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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집중조명/박혜연/갑골문자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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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갑골문자 외 5편
나의 말이 너의 귓가에 찬란히 쏟아지는 새의 목소리라면 처음 말을 배우던 시원의 아침을 새기는 뼈로 일어설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목소리가 되어줄 고운 말의 꿈과 가슴에 돋아날 이름들을 헤아리며 새벽별을 바라보던 어린 눈동자는 쉰 소리를 내는 도시의 뒤편에서 콜록이며 칠판을 두드리고 있다.
백묵 가루 하얗게 날리는 칠판 앞에 줄줄이 세워진 말은 제각각 걸어온 모양대로 흩날리다가 오늘 아침 맑은 해장국에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마음에 품은 말이 그대로 기도가 되지 못하고 굳건했던 약속의 말도 자고나면 물거품이 되는 지층 위의 소리 소리들, 나의 목소리는 또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을까.
너를 새기고 싶어, 소리치던 목소리는 어디로 흘러 가 있을까. 그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서던 밤, 괜찮다 괜찮다 등을 두드리던 목소리는 지금 어느 강을 건너고 있을까. 그 어떤 소리도 갖지 못한 채 후두염을 앓는 계절.
첫 울음처럼 모든 말은 존재를 깨우는가. 살갗에서 일어서는 선명한 금, 춤을 추듯 그 금은 아름다운 문양의 집을 만든다.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것들에게 날개의 문패를 달아주고 싶어. 처음 나를 호명하던 그 떨림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아침, 뼈 마디마디에서 너를 부르는 징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말의 척추들이 기지개를 켠다.
바다 별자리․2
당신의 삶도 우리 안에 갇힌 양식 도다리일 뿐이지요. 나도 그래요. 양식장 너머 바다의 꿈을 생각할 때면 나는 살고, 항생제가 투여될 때마다 나는 죽어요. 어머니, 당신을 만난다면 나를 인공수정 시킨 차가운 피를 모조리 뽑아 돌려주고 싶어요.
단지 양식우리가 바다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 어머니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슬퍼요. 나를 품었던 것이 뜨거운 형광 불빛이었는지 따뜻한 문장이었는지 궁금해질 때 가끔 바다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 별자리를 찾아요.
불꽃이 쏟아지는 사자자리,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병자리, 고집불통 전갈자리. 오른쪽으로 쏠린 도다리눈이어서일까요. 안드로메다 공주를 태우고 힘차게 달리는 검은 말 페가수스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요.
나도 페가수스처럼 달아나고 싶어요. 가짜 바다가 아닌 진짜 바다로 헤엄치고 싶어요. 꿈꾸는 것은 죄가 아니기에 그런 꿈을 꾸는 밤 혼자서 뜨거운 별들을 내 안의 도다리알처럼 수북수북 흘려보내요.
내 알들은 살려주세요, 어머니. 하늘이 아니라도 이 바다에 별처럼 뿌려주세요. 살아 반짝반짝 빛난다면, 그게 나의 별자리가 될 거에요. 그 중 몇 놈이 제 어미의 피를 묻는다면 그 바다 별자리를 자랑스럽게 가르쳐 주세요.
바다, 여수바다
뜨거운 바다에서 열꽃이 터져.
나는 자궁 깊숙이 숨은 빈 방에서 나팔을 불어.
양생의 단전을 지나 뜨거운 나의 아래
낮고 넓은 골반에 뿌리 내린 꽃숨 끌어올려
얼굴 발개지도록 나팔을 불어.
기억하지, 내 몸에서 처음 꽃이 터지던 날
어머니 그 꽃잎 곱게 받아
두툼한 책갈피 사이에 모셔 두었지.
딸아, 꽃 피웠으니 너도 꽃밭이다.
꽃씨 받아 싹틔울 귀하디귀한 꽃밭이다.
축복의 주술로 어머니
내 꽃밭 오래오래 쓸어 주셨지.
나는 꽃씨였다가 꽃이었다가
풍성한 꽃밭을 꿈꾸는 바다였다가,
밀물 들면 꿈의 해수면이 차오르고
썰물 지면 보름달을 품는 여수바다였다가,
내 꽃밭에 처음 꽃이 피던 그 날
나는 신의 나팔소리 들었어.
내 몸에서 터져 나오는 나팔소리 들었어.
