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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집중조명해설/백인덕|생生의 비의秘意, 시詩의 이면裏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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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해설
-박혜연의 시
백인덕|생生의 비의秘意, 시詩의 이면裏面
1.
무엇을 의도했던 간에, ‘시인’으로서의 ‘크기資質’이라고 쓰면 이런저런 비난성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대신에 ‘시의 바탕根幹’이라고 접근 각도를 달리하면 호평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난하다는 세평世評을 기대할 수 있다. 같은 말인데, 다르게 읽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필자의 판단으로는 최근의 우리시가 ‘시인(A)=시(B)’라는 등식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의의 여지가 많지만, 이러한 추세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한 가지씩만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A'를 물리적 개인으로 한정했을 때(실제 현상과는 전혀 무관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XX의 시‘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하고 또 물리적 실체로서의 ’그/그녀‘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부정적 측면은 ’생활(현실)/시작(이상)‘을 구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유령이 시를 쓰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이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시는 이 이 땅과는 무관한 무엇이 되고 만다. 그것이 ’가치‘가 있을까? 다음으로 긍정적 측면의 효과는 ’A=B’라는 관점을 거부할 때, 물리적 개인이거나 현실적 실체가 아닌 ‘시’로 재구된 ‘시인’, 혹은 추상적 ‘시인’에게서 비롯한 구체적 ‘시’, 나아가 ‘시’와 혼융된 ‘시인’의 초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결론은 간단하다. 이 글에서 ‘시인’이란 오직 ‘작품’을 통해 구성되어 실감을 부여받을 뿐, 수록작품들의 읽기가 끝났을 때 와해된다. 마찬가지로 필자가 본 ‘시인’도 이 글 안에서만 ‘생생’할 뿐,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동시대의 같은 ‘체계’안에서 같은 질감의 ‘언어’를 향유하고 있다는 점이 이 모든 곤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2.
박혜연 시인은 ‘몸(생)’과 ‘언어(시)’의 변증법적 인식의 심화, 확장을 ‘시인-자기’의 첫 장에 기입하려는 의도를 내보인다. 물론 이번에 접하게 된 작품들에 한정해서 말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변증법이란 ‘자각-성찰-지향’이 삼각형의 모습으로 ‘상승, 초월’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연쇄되는 사유방식이다. 따라서 이 글도 시인이 드러내는 그대로 ‘시의 근간’을 같은 방향에서 탐색하고자 한다.
당신의 삶도 우리 안에 갇힌 양식 도다리일 뿐이지요. 나도 그래요. 양식장 너머 바다의 꿈을 생각할 때면 나는 살고, 항생제가 투여될 때마다 나는 죽어요. 어머니, 당신을 만난다면 나를 인공수정 시킨 차가운 피를 모조리 뽑아 돌려주고 싶어요.
단지 양식우리가 바다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 어머니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슬퍼요. 나를 품었던 것이 뜨거운 형광 불빛이었는지 따뜻한 문장이었는지 궁금해질 때 가끔 바다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 별자리를 찾아요.
불꽃이 쏟아지는 사자자리,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병자리, 고집불통 전갈자리. 오른쪽으로 쏠린 도다리눈이어서일까요. 안드로메다 공주를 태우고 힘차게 달리는 검은 말 페가수스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요.
나도 페가수스처럼 달아나고 싶어요. 가짜 바다가 아닌 진짜 바다로 헤엄치고 싶어요. 꿈꾸는 것은 죄가 아니기에 그런 꿈을 꾸는 밤 혼자서 뜨거운 별들을 내 안의 도다리알처럼 수북수북 흘려보내요.
내 알들은 살려주세요, 어머니. 하늘이 아니라도 이 바다에 별처럼 뿌려주세요. 살아 반짝반짝 빛난다면, 그게 나의 별자리가 될 거에요. 그 중 몇 놈이 제 어미의 피를 묻는다면 그 바다 별자리를 자랑스럽게 가르쳐 주세요.
