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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이영주|실업失業, 실연失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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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이영주|실업失業, 실연失戀
영혼시장
해 질 무렵 늘 다니는 샛길에
다 익은 참억새 이삭이 살랑거리고 있다
귀가를 서두르는 내 발밑에
광고 한 장이 엉겨 붙었다
‘영혼시장
영혼 팝니다‘
시장으로 가는 약도가 첨부되어 있다
흥미로워서 발길을 향했더니
길가에 작은 포장마차가 한 대
갓 없는 전구를 달고
노랗게 떠 있다
머리에 수건을 푹 뒤집어쓴 노인이
“아직 새파랗게 젊은데 영혼은 왜 필요한 거야?”
눈알을 굴리며 나를 노려본다
“아뇨, 이런 물건은 얼마 정도일까 해서요”
나는 허둥대며 대답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헛되지 않게 하려고
활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팔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노인이, 떠도는 영혼에게 밧줄을 걸어
데려오는 듯했다
생명력이 있는 영혼은 값이 비싸다고 한다
생존 나이에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이런 영혼이 좋아
회사를 일으켰다 금방 죽은 남자인데
이 꼴이 되었어도 의욕만만 해”
라며 에메랄드빛 영혼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그쪽의 작은 것은요?”
“이것은 안 돼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의 것이야
실업인지 실연이지 모르지만 인생을 살아갈 의욕이 없어서
반쯤 죽음에 들어가 있는 거야”
나는 두근거렸다
“주인은 알 수 있나요?”
“알지 이름을 부르면 돼
“주인의 이름을 부르면 꼼틀 움직여”
움직이면 어떻게 돼요?”
“주인이 요구하면 돌아가”
노인이 파고들 듯이 나를 꿰뚫어 본다
나는 비위를 맞추느라 웃어 주고서 포장마차를 떠났다
샛길을 도망치듯이 달리면서
나는 큰 소리로 내 이름을 외쳤다
죽은 사람은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 불가능의 영역이라면, 육체가 사라진 대상은 불가능의 이름을 얻고, 사랑 때문에 지옥에 갇혀 있는 우리는 어쩐지 안심이 된다. 만질 수 없고 만질 수 없다면 내 안에서 그 대상은 오히려 완벽해질 수 있다.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것 때문에 사랑을 향해 가는 내 영혼은 소멸하지 않으니까. “애인을 만나려고 묘지로 가는 사람을 보았다”는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은 이상하게 가슴을 친다. 전생의 애인도, 후생의 애인도 묘지에 있어서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죽어서 완벽해지는 존재란 무엇일까. 육체가 사라져서 더 풍성해지는 것은. 우리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인간에게는 만질 수 없지만 그 너머의 무엇이 있다는 믿음이 근원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무언가 극심하게 훼손되었다고 느껴질 때, 육체의 고통과는 다른 고통이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때, 우리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왜. 몸은 아프지 않은데, 무엇이 아픈가.
늘 다니던 길이었다. 해가 지고, 이 길에는 ‘다 익은 참억새 이삭이 살랑거리고 있다.’ 아주 조금씩 흔들리면서 이 길은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늘 다니던 길은 무료하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얼굴을 품고 있다. 늘 다니던 길은 늘 다녀도 알 수 없는 길. 생활도 그렇다. 평범하게 반복되고 있지만, 알 수 없다. 이런 생활은 왜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지. 한 번도 이 생활 안으로 영혼을 파는 가게의 광고가 들어오리라 생각해보지 못했다. 조용히 한쪽 구석에서 쉬고 있는 영혼을 불러낸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일.
노인은 영혼을 팔고 있다. 포장마차 안에서. ‘갓 없는 전구’가 달처럼 ‘노랗게 떠 있’는 포장마차. 노인은 도전적이다. 젊은 것이 웬 영혼을? 너는 너의 영혼을 불러내어서 그 안을 들어다보며 살아야 하는 생기 있는 젊은이다. 그런데 영혼을 사려고?
노인은 죽은 사람의 영혼에게 어울리는 육체를 찾아주는 매개체이다. ‘떠도는 영혼에게 밧줄을 걸어 데려’온다. 그러므로 투명한 영혼들을 귀중히 다루어야 한다. 죽고, 다시 살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한다. ‘의욕만만’ 한.
‘나’는 ‘실업인지 실연인지’ 알 수 없는 생활을 견디고 있다. 인간에게 가장 아름다운 업業은 사랑. 그 업業을 잃었다. 그 연戀을 잃었다.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은 절박하게도 떠나간다. 밥을 먹고 잠을 자기 위해 업業은 소중하다. 우리가 닿을 마지막 업業은 너를 사랑하는 것. 내가 손을 뻗으면 연戀은 다른 곳으로 떨어진다. 그 간극. 심연과도 같은. 구덩이를 들여다보면 검은 현기증이 인다. 깊어지는 것이 이렇게 어지러워지는 것이라면.
