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50호(여름)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김윤정|「安重根の碑」를 통해 읽는 일본인의 정신․
페이지 정보

본문
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김윤정|「安重根の碑」를 통해 읽는 일본인의 정신․
안중근의 碑
안중근의 비석에
핏빛 노을이 비치고 있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
안중근의 비석 위를
불길한 소리를 내며 백조가 날아간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요
안중근의 비석 앞에서
‘반도의 아픔’을 견디는 이국의 시인이
무릎을 꿇고 한없이 기도하며 돌이 되어간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먼 나라의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찢겨진 아리랑의 노래를 부른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쓸쓸한 그림자 하나가
다리를 끌며
고향 마을로 돌아간다
아리 아리 아리랑
무수한 아리랑 고개에
동아시아의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쳐
아리 아리 아리랑
물매화풀이 하얗게 세차게 흔들리고…….
최근 일본의 아베신조安倍晉三 내각의 우경화 경향이 심각한 수위에 이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베 총리는 과거 일본의 식민정책이 침략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침략을 사과하는 내용의 무라야마 담화(1995)를 더 이상 계승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과거사를 전면 부정하고 있다. 이 연장선에서 그는 우리나라의 일본군 위안부를 모독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옹호하였으며, 독도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근래 경제성장을 계기로 자국내에 지지세력을 구축한 아베총리는 과거의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일본을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극우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제국주의 일본으로 인해 식민화의 길을 걸었던 우리로서는 이와 같은 일본의 광기 어린 강경주의를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 우리 근대시의 역사는 일제의 식민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저항하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 중 김소월의 「초혼招魂」이 일제에 의해 죽어가고 있던 우리의 민족혼을 되살리기 위한 처절한 절규였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김소월은 일제가 우리를 지배한 것이 단지 경제와 정치, 군사와 영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혼’의 차원에까지 이른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였던 바, 그의 시는 ‘혼’의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고투의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소월이 되살리고자 하였던 ‘혼’은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특히 학문 등의 공식적 영역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용어이다. 근대 이후 ‘혼’, ‘영혼’이라는 용어는 거의 금기시되어 오고 있다. 이는 정신이라든가 영혼으로 번역되는 영어의 ‘spirit’이 오늘날에도 서구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과 사뭇 다른 양상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근대화를 전수했던 일본의 경우 ‘혼’에 대한 개념은 우리처럼 경원시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마을 곳곳에 신사를 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은 영혼을 극도로 숭앙하는 국가이다. 그러한 일본이 우리나라에 근대를 들여올 때 근대는 계몽이고 우리의 것은 미몽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바탕으로 과거 우리의 종교와 문화를 너구리 사냥하듯 파괴하였던 것은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혼의 죽음은 이 지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 달리 일본에서의 혼은 일본식 신도神道인 샤머니즘의 비호와 함께 강건하게 계승된다.
일본에서 ‘혼’은 ‘영혼’과 ‘정신’의 범위 전체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일본의 신사神社는 많은 ‘영혼’들 가운데서 ‘정신’의 경지로 격상된 영혼에게 참배하는 시설이다. 즉 신사에서 참배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영향력이 인정된 영혼, 즉 신かみ카미에 해당된다. ‘혼’의 개념이 살아 통용되는 일본의 문화를 보면 그들이 간혹 한국의 무사武士를 신사에 모셔두는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이 어느 나라 인물이든 간에 숭배할 만한 ‘혼’이라면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신사를 짓는다.
‘안중근의 碑’는 아이자와 시로에 의하면,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이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일본인 간수였던 헌병이 안중근 의사의 인격에 감복하여 평생 소중히 간직했던 안중근의 유묵遺墨을 근간으로 세워진 비석이다. 시 「안중근의 碑」는 그러한 안중근의 비석을 발견하고 받았던 감동을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자와 시로는 김광림에게 보내는 시작 노트에서 “괜찮은 일본인도 있었다는 것에 안심하였다”고 적고 있다.