― 「바다 별자리·2」 전문
이 작품은 박혜연 시인의 시적 출발을 보여준다. 이분법적 구조, 그러니까 자기 삶의 현실(현실태)과 희망(가능태)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새기기보다는 뚜렷하게 대비시킴으로써 극적 효과를 빚어내고 있다. 현실이란 이런 상황이다. 나는 ‘인공수정’ 된 ‘우리 안에 갇힌 양식 도다리’, “나를 품었던 것이 뜨거운 형광 불빛이었는지 따뜻한 문장이었는지”를 궁금해 하는 그저 한 생명일 뿐이다. 그 이름은 ‘도다리’다. 그저 한쪽만을 바라볼 수 있게 태어난 생명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뭇 생명은 ‘자각의 계기’를 생성한다. 그것이 내적 자극인지, 외적 자극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단지 양식우리가 바다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 어머니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슬퍼요”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어떤 지적 생명체도 우주 전체를 사유하거나 포획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양식우리가 바다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어머니가 누구인지 기억할 수 없는 사실” 또한 이 땅에서 버려지는 숱한 생명들을 염두에 둘 때, 생 전체를 갈아엎을 만한 ‘자각의 계기’로 보기에는 미약하다. 오히려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안다는 것이 슬퍼요”라는 부분이다. ‘앎’이란 인식이다. 인식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감각적 인식에 만족할 때 우리는 짧은 기쁨과 좌절의 순환에 갇혀버리고 만다. 그러나 생 전체를 걸고 ‘앎’을 추구할 때, 그 도전은 ‘질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나아가 시인은 ‘슬퍼요’라고 자기 인식에 대한 ‘가치부여’까지 보여준다. 왜, 무엇이 슬픈가? 이 물음에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이번 시편들에 대한 독서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의 3, 4연은 ‘한 생명’에서 ‘한 존재’로 도약하려는 ‘비원’을 형상화하고 있다. 크게 보아 이 과정은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데 첫 단계는 ‘도다리’라는 이름에 갇혀, 또는 ‘바다’라는 상황에 갇혀 잊고 있었던 ‘조건’들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이다. “불꽃이 쏟아지는 사자자리,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병자리, 고집불통 전갈자리”를 찾아내는 것이며, 끝내는 “ 안드로메다 공주를 태우고 힘차게 달리는 검은 말 페가수스”를 찾아내 ‘도다리’라는 한계상황을 뛰어넘어 ‘진짜 바다’로 내달리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꿈같은 꿈’ 다음에 “내 알들은 살려주세요, 어머니. 하늘이 아니라도 이 바다에 별처럼 뿌려주세요.”라는 가녀린 희원을 덧붙인다. ‘기억’에 의지할 수 있다면, 당대나 동시대가 아니라 후대나 역사 속에서 가늘게라도 이어질 ‘기억’에 의지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로서의 ‘나’, ‘시인’의 발화라고 할 수 있다. ‘감각의 요동’이란 얼마나 불안하고 불완전한가? 인식적 수고를 마다하는 감각적 발화는 ‘몸’의 말에 충실하지만, 그만큼 ‘시’의 몸을 잃는다. 여기서 ‘시’는 고형적, 고정적 형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이 몸으로 ‘육화肉化’ 되었다 사라지는 순간을 지시한다. ‘뭇 생명’이었던 한 ‘도다리’가 이제 ‘존재’가 되어 ‘시인’으로서 ‘자기 근원’을 탐색한다. 시인 박혜연은 이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채 마르지 않은 말들이 동굴 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어요.
막 시원이 될 말을 그리고 돌아서는 사내의 얼굴이 환합니다.
그는 스스럼없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습니다.
아직 탄생하지 않은 말을 드디어 탄생시켰다는 기쁨
그녀와 뜨거운 포옹을 나눕니다.
여러 해 동안 사내가 흙가루에 동물 기름을 개어 그려 넣은
말들을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쓸어봅니다.
아, 손끝으로 전해지는 말, 말들
그렇게 기다리던 말들이 이렇게 손에 잡히다니요.
있어도 없는 존재이던 것들이 이렇게 생생하다니요.
들소, 사슴, 새, 곰, 해, 달, 별, 나, 그리고 너,
날개를 달고 입 밖으로 화르륵 날아오르는
어둠 속 웅크린 영혼들 오랫동안 기다려온 말들도
탄생의 기쁨에 더 크게 소리칩니다.
더 힘차게 솟구쳐 오릅니다.
세상에 막 도착한 말을 경배하며
사내는 뜨겁게 뜨겁게 세상을 안습니다.
그 날 이후 말은 또 다른 말을 낳고, 낳아
그의 처음 말이 지금 가장 오래된 동굴이 된 것입니다.
