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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연작장시/강우식/마추픽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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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964회 작성일 14-05-01 19:26

본문

강우식

마추픽추

 

 

10.

꽃이라고 다 같은 꽃이랴.

싹눈 트듯 잎 필 때는 모두가

아주 여리고 여린 연초록이더라도

햇볕과 비바람 속에 시달리다 보면

연초록도 진초록으로 독기 서리지 않으리.

피는 꽃도 있으면 지는 꽃도 있으리.

사람도 그와 같아서

좁쌀에 뒤웅박 파는 사랑 눈 떠

빗나간 사랑이 죄라 손가락질하면

이 어찌 할 수 없는 사랑의 죄가 죄라면

누군들 달게 받지 않으리.

한 이름 없는 풀포기처럼

둘이서 몸과 마음을 섞으며 나눈

하룻밤 은밀한 베갯밑송사에도

만리장성을 쌓았다 허물듯이

어찌 한 생애의 긴긴 약속이 없었으리.

어찌 뱉어서는 안 되는 말도 없었으리.

픽추가 귓속말로 마추에게 뱉은

동백꽃 생피의 목 살점

뚝뚝 떨어지듯 죄가 되는 말

태양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아무리 별들만

무성한 말을 남발하는 밤이더라도

토네이도였다.

마추의 가슴속 태양신을 죽이고

마침내 마추가 픽추의 태양신이 되는

밤의 말씀이었다.

거대한 선인장이 통째로 뽑히는

회오리바람이었다.

돌아버릴 것 같은 돌개바람이었다.

입 밖에 내기가 무섭고 두렵지만

믿었던 하늘이 무너지고 다시 가슴에

마추픽추의 거대한 산을 신전으로 세우는

거역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열 개의 생손발톱이 다 뽑혀 절규하는

형틀에 매인 몸이 되더라도

누가 이끌었는지도

무슨 귀신에 홀렸는지도 모르지만

마추는 속마음의 태양신을 죽였다.

그 광란의 사랑에 목매다는

이미 잉카이기를 거부한 몸짓의 잉카였다.

바람이 불지 않더라도

스스로 바람을 만들고 흔들리는 꽃이 있듯이

천만만 잉카가 죄라 손가락질 하더라도

그 손가락을 빨며 거역의 정신으로

온몸을 던지며 절대의 벽 앞에서

거역과 반항의 정신으로 살다간 자유인이 되었었다.

어느 시대인들 이런 사람 없었으랴만

마추와 픽추의 빗나간 사랑은

거역하는 마추꽃이었고

반항하는 픽추꽃이 되었다.

 

11.

뱀들이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동면하던 봄이 깬다. 안데스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도

꿈틀꿈틀 흐르고 모든 사물들을 몸을 부풀러

초록잎 같은 사랑을 틔우려 몸살을 한다.

깨어난 사랑이 벌거숭이로 덩실덩실 탈춤을 춘다.

율동이다. 잉카의 남자들은 페루드란스였다.

뒤에서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여자를 밀착시키고 돌기둥을 박았다.

마주보는 충돌이 아니라

일직선으로 같이 흘러가는 물결이었다.

짐승 같은 원시본능이 춤이 됐다.

사랑하는데 얼굴을 모르면 어떠냐.

얼굴은 보면서부터 죄가 생긴다.

사랑은 탈이다. 탈을 쓰면 아버지도,

탈을 쓰면 어머니도...

탈을 쓰면 죄도 부끄러움도 없어진다.

탈을 쓰면 모든 일들이 나의 일이 아니고

가면의 타자가 된다.

세상 어디에서든 타자가 된다.

가면을 쓰지 말자면서 가면을 쓰게 된다.

사랑하는데 이름을 모르면 어떠냐.

이름을 기억하면 사랑이 지워지지 않는다.

각인되는 사랑은 형벌이다.

물처럼 흘러야 새로운 물이 들어온다.

사랑은 다 소모해야

새로운 공간이 생기고 찾아오는 것이다.