맞울림 하는 내 몸 안에 바다가 있어.
그래, 나는 바다야.
나팔소리 울려 퍼질 때마다
만선의 붉은 깃발 단 배가 귀항하는
꽃밭이야, 꽃밭.
가장 오래 된 말
채 마르지 않은 말들이 동굴 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어요.
막 시원이 될 말을 그리고 돌아서는 사내의 얼굴이 환합니다.
그는 스스럼없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습니다.
아직 탄생하지 않은 말을 드디어 탄생시켰다는 기쁨
그녀와 뜨거운 포옹을 나눕니다.
여러 해 동안 사내가 흙가루에 동물 기름을 개어 그려 넣은
말들을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쓸어봅니다.
아, 손끝으로 전해지는 말, 말들
그렇게 기다리던 말들이 이렇게 손에 잡히다니요.
있어도 없는 존재이던 것들이 이렇게 생생하다니요.
들소, 사슴, 새, 곰, 해, 달, 별, 나, 그리고 너,
날개를 달고 입 밖으로 화르륵 날아오르는
어둠 속 웅크린 영혼들 오랫동안 기다려온 말들도
탄생의 기쁨에 더 크게 소리칩니다.
더 힘차게 솟구쳐 오릅니다.
세상에 막 도착한 말을 경배하며
사내는 뜨겁게뜨겁게 세상을 안습니다.
그 날 이후 말은 또 다른 말을 낳고, 낳아
그의 처음 말이 지금 가장 오래된 동굴이 된 것입니다.
새
때로는 나의 손이 둥지 없는 너의 잠을 스친다.
하늘을 얻는 대신 땅을 잃은
너의 고단한 하루를 떨리는 손으로 만진다.
젖은 날개 하나가 비에 반쯤 잠겨 있을 때
나의 손은 길게 흘러 들어가 날개에 잠긴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늘에 가 닿고 바람에 가 닿고
닿은 손은 다시 오래된 사원을 날아오르던
젖은 날개를 다독인다.
나의 손은 허공 속에서 허공을 어루만지며
공중에서만 사는 너의 잠에 가 닿는다.
매미
나무 등걸에 내 몸을 벗어 놓는다.
겨드랑이에 숨어있던 여름이 잠시 푸드득거린다.
모래처럼 부서지는 적멸을 예감했을까.
몸의 껍질이 사뭇 부드러워진다.
햇살이 몸의 주머니를 모두 뒤집어
오랜 먼지를 털어낸다.
노래가 빠져나간 자리마다
계절풍이 불어온다.
불어라, 불어라, 바람아
울기 위해서 나는 몸을 입었으니
울기 위해서 나는 몸을 벗는다.
시작메모
캥거루처럼
나는 주머니 안에서 나왔다. 태반이 없는 어미의 안쪽 주머니는 나를 오래도록 품지 못했다. 아직 배아 상태였던 나는 태고 적부터 유전된 피의 속삭임에 따라 움직였다. 눈도 뜨지 못한 채 생기다 만 앞발을 들어 젖내 나는 살 쪽을 움켜잡았다. 미세한 바람에도 요동치는 몸은 날개보다 가벼웠다. 한 호흡이 한 세상인 듯 여러 생을 걸쳐 어미의 바깥 주머니에 도착한 나는 비로소 날개를 접었다. 나는 최초 자궁 외 임신에 성공한 배아였다.
현실이라는 벽을 뛰어 넘어온 꿈 나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뒷다리에 힘을 길렀다. 뜨거운 피, 멀리 여우나 비단뱀 혹은 독수리의 날카로운 이빨이 보일 때면 다리에 힘이 풀리기도 했다. 하지만 주머니는 항상 몸 가까이에 있었고 순간적으로 힘이 솟았다. 끓는 피, 점차 힘이 실리는 꼬리는 뒷다리와 함께 크고 강해졌다. 시속을 뛰어넘어 달릴 때면 푸른 초원은 나의 책갈피가 되었다. 책갈피를 넘길 때마다 또 다른 세상이 돋아났다. 환호하는 피, 그쯤 내 배 아래 부분에도 작은 주머니가 생기고 어느 새 초원이 그 속에 들어와 푸른 인큐베이터를 만들고 있었다.
박혜연∙승주 출생. 2007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전남대학교평생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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