무껍질에서 나무가 되어, 웃기도 하고 춤을 추며 ‘열매(여름)’를 맺는 것이다. 이는 도처에 ‘죽음’이 산재해 있는 이 시집에서 “나는 살아 있고 살아 있음에도 삶은 계속되는가”(「혁명 전야를 향해 달리는 사마르칸트 기병대의 밀지」) 하는 실존적인 물음이 부단히 제기되는 연유이기도 하다.
시작을 이상의 서간으로 하였으니 이 시집으로의 마지막 걸음도 김기림에게 보낸 그의 편지 중 한 대목을 빌려 다가가기로 하자. 이상이 술회한다. “생, 그 가운데만 오직 무한한 기쁨이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이미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전락하고 만 자신을 굽어 살피면서 생에 대한 용기, 호기심, 이런 것이 날로 희박하여가는 것을 자각하오. 이것은 참 제도할 수 없는 비극이오!” 그에게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의 시인, 沃이 간명하게 답신한다. “안녕?/ 용기를 가져.”(「시인의 말」)
허희∙1984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12년 ≪세계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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