오늘 하루 이 순간 다 소진하면

내일 또 사랑은 찾아오고 할 수 있으리라.

내일 태양이 뜨듯이 신은 사랑을 주시리라.

사랑에 사랑만 있으면 되었지.

뭐가 필요하냐. 사랑에 행위만,

즐거운 행위만 있으면 되었지 뭐가 필요하냐.

페루드란스처럼 꿈틀대는 쾌락이여.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사랑에 얽매이고 말았구나.

너는 사랑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구나. 갇혀서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갈구하며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중독자가 되었구나.

이어지는 밤이 깊으면 따라가는 낮도 깊으리라.

끝내는 탈을 쓰지 않고도 탈을 쓴 것 같은

사랑에 무지한 밤이 시작되었구나.

 

12.

지난 가을 꽃빛도 선명하던 야생화들이

내 삶의 끝에 본 마지막 꽃일 수가 있듯이

사랑도 이 시각이 지나고 나면

이승에서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는

쓸쓸하고 우울한 겨울을

이 고산지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고양이는 산소 결핍증도 없는지

겨울 내내 죽은 듯이 보이지 않던 고양이가

내 눈 앞에서 봄밤을 가르고 유유히 지난다.

고양이가 한 겨울을

무엇을 먹고 어떻게 지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인지 두 번인지 모르지만

암고양이는 살기위하여

사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므로

길고 긴 겨울에 심심하기도 한 암고양이는

어느 수고양이하고 붙어살았으리.

아니다. 겨울 내내 수고양이의 액을 먹고 살며

소리 소문도 없이 붙어서 새끼를 가졌다.

그 사랑은 겨울에 새끼를 배고 봄에 낳아

다시 새끼가 자라 다가오는 겨울을 견뎌내는

자연으로 터득한 야생의 섭리다.

고양이야, 고양이야 새끼를 밴 고양이야

너는 겨울에 새끼를 가져

모성으로 배불러 겨울을 따스하게 지낸 너는

이 밤 황제처럼 마추픽추를 거니누나.

나는 언제나 야생의 살기를 띤

너의 걸음이 조용한 혁명처럼 두렵구나.

마추와 픽추도 혁명처럼 뒤집고 엎으면서

사랑을 태웠어도

너처럼 갖고 싶었던 핏줄을 얻지 못했구나.

사랑은 쾌락만이 아니다.

사랑은 허무이더라도 위로가 필요하고

그러기위해 아기가 있어야 했다.

아기가 없다는 것은

신에게는 씻지 못할 죄다.

면죄부인 아기를 못 가진 마추와 픽추는

죽음의 사랑으로 치달았다.

고양이야 늬가 마추픽추에서 심장일랑 꺼내

태양의 제단에 바친 죽은 시신들을

썩지 않는 인육을 다 거둬 갔느냐.

콘도르가 채어가고 남긴

몇 백 년을 먹어도 남을 그 뼈와 살을

쥐도 새도 몰래 다 가져갔느냐.

소리 소문도 없이 인육을 먹는 고양이야.

인광燐光처럼 눈이 푸른 고양이야.

나는 네가 어디서 사는지 알지 못한다.

네가 사는 곳을 알면

내가 맡을 인육냄새 때문에 세상천지가

갑자기 송장 냄새로 진동할까봐 찾지 않는다.

안데스의 칠흑 같은 어둠에서

너는 황제처럼 자유롭구나.

어두워서 모든 사랑에서 자유롭구나.

비밀이 지켜지는 모든 음모에서 자유롭구나.

 

13.

마추와 픽추의 사랑은

서로가 하늘이고 땅이었다.

마추가 하늘이면 픽추는 땅

픽추가 하늘이면 마추는 땅

서로가 하늘하늘 서로가 땅땅했다.

마추가 땅에 심는 콩이면

픽추는 하늘로 자라는 콩이었고

픽추가 땅에 머리박는 콩이면

마추는 하늘로 머리 디밀은 콩이었다.

