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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장이지|마을의 ‘정치’, 혹은 자연에 지지 않는 범부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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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장이지|마을의 ‘정치’, 혹은 자연에 지지 않는 범부의 지혜
비에도 지지 않고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도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언제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사 홉과
된장과 약간의 야채를 먹고
모든 일에 대하여
객관적 자세로
잘 보고 들으며 이해하고
그리고 잊지 않고
들의 소나무 숲 속의
작은 초가 오두막에 살면서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으면
가서 병을 돌봐 주고
서쪽에 지친 아낙네가 있으면
가서 볏단을 지어 나르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위로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사소하니까 그만 두라 말리고
가물 때에는 땀을 흘리고
냉해인 여름에는 허둥대며 걷고
사람들에게 얼간이라 불리고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의 동화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1932)를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스기이 기사부로杉井ギサブロー 감독의 아니메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2012)를 최근 우연히 보았다. 이하토브 숲의 소년 ‘부도리’가 자연의 힘—구체적으로는 냉해와 기근—에 의해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고, 마을의 농가로 내려와 농사를 돕지만 그마저 자연재해로 여의치 않게 되자, 이번에는 도시로 가서 ‘구보 대박사’를 만나고 이하토브 화산국의 기사가 되어 인공강우를 내리게 하는가 하면, 다시 냉해가 찾아오자 화산을 인위적으로 폭발시켜 대기의 탄소량을 증가시킴으로써 냉해에 맞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인위적인 폭발을 위해서 ‘부도리’는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매우 우울한 이야기였다.
이 아니메에는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시도 나오는데, 이 시가 이 아니메와 어울리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야 할 점들이 있다.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시는 대학생 때 제법 애송했던 기억이 있다. 특히 도입부의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더위에도 지지 않는”다고 하는 부분을 좋아했다. 그때에는 지지 않는다고 하는 ‘근성’이 마음에 들었다. 아직도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그 구절을 떠올리곤 하지만, 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긴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는 없다. 기껏해야 ‘비’나 ‘바람’이나 ‘눈’이나 ‘더위’를 간신히 견디는 것이 아마도 전부겠지만, 역시 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소한 일은 아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만들어가는 것도 이 자연과의 대결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에도 지지 않고」의 내레이터는 무욕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낙천적인 행동가다. 이 시 중반부의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하는 내레이터의 모습은 오지랖이 넓어보이는 면도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오가는 이 동선 자체가 산만해 보이는 탓도 있다. 그러나 이 동선 하나하나에 새겨진 ‘행위’는 인간 사회에서 지극히 중요한 것들의 열거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병을 다스리고, 상호부조하며, 갈등을 조정하는 일, 이런 것들이야말로 오늘날 모사가들이 하고 있는 현실 정치와는 구분되는 정치 본연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특히 이 시에서 이 행위들에는 “가서”라는 적극성이 수반되고 있다는 점도 기억되어야 한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넉살 좋게 참견을 하는 내레이터지만 그는 어엿한 실천가다.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비에도 지지 않고」의 소망은 일견 소박한 것도 정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사람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런 생각도 있을 수 있지만, 이 시의 내레이터는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실천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천가는 칭찬도 받지만 미움을 받기도 십상이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를 스스로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에도 지지 않고」에 그려진 삶은 어떤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것은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국가와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사회에 가까운 마을공동체 쪽에 더 근접한 것은 아닐까. 마을 사람들은 아주 친하니까 이 시의 내레이터를 종종 “얼간이” 같은 말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곤 하지만, 그가 진짜 바보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천재적인 사람인 것도 아니지만, 그는 언제나 “객관적 자세로” 매사를 잘 보고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부르주아적 근대주의자들이 계몽하려고 한 촌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미적 근대주의자들이 ‘축군畜群’이라고 부른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존재자들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간지奸智’가 있다. 이 현자들은 초야에 묻혀서 검소한 삶을 살고, 이웃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자연과 싸우며 그 귀퉁이에 사회를 이루어 사는 것이 행복으로 이어진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다.
