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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집중조명/임재춘/페르시안 시계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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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춘
페르시안 시계 외 5편
석류가 벌어진 틈으로 빛이 스민다
조심스레 한 알씩 떼어낸 자리
완벽게 맞물려 돌아간다
시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음각으로 꽉 차게 벌어진 무늬
이맘광장 모스크 기도처, 한 벽을 그늘이
채우고 있다 촉각으로 만들어 놓은 장식 앞에
사람들 엎드려 기도하고 있다
천상을 향해 높이 올라간 모스크천정, 한 가운데
동그란 구멍에서 오후의 햇빛 쏟아지고 있다
그림자 조금씩 돌아가고 있다
방향 바꾸고 있다 기도의 등 위로 떨어지고 있다
빛살이 틈새에 꽃으로 피어난다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꽉 찬 기도의 시계가 채워지고 있다
몸속의 시계, 현재를 통과하고 있다
통과하는 몸속 불꽃이 아프다
고양이 친구
지하주차장을 가로질러 출구로 가는 길
부지런히 걷는데 앞에서 고양이 한 마리
눈이 딱 마주쳤다, 응시했으나 자세 바꾸지 않고
서로를 스쳐가는 순간의 정적이 읽혔다
찬바람이 쌩 달려드는
지상의 현관문을 피해
지하통로로 나가는 요 며칠 새
밖은 온통 하얀 눈이었다
눈보라 치는 한 겨울을
고양이도 지하에서 지내기로 한 모양
얼음장이 입구까지 넘나드는
바람막이 지하 일층
겨울 동안
안부가 궁금해진 시선이
주차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어색하지 않게 만나는 우리
어둠이 주위를 둘러쌌다, 부딪치는
눈동자만 서로 반짝였을 뿐
뒤태를 보이며 떠나는 추위
햇빛은 밖에서만 환하게 웃었다
노래하는 다리
이층으로 된 서른세 개의 다리, 위층 난간에 찻집을 만들어놓고 강물을 내려다보며 여유를 즐겼다는 외벽은 아라베스크무늬로 장식되어있다 회벽에 그려진 갈색, 벽돌색 무늬의 시오세 폴 다리*
우리는 거기에 꼭 앉으려했다, 노을을 보려했지만 물에 비치는 그림자는 없었다. 아래층 다리 밑에서 노래를 계속 부르는 한 남자, 다리 안쪽으로 돌아서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누군가 대취한 디오니소스라 불렀다
강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은 맨바닥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사막으로 스며들어가버렸다고도 하고 위쪽에 댐이 만들어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물에 비치던 아름다운 풍경은 사라지고 미친 듯, 한 남자의 울부짖는 노래만 들렸다
이제 유적이 되어버린, 물이 돌아올 기약 없는, 갈라진 노래만 파고드는 가슴속도 말라갔다
*이란, 이스파한 쟈안데 강의 다리.
세로토닌* 처방
세로토닌 투여가 필요하다니
멀리 보낼 겨울이란 진단
우울의 한기를 줄이려도
불안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두꺼운 옷을 걸치고
닫힌 대문에 서 있었다
다른 접근을 가로막는
무거운 침묵의 빗장에
세차게 밀고 들어오는 봄기운
걸쇠가 스스로 문을 연
눈부신 빛에
쏟아지는 봄잠은 어깨에
두툼한 숄을 드리워
쓸쓸한 표정을 덮어주었다
장미의 핏줄이
망원경속의 시선을 거둔다
무대에 올라선 배우처럼
희망이 기지개를 켠다
세로토닌에 기대 일어나는 하루
* 항우울증 약.
씨알크 언덕*
오늘 내가 밟고 있는 언덕 밑에
또 누군가
깔려있는지도 모른다
오래 되어 용도도 알 수 없는
꽉 막힌 두꺼운 벽들,
안에 빈 공간도 없고, 창문도 없이
계단처럼 올라갈 수 있을 뿐
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물을 흘려보냈을 좁은 도랑들이
죽 이어져 있다
만지면 부스러질 듯 뽀얀 남자의 뼈,
칠천 년 전, 그들의 집이었던
흙 지붕을 밟고 서서
히잡을 쓰고 있는 나는
저 아랫집에 살았었는지도 모른다
열 살 정도 여자아이
유목민을 따라
멀리 옮겨왔을지도 모른다
농사꾼 쟁기에 우연히 발견된 그
어디론가 떠나려던 야반도주를
지켜주려 이 언덕은
요즘 무너지는 것을 멈췄다
*카샨이라는 도시에 있는 언덕.
휴일광장
토요일 오후
광화문 세종대왕 앞에서
소리의 무리가 들썩거리네
목청이 쉰 소, 주먹을 불끈 쥔 돼지
멀리서 달려와 모자를 흔드는 말도 있네
광장은 넓은 몸을 다 내주고
잡혀가던 시절보다, 소리치는 시절이
필요하다고요, 무작정
상경해 희생자 구호 붙이고
최저단가를 올려줘, 죽는 것도 힘들지만
죽을 놈의 선택,
마스크로 입을 막고 어깨동무를 하고
발을 구르는 광화문광장, 젠~장
옆 빌딩에선 갑종甲種 인간의 웨딩마치
평화로움이 잘려버린
헐벗은 가로수, 겨울을 건너는 몸통들
구호를 앞세우고
가면들은 계속 몰려올 거야
세종대왕의 놀란 가슴
한숨 돌리는 월요일 아침
메아리로 남은 소지素地들
시작메모
시의 방향감각
언어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멈칫거린다. 어느 지점까지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 것인가?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어디에 다다르려 하는가, 사물과의 습관적인 소통을 멈추고 물음을 주는 답변들을 떠올리고 있다. 일상을 지배하는 습관은 대상의 마디들을 지각하는 발걸음을 어딘가에 찍는 것이다.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무언가는 구별하는 이미지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시, 다시 말은 살아서 달아나고 나는 쫓아가고자 기를 쓴다, 죽을 쑨다 주술을 읊조린다, 발자국을 따라 연애의 감정을 떠올린다. 거울은 많이 깨어질수록 빛이 사방으로 부서진다. 눈이 부신 아픔.
방충망에 붙은 매미가 시끄럽게 운다/나의 생각을 부숴버린다/너와 나의 경계가 소란하다/커피를 마시던 고요가 달아나버렸다/떨리는 배마디의 주름을 본다/조금 떨던 시간이/날아가 버린 자리/경계의 존재가 사라졌다/주위가 잠잠해지고/멀리서/다시 울린다/졸시 「매미」
가까이 다가왔다가 달아나는 것들을 잡으려 팔을 뻗어본다, 허공이다.
임재춘∙200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소금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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