나는 죽음이라는 세계가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한쪽 발이 붙들려 있다. 빠져나가려고 하면 한쪽 다리는 점점 길어지고, 긴 다리와 짧은 다리가 교차하면서 시간을 걸어간다. 아주 작은 불구는 아주 작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생존 나이와는 상관이 없다.
그렇게 크고 생생한 영혼들을 지나쳐 나는 작은 것을 바라본다. 저것은 어쩐지 남의 것 같지가 않다. 나는 매일 실연한다. 나는 매일 사랑하므로. 실패하기 때문에 내 사랑은 작게 조각나 있다. 얼룩처럼 퍼져가는 울음도 있다. 젖은 바닥에는 작은 무늬들이 불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다. 나는 매일 엎드려서 방바닥을 닦으며 실연한다. 흔적들. 내 손바닥에 묻어나는 영혼의 손금들처럼.
영혼을 사려는 나는 또 다시 실패한다. 내가 늘 다니던 샛길, 천천히 익숙하게 걸어서 도달하곤 했던 생활의 길, 그 길을 나는 도망치듯 달린다. 반쯤 죽어 있는 나를 노인의 손에서 발견해버린 것. 진짜 ‘주인’의 이름을 불러버리고 만 것이다. 큰 소리로, 나의 이름을.
어떤 시들은 이국의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을 뛰어 넘어 스며든다. 읽는 순간, 물처럼 함께 흘러가버린다.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나는 공중을 헤매고 있다. 영혼을 파는 포장마차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도망치고 싶은데.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안쪽으로 쑥 들어가 버린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바깥이 되고 만 것이다.
고통스러워서 아름답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버린 순간인가. 그 마음이 내 것이 된 순간인가. 이국의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번역되어서 내게 오기 때문에 그 고통과 환희는 두 배, 세 배가 된다. 이런 물결은 언어의 간극을 넘어서 오는 것이다. 그 작품이 훌륭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만난 것이다.
다이 요코는 1963년 도쿄에서 태어나 1990년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가 일본에서 얼마나 유명한 시인인지, 얼마나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나는 그저 그녀의 시를 우연히 발견해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 시집을 반복해서 다시 읽었을 뿐, 그녀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는 중요하지 않다.
서점의 한 귀퉁이에서, 아무도 몰래, 예상치 못한 시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러한 시도는 대부분 실망스러운 결과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를 두근거리게 했던 시들은 그저 그 자체로만 간직하고 있다. 시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시 안에서 살고 나온다. 나올 수 없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그 안에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녀의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검은 눈동자가 유난히 크다. 그런 사람은 울보, 라고 어른들이 말해주곤 했는데. 나는 그녀에 대한 묘한 감정을 느낀다. 사진 속의 표정은 슬프고 투명해 보인다. 그녀의 시집에 실린 다른 시들도 한결같이 슬프지만 따뜻한 감성을 보여준다. 이 별에 거주하는 거주자들이 서로를 향해 평안을 기원한다는 믿음, 그 믿음이 슬픔을 이겨나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일까.
한숨 잠의 뒤편에서 땀을 흘려 일상을 물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잠이 들었을 때, 그 뒤쪽에서 다시 눈을 뜨고 하루를 물들여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전하는 이 큰 구체의 앞과 뒤에서 언제나 누군가는 반드시 눈을 뜨고, 누군가는 잠들어 있습니다. 눈을 떴을 때 물들여진 공기는 다음 아침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잠과 눈뜸의 거대한 물결이 되어, 내일로, 10년 뒤로, 미래로 시간을 이어 나갑니다.
왜 우리는 ‘교대’해 가며 눈을 뜨고 잠자는 걸까요. 전부가 잠들지 않는 것은, 절반의 눈이 이 큰 구체의 평안을 주시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반대쪽에서 지금 몸을 눕히고 쉬고 있는 잠의, 무방비한 고요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과학의 눈으로 벗어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밤과 낮이 교대로 주어진 이 별의 거주자로서. ―시집 후기, 흰색으로 시작되어 흰색을 향해 중에서, 다이 요코
생활이 사랑을 증거할 수 있을까. 일상이 영혼을 보호할 수 있을까. 일상과 일탈은 서로를 품고 있다. 실업失業과 실연失戀. 사랑은 실패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살아 있는 인간의 것으로, 반쯤 죽음에 들어가 있는, 이 작은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시가 아닐까.
이영주∙1974년 출생. 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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