「비에도 지지 않고」에 묘사된 것과 같은 삶을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고집할 수 있을까. 도시에서도 「비에도 지지 않고」의 내레이터는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할 수 있을까. 단지 마을공동체의 유대가 사라지고 단자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관계의 기회’마저 박탈해버리는 이 저속한 시대에 「비에도 지지 않고」에 그려진 삶의 방식은 다소 낭만적인 것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혹은 각종 스마트 기기로 ‘전뇌화電腦化’에 가까운 신체를 얻어가고 있는 21세기 신인류에게 몸과 몸으로 부대끼는 ‘유대’라는 전망은 아직도 유효한지 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령 신사회운동의 자장에서 새롭게 일어난—혹은 일어나고 있는—협동조합 운동과 같은 데서 「비에도 지지 않고」가 제시한 꿈의 흔적들을 조금은 되짚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다.
그건 그렇고 아니메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는 「비에도 지지 않고」의 전망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놀랐다. 원작에서도 ‘부도리’는 냉해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희생의 길을 선택하지만, 자기희생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동화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는 인간이 자연과 대결하면서 사회를 만들어왔다는 것, 그 동력은 ‘부도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보고 싶다. 그것이 이 동화가 ‘전기傳記’의 형식을 취한 이유라고도 할 수 있다. 전기에는 위인의 삶이 기록된다고 하는 것이 보통의 생각이지만, ‘부도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도 전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미야자와 겐지는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이 동화는 아니메로 만들어지기에는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지루한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도 없지 않다. 아무튼 아니메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는 ‘산화散花’와 같은 자기희생에 방점을 찍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아니메판의 인물들은 감정의 기복이 적고 슬픔을 잘 표현하지 않는 것도 신경이 쓰인다. 더욱이 이 아니메판의 ‘부도리’는 가족을 모두 잃은 외톨이다. 마치 이 아니메는 가족이 없는 외톨이기 때문에 더 마음 편하게 자기희생을 결심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잔인한 일이다. 아마도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의 사회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것을 어린이들에게 보이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다. 자연보호와 같은 표어는 당치 않고 주제 넘은 것이라고 어떤 철학자가 말하고 있듯이, 인간은 기껏해야 자연과 부대끼면서 살 수 있을 따름이다. ‘부도리’의 죽음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연을 이긴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메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는 전통사회의 유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3․11과 같은 국가 재난과 맞물리면서 개인을 국가공동체의 ‘이야기’ 안으로 회수해버린다. 일종의 ‘동원’이다. 물론 「비에도 지지 않고」에도 개인이나 프라이버시와 같은 것은 나오지 않지만 말이다.
‘동원’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도 아니메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와 같은 동원이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기는 하다. 지난 18대 대선 정국에서 극에 달했지만, 현실 정치에 대한 담론들이 연예 뉴스와 동렬에서 매일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으며, 이 엔터테인먼트화한 정치에서 소위 국민들은 눈을 뗄 수 없게 된 것이다. 엔터테인먼트화한 정치가 국민들을 동원하고 있다. 요즘 같아서는 나도 내 자신이 ‘정치 허무주의’로 귀착해버리지나 않을까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또 어딘가에 ‘동원’되는 ‘축군’이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동원’된 적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을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동원’되지 않는 지혜. 「비에도 지지 않고」는 요즘 나에게 ‘동원’되지 않는 지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미야자와 겐지가 자연재해와 싸우면서 사회를 만들어가는 시대의 노래로서 「비에도 지지 않고」를 썼지만, 나에게는 이 엔터테인먼트화한 정치로 사방이 막혀버린 인공자연의 악몽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 하는 문제가 일생일대의 난제로 목전에 있다. 「비에도 지지 않고」의 마음 편한 내레이터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마실이라도 다녀올지 모르지만 말이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연구서로 한국 초현실주의 시의 계보, 번역서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있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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