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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권두칼럼/장이지|‘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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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466회 작성일 14-03-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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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지|‘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꿈

 

 

 

  2013년 4월, ‘서울의 봄’은 행방이 묘연하다. 예년 같으면 윤중로의 벚꽃이 만개했을 텐데, 올해는 벚꽃 축제가 시작했음에도 개화가 시원치 않다는 전언이다. 실제로 여의도에 가보지는 못하고 뉴스로만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나 꽃구경을 다니는 팔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바깥 출입을 하는 날에는 오다가다 꽃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오던 터라 개화가 시원치 않다는 소식이 시국과 맞물려 우울함을 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꽃이야 때가 되면 피고 지는 것이니 그리 아쉬울 것도 우울할 것도 없지만, 김정은發 정국 경색이나 박근혜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은 생각하면 할수록 아쉽고 우울하다.

 

  이 듣기 싫은 뉴스를 텔레비전은 무한반복을 해댄다. 박근혜정부의 내각은 한 오십여 명쯤 낙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날마다 낙마 뉴스가 나온다.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낙마에 대한 뉴스가 안 나온 날을 좀 따져본다면 아마 경악과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북한 미사일 발사 ‘임박’은 또 며칠이나 지속되었는지 모르겠다. ‘임박’의 용례를 국립국어원은 다시 작성해야 할 형편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북한 미사일이니 전쟁이니 하는 소리를 틀어대니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종편 채널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탈북자 출신 게스트들을 동원하여 전쟁이 일어날 것인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인지 묻느라고 여념이 없다. 그런 콘셉트라면 차라리 무속인을 출연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대선을 분기점으로 소위 정치평론가라고 하는 새로운 지식인 유형이 등장하여 각종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성업 중이다. 이들은 매 시간 채널을 바꿔가면서 등장하여 텔레비전에 걸맞은 ‘서사’를 늘어놓는다. 이 ‘서사’들이 제법 정국을 좌우한다는 인상이 나에겐 강하게 남아 있다. 이들의 ‘서사’에 지난 대선도 휩쓸렸고, 야당들은 아직도 이 ‘서사’에 휩쓸린 채 몸을 추스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문가들이 이렇게 상황을 정리해주고 있으니 아마추어들은 정치의식이 자연히 높아지리라고 기대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스스로 상황을 통찰하는 기회가 줄어들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반성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사회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말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또 말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닌데도, SNS에서는 들은 풍월로 정치 이야기들을 하곤 한다. 그 담론의 장에서 오가는 이야기들도 아마추어로서의 ‘실감’과는 거리가 먼 ‘들은 풍월’이라는 점에서 왠지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텔레비전형 서사’와 ‘실감이 결여된 (서사의) 반복’ 사이에서 문학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나만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왠지 점점 시가 개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시가 현실을 다루든지 환상을 다루든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시의 이야기가 정말 소중한 이야기라는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딱히 리얼리즘의 복권을 위해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실이든 환상이든 그것이 어떤 ‘경험의 차이’를 보여줄 때, 독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보면서 공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시의 경험이 ‘정보의 차원’으로 변해간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그저 정보를 늘어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일이 잦아졌다. 물론 정보를 늘어놓는 방식도 하나의 스타일이 될 수 있고, 그런 스타일 중에는 「햄버거에 대한 명상」 같은 획기적인 작업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너나없이 서로 비슷한 작업들을 하고 있어서 시적인 다양성이 현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이다.

 

 

  ≪리토피아≫는 텔레비전의 평평한 모니터나 인터넷의 초평면처럼 매끄러운 이 세계에 조그만 스크래치를 만드는 일을 해오고 있다. 모든 것이 상업논리로 환원되고, 그것을 또 수월성이라는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리토피아≫는 이런 흐름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리토피아≫는 이질적인 이야기들이 서로 부딪치고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하고 이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모색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서민이 살아가기에는 지나치게 열악하다.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일어난 ‘동시 다발 폭탄 테러’도, 북한의 ‘미사일’도, 그런 점에서는 한없이 일상에 가깝다. 명예퇴직도 구조조정도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전쟁 같고 테러 같은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문학에 가까이 있는 입장에서도 이 ‘전쟁의 서사’, ‘테러의 서사’에 맞서 싸워나가지 않을 수 없다. 방금 ‘싸움’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쏘든 쏘지 않든, 세계의 어느 곳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거나, 우리의 가족이 갑자기 실직을 하거나 큰 병에 걸리더라도, 정부가 아무리 무능해도, 좋아하는 드라마가 종영하거나 우리 팀에 류현진 같은 에이스가 더 이상 없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리토피아≫가 통권 50호를 넘어 100호를 향해 나아갈 자세를 가다듬는 이 순간, 나는 ≪리토피아≫의 ‘꿈(문학의 유토피아)’이 다른 세계에 대한 꿈이 아닌 결국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한 사람들의 ‘꿈’이라는 점을 재확인해두고 싶다.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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