마추가 9이면 픽추는 6이고

픽추가 9이면 마추는 6이였다.

사랑을 할 때면 6이 9가 되고 9가 6이 되었다.

서로가 항문을 긴장시키고

사랑의 꼬리를 갈퀴로 만들어 걸려고 했다.

손가락이 걸리고 발가락이 물렸다.

옆으로도 6이 되고 9가 되었다. 6과 9의 사통팔달.

물에 뜨면 배, 하늘로 날면 비행기

마추가 픽추가 되고 픽추가 마추가 되었다.

이 기이한 놀이가 재미있었다.

누가 가르쳐 준 놀이도 아닌데 놀게 되는

놀이가 신기하고 자연스러웠다.

사랑은 끝없는 변신

변하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마추가 픽추가 되는 놀이는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요술이었다.

그 사랑은 콩 심은데 콩 나는 놀이긴 하지만

콩 심은데 콩이 나지 않기도 했다.

하나의 마추를 바라는 사랑놀이가

마추픽추의 달밤이 되기도 하고

마추를 닮은 마추와 픽추를 닮은 픽추가 아닌

다른 아이를 주기도 했다.

그런 아이라도 갖고 싶은,

그 아이는 데려온 아이다.

나 같은 아이면 어떠냐. 나는 나를 닮은 아이다.

마추와 픽추가 없는 나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빈 밭인 픽추다.

적도의 빗줄기도 소문뿐인 마추다.

나는 계단식 밭을 한 뙈기와

좋아라 옥수수 감자를 더 가질 수 있는 아이다.

이룰 수 없는 거짓인 줄 알면서도

이 기이하고 슬픈 놀음이 좋다는 듯이

사랑놀이를 하는 마추와 픽추여.

마추와 픽추는 마추와 픽추를 만들고

잉카는 잉카를 만든다고 하늘같이 믿는 슬픈 몸짓이다.

그런 잉카들이 마추와 픽추의 동네에 살며

마추와 픽추가 됐다. 마추픽추가 됐다.

불임의 잉카들이 불임이 안 되려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슨 짓인들 했던……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

불임의 다른 이름이다.

 

14.

세살 같은 사랑은 무섭더라.

무서운 자유더라.

세상의 모든 것들을 꽃 보듯이

탐나고 아름다운 것은 다 자기 것이더라.

남의 것 내 것이 없이

갖고 싶은 것은 다 내 것이더라.

사랑은 철모르는 독재더라.

마추는 픽추에게 자기가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해도 좋다고 했다.

아니 서로가 사랑을 찾아다녔다.

날카로운 가시와 경계가 없는 철조망이었다.

문밖을 나서면 누구에게 매인 누가

내 사랑이라는 그림자는 없었다.

사랑하는 순간 내 것이면 되었다.

세 살이어서 순수하면서도

세 살이어서 무서운 게 없더라.

세 살배기 사랑에 인 박이었을 때

사랑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갇히고 묶인 것이더라.

그림자처럼 떠나지 못하고

분신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사랑의 젖이 되더라. 감옥이 되더라.

마침내 저질러지고 갇힌 사랑은

죄짓지도 않았는데 죄인이 되어

목숨이 버려지더라.

목숨이 버려진 도시는 폐허로 남더라.

버려진 것들은

반드시 누군가가 거둬가더라.

 

강우식∙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호 水兄, 老平, 果山. 시집 사행시초(1974), 고려의 눈보라(1977),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1979), 물의 혼(1986), 설연집(1988), 어머니의 물감상자(1995), 바보산수(1999), 바보산수 가을 봄(2004) 발간. 시극집 벌거숭이 방문(1983), 시에세이집 세계의 명시를 찾아서(1994), 시론집 육감과 혼, 절망과 구원의 시학(1991), 한국분단시연구, 시연구서 한국 상진주의 시 연구 발간. 현대문학상(1975), 한국시인협회상(1985), 한국펜클럽문학상 시부문(1987), 성균문학상, 월탄문학상(2000) 수상.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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