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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조혜진|소외된 자들에 대한 강한 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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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조혜진|소외된 자들에 대한 강한 연민
우리의 일용할 양식
-알레한드로 감보아를 위해
아침식사는 단숨에 들이켜는 것…… 묘지의 축축한 흙은
사랑하는 이의 피 냄새를 풍긴다.
겨울의 도시…… 맹렬하게 이끌려가는
달구지의 움직임은
꼼짝없이 굶을 때의 심정 같다.
문이라는 문은 모두 두드려
누가 되었든 간에 모든 이들의 안부를 묻고 싶다. 그러곤
가난한 이들이 나직하게 울고 있는 걸 보고
모두에게 갓 구운 신선한 빵 조각을 주고 싶다.
강렬한 빛줄기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 못이 뽑혀 자유로워진
성스러운 두 손으로
부자들의 포도밭을 약탈하고 싶다.
눈꺼풀이여, 부디 아침에 떠지지 말기를!
신이시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내 몸 속의 모든 뼈는 내 것이 아니다.
아마 내가 그걸 훔쳐왔는가 보다.
어쩌면 다른 이에게 할당되어 있던 것을
빼앗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든다,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커피를 다른 가난한 이가 마실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몹쓸 도둑이 된 기분…… 어디로 가야 하나?
이 추운 시간, 대지가
인간의 먼지 냄새를 머금은 서글픈 시간,
문이라는 문은 모두 두드려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리고 여기 내 마음속에 있는 화덕에서
갓 구운 신선한 빵 조각을 만들어주고 싶다.
페루 출신인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1892∼1938)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다.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인생의 굴곡들을 경험하는 것처럼 나 또한 인생의 가장 큰 부침을 겪던 시절이었다. 경제적 몰락 때문에 6명의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고, 그 와중에 중병에 걸리신 아버지는 막내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당신의 병원비로 쓸 수 없다며 한사코 병원에 가시길 거부하시다 돌아가시기 일보직전이었던 때였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먹는 따뜻한 밥상에 대한 그리움, 자신의 비루한 몸을 누일 변변한 공간 하나 없는 서글픔, 사랑하는 가족이 병으로 죽어가도 가난 때문에 병원에 갈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해 암담하고 외롭던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접한 바예호의 시는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고, 섬세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 글에서도 바예호의 인생 역정과 가난에 대해, 가난한 이들에 대해 느낀 유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바예호의 문학사적 위치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세사르 바예호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처럼 라틴아메리카 현대시의 흐름을 바꾼 거장으로 평가받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바예호는 아방가르드가 라틴아메리카에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전부터 시어를 개혁하느라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한 독자적인 시인이고, 그의 시어 개혁은 스페인어로 쓴 시의 시적 표현의 지평선을 최대로 넓혔다. 그는 주로 시를 썼으나 소설, 희곡도 집필하였고 이러한 작품들도 수작秀作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바예호는 페루 북부 안데스 산맥에 있는 광산마을에서 11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원주민의 피가 흐르는 메스티소였다. 가톨릭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으며, 동시에 안데스 원주민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바예호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 1909~1910년 의대와 문과대에 입학하나 경제적 사정 때문에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이과대에 입학했으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광산, 사탕수수 농장, 학교 등 다양한 장소에서 숱한 직업들을 전전했다. 일평생 겪은 가난, 가난에 맞선 투쟁은 그의 평생의 화두와 세계관을 규정지었다. 아울러, 그의 삶 전체를 뒤흔든 결정적 사건으로 화재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오해를 받고 3달간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한 경험을 꼽을 수 있다.
1923년부터 신문사의 비상근 통신원으로 일하며 파리로 이주했고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러 차례 오갔다. 1927년에는 마르크시즘에 심취했고 1928~1929년에는 소비에트 연합을 방문했다. 소련을 여행했다는 이유로 그는 1930년 파리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그는 일평생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었으며 공산주의를 통한 사회 정의 구현을 희구했다. 공산주의 이념을 구현하고 스페인을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구해내고자 바예호는 스페인 내전에서 적극적으로 투쟁했고, 스페인 내전을 자신의 시에 적극적으로 담아내며 사회 개혁에 열정을 쏟았다. 스페인과 소련을 오가며 지내다 1932년 파리 영주권을 얻어 정착하였으나 1938년 폐결핵으로 이역만리 파리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흰 돌 위에 검은 돌」이라는 시에서 시인 자신이 예언한 것처럼 ‘어느 가을, 비 오는 목요일’에 말이다.