아이자와 시로의 말대로 일본 내에는 자국의 군국주의 노선을 비판하고 양심을 지키려는 지식인들이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세계시민정신의 측면에 서있는 이들의 합리주의 노선은 분명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괜찮은 일본인’이 단지 합리주의 정신만으로 형성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탐색을 요구한다. ‘괜찮은 일본인’이란 특히 ‘안중근’의 자민족을 위한 결사항전의 정신에 감복한 일본인이라면, 그것이 합리주의 정신이기보다 일본인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혼’ 숭배의 문화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으로 판단된다. 즉 자국의 지도자를 살해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을 숭앙하는 ‘괜찮은 일본인’은 많은 부분 안중근의 민족 ‘정신’을 기리는 자였을 것이다. 이 점은 그들에게 강렬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혼’의 문화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일본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아리랑’ 곡조를 배음으로 하여 슬픔의 어조를 띠고 있는 위의 시는 안중근의 비극적 운명과 우리 민족의 한을 중심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적 화자인 ‘이국의 시인’은 안중근의 죽음과 ‘먼 나라 여자들의 눈물’에 대해 최대한의 공감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거니와, 그는 ‘안중근의 비석’ 앞에서의 심회를 슬프고도 엄숙한 분위기로 전달하고 있다. 한편 시인이 끌어들이고 있는 색채 이미지와 자연의 배경물들은 자칫 안중근에 대한 관념적 서술로 이어질 수 있는 시에 긴장과 미학성을 부여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특히 시에서 ‘아리랑’이 주된 모티프로 사용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아리랑’은 연 갈이 때마다 반복적으로 사용됨에 따라 시 전체를 완성된 노래로서 이끌어가는 요인이 되고 있다. ‘아리랑’의 조음으로 시는 각 연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을 구축하여 통일된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랑’ 노래를 통해 안중근의 죽음은 ‘핏빛 노을’, ‘불길한 백조’와 어우러질 뿐만 아니라, ‘반도의 아픔’, ‘여자들의 눈물’, ‘동아시아의 거센 바람’과도 조응하게 된다. ‘아리랑’은 이 모든 시적 소재들을 하나로 뒤섞어 구슬프고도 질긴 가락으로 휘젓는다. ‘아리랑’의 독특한 가락에 의해 안중근과 민족과 아시아의 비극은 깊은 물결을 이룬다.
‘안중근의 비석’을 묘사하는 이국의 시인에게 ‘아리랑’ 곡조가 중첩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론 시인은 ‘아리랑’에서 전달되는 한과 설움의 가락과 안중근의 비극적 운명을 동일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그 이전에 오랜 세월 동안 각 지역에서 창조 전승되어 오고 있는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민요로서 민족혼을 상징하는 노래이다. 그저 우리의 대표 민요로서 알고 있던 ‘아리랑’이 그런데 최근 유네스코의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보면 ‘아리랑’의 창조적 동력이 과연 무엇일까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아리랑’의 뜻에 관하여는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아리랑’을 통해 우리 민족의 ‘마음 달래기’를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잘 알려져 있듯 슬픔과 한을 동기로 하고 있는 ‘아리랑’은 특유의 가락을 통해 이들 정서를 어우르고 구슬리며 면면한 생명력으로 이어놓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때문에 ‘아리랑’을 읊조리면서 우리 민족은 한으로부터 끈기로 이어지는 질긴 흐름에 몸을 맡기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에너지와 혼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리라.
이국의 시인이 ‘아리랑’에 배어있는 이러한 고유한 체험을 얼마만큼 이해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인은 충분히 ‘아리랑’을 우리 민족혼의 상징으로 전유하였을 터이다. 그는 ‘아리랑’에서 울리는 한과 슬픔에 연민하였을 것이고 ‘아리랑’ 가락이 빚어내는 질긴 생명력에 공감하였을 것이다. 또한 시인은 ‘아리랑’을 통해 안중근의 한이 깊은 울림으로 승화되길 바랬을 것이다. 이국의 시인에게 ‘아리랑’은 곧 한국 민족의 고유한 영혼이자 정신으로 비춰줬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안중근의 비석’ 앞에 놓인 시인이 왜 ‘아리랑’을 떠올렸는지에 대해 짐작케 해준다. 시인은 안중근의 비석에서 혼과 정신을 끌어내 읽고자 하였던 것이다.
‘혼’은 여전히 일본 문화의 큰 부분이자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혼’을 통해 인격과 정신을 다듬어가며 ‘혼’을 통해 생활과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이러한 습속에서 경제나 정치도 예외일 수 없다. 우경화와 군국주의는 일본인 고유의 혼이 강력히 팽창하는 시점에 나타나는 광적 현상이다.
그들의 군국주의화가 혼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난감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혼’의 영역은 합리적 접근을 거부하는 영역이기에 그러하다. 중국, 한국과 외교적 갈등을 일으키고 미국의 유감을 자아내면서까지 그들이 무리수를 던지는 것을 보면 일본의 군국주의의 혼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문제적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자국내에서조차 그들의 군국주의화에 대한 비판의 시각이 일고 있는데, 과연 그들의 혼을 고요하게 순화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의문이다.
김윤정∙문학평론가. 2007년 ≪시현실≫로 등단. 저서에 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 문학비평과 시대정신 등. 강릉원주대 국문과 교수
- 이전글50호(여름)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이영주|실업失業, 실연失戀 14.03.23
- 다음글50호(여름)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장이지|마을의 ‘정치’, 혹은 자연에 지지 않는 범부의 지혜 14.03.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