45년이라는 그의 짧은 인생은 가난과 투쟁, 전투, 감옥살이와 병고로 점철되었다. 삶이 고난과 아픔뿐이었던 만큼 고향인 안데스 속의 자연, 형제자매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 잃어버린 순수, 어머니, 사랑, 정의, 인간다움에 대한 향수와 열망이 지대했다. 그는 자신의 빈곤뿐만 아니라 타인의 빈곤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견지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유독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 대한 강한 유대와 연민, 인간애를 드러내고, 삶의 신산함을 한탄하기도 한다.
특히 바예호의 시에서는 식사 같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대개 배고픔과 연관되어 있다. 이 시에서도 “아침식사는 단숨에 들이켜는 것”으로 제시된다. 즉, 배부르고 풍성하게 먹는 든든한 식사가 아니라 한 번에 들이켜고 말 정도로 먹을 것이 별로 없는, 단출하기 짝이 없는 식사다. 이런 허기짐은 신체적인 배고픔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죽음, 피, 차가움이라는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정서적인 공허함을 드러낸다. 그러니 “맹렬하게 이끌려가는 달구지”처럼, 일견 굶주림과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사물을 보면서 “꼼짝없이 굶을 때”와 같은 처연하고 서글픈 감정을 느끼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듯 배고픔으로 인한 참담함과 슬픔은 「불행한 만찬」의 “우리는 너무도 많이 식탁에 앉아 쓰라림을 삼켰다. 배가 고파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우는 어린아이처럼”, “언제쯤에나 우리는 아침을 거르지 않고 서로를 마주할 수 있을까” 같은 구절과 「한 사람이 어깨에 빵을 지고 지나간다」 같은 다수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삶이 너무나 고달픈 나머지 화자는 “눈꺼풀이여, 부디 아침에 떠지지 말기를!”이라고 부르짖으며 죽음을 갈구하기도 한다.
그나마 비루한 아침식사마저도 ‘나’만 한 것 같아서 화자는 마음이 편치 않다. 죄책감 때문에 자신이 먹은 음식의 양분으로 형성된 뼈들이 제 것 같지 않고 죄다 남의 것을 빼앗아온 것만 같다. 가난한 다른 이가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을 도둑질했다는 죄책감은 결국 자기 존재에 대한 죄책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는 죄책감이나 염세주의에 매몰되는 대신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 대한 연대감과 연민을 표현한다.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누가 되었건 간에 모든 이들에게 안부를 물으며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들여다보고 싶고, 용서를 구하고 싶고, 갓 구운 따끈따끈한 빵을 모두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그들의 배고픔과 슬픔을 달래주고 싶다.
바예호는 평생 가난과 인종차별에 시달리면서 자신이 사회 밑바닥 계층과 가깝다고 느꼈고 그러한 연대감은 이 시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나의 빈곤뿐만 아니라 타인의 빈곤에 이토록 강한 유대를 느낀 바예호가 원시공산사회를 열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근본적인 요인은, 극소수의 백인이 정치권력과 국가 경제권을 장악하고 대다수의 원주민들은 가난으로 신음하는 조국 페루의 사회구조라고 할 수 있다. 페루는 원주민이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나라고,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국가 중 원주민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고위관직은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부유층, 유명 인사들도 백인 일색이다. 더구나 라틴아메리카의 백인들은 자국의 메스티소나 원주민과 동질감, 유대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유럽의 백인들과 더 일체감을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상류 지배층인 백인 세계와 피지배층인 메스티소, 원주민 세계라는 이중사회구조 속에서 바예호는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을 처절하게 경험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사회구조적인 모순은 바예호가 사망한 지 70여 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거의 변함이 없다.
위 시의 한국어 번역은 스페인어 원문을 바탕으로 하였다. 부분적으로 영어본과 차이를 보이는 곳이 있음을 밝혀둔다.
조혜진∙번역가. 어느 도망친 노예의 일생(공역), 침대에서 바라본 아르헨티나(공역), 2012 라틴아메리카 이슈(공역). 고려대학교 국제어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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