― 「가장 오래된 말」 전문
모든 시는 ‘상징’으로 빚어진다. 그 범위가 넓거나 협소하거나, 영향범위가 광대하거나 좁거나, 아무튼 상관없이 모든 시는 ‘상징’이라는 현대시의 구조적 원리 없이 제 ‘뼈대’를 세울 수 없다. ‘바다’에서 ‘동굴’로 왔다. 시인은 ‘몸’일 수밖에 없었던 ‘생명’에서 그 껍질을 찢어낸 존재, ‘시인’으로 “바다에서 동굴로 왔다”. 그러므로 시인의 탐색은 ‘인공수정 ’, ‘항생제’, ‘형광불빛’의 세계를 떠나 이어진다. 거기에 ‘언어(말)’가 있었다. 그것은 “막 시원이 될 말”이었다. “불꽃이 쏟아지는 사자자리,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병자리, 고집불통 전갈자리”가 “들소, 사슴, 새, 곰, 해, 달, 별”로 바뀌었다. 비약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대립적 해석을 감행하자면, ‘하늘/지상’의 대비와 ‘도다리-어머니/나-너’의 대비는 선명하고 그만큼 강력한 ‘의미’를 환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표지는 한 개인이 드디어 ‘시인’의 세계로 진입했음을 반증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현실’에 대한 이해와 반성, 나아가 개선 의지가 곧바로 다른 차원으로의 이행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양식우리의 도다리’에서 ‘자연산 도다리’로 제 ‘값’을 올리려는 노력이 얼핏 보기에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도약’이란 ‘존재’의 상태일 때만 가능하다. 그는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무화無化되는 것’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박혜연 시인은 앞 인용 작품을 통해 두 개의 ‘가능태’를 실험하고 있다. 하나는 “아, 손끝으로 전해지는 말, 말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의 인식이 ‘몸’과 ‘말’을 동시에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뭇 생명(도다리)’이었을 때 ‘알생명의 씨앗’을 건네받고, 건네주는 상황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어쩌면 시란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리려는 인간, 즉 존재의 의지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언어적 체계’는 ‘생명의 체계’와 어긋난다. 아 ,깊은 사유가 필요한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인칭’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 표면에 ‘그-그녀’가 등장한다. 작품의 표면만 읽자면 이러한 인칭의 사용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율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필자는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 ‘인칭’의 등장은 순차적으로 자연적인 이분법이 강제적(인위적) 이분법으로 변하는 사태를 함의하고, 그만큼 시인의 인식이 ‘여기-지금’에 있음을 반증하는 증거로 사용된다. ‘시원’, ‘가장 오래된 말’과 같은 표현은 시인 박혜연의 초심자로서의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처음 말이 지금 가장 오래된 동굴이 된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생각의 방향을 달리 하게 만든다. 최소한 박혜연 시인은 자기 경로에 대한 점검이 확실하고, 또한 철저하다고 보인다.
뜨거운 바다에서 열꽃이 터져.
나는 자궁 깊숙이 숨은 빈 방에서 나팔을 불어.
양생의 단전을 지나 뜨거운 나의 아래
낮고 넓은 골반에 뿌리 내린 꽃숨 끌어올려
얼굴 발개지도록 나팔을 불어.
기억하지, 내 몸에서 처음 꽃이 터지던 날
어머니 그 꽃잎 곱게 받아
두툼한 책갈피 사이에 모셔 두었지.
딸아, 꽃 피웠으니 너도 꽃밭이다.
꽃씨 받아 싹틔울 귀하디귀한 꽃밭이다.
축복의 주술로 어머니
내 꽃밭 오래오래 쓸어 주셨지.
나는 꽃씨였다가 꽃이었다가
풍성한 꽃밭을 꿈꾸는 바다였다가,
밀물 들면 꿈의 해수면이 차오르고
썰물 지면 보름달을 품는 여수바다였다가,
내 꽃밭에 처음 꽃이 피던 그 날
나는 신의 나팔소리 들었어.
내 몸에서 터져 나오는 나팔소리 들었어.
맞울림 하는 내 몸 안에 바다가 있어.
그래, 나는 바다야.
나팔소리 울려 퍼질 때마다
만선의 붉은 깃발 단 배가 귀항하는
꽃밭이야, 꽃밭.
― 「바다, 여수바다」 전문
이 글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변증법적 사유방식’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자각→성찰→지양’이라는 순반향의 사유적 발전의 (비유적으로)‘삼각형’을 제시했다. 물론 독자들은 다 이해하시리라. 지양이 ‘지향’의 음성적 유사성 놀이라는 것을.
이번 작품들을 통해 보여준 박혜연 시인의 가능성은 현실태에 대한 자각, 가능태를 향한 바람, 그리고 잠재태로서의 ‘시적 자질’을 ‘형상화’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오늘의 한국 시단이 엄청나게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적지 않은 노력과 커다란 의지가 작용했으리라 짐작만 한다. 앞의 인용 작품은, 실제 지명을 인용했음에도 그것이 거느리고 있는 거의 모든 ‘시적 분위기’를 소거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이것은 말 그대로 ‘여수’가 ‘여수’가 아니고, ‘바다’가 우리 눈에 사로잡힌, 즉 감각적 ‘바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목과 달리 시인은 ‘꽃 숨-(잠재적)꽃 밭-꽃 씨’로의 전화轉化, 또는 한 ‘순환체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자궁 깊숙이 숨은 빈 방에서 나팔을 불어.”(꽃 숨)는 자기 폐쇄의 단계를 지나 “꽃씨 받아 싹틔울 귀하디귀한 꽃밭”이라는 일견 강압적 자기인식(꽃 밭)에 괴로워하다가 끝내는 “그래, 나는 바다야./ 나팔소리 울려 퍼질 때마다/ 만선의 붉은 깃발 단 배가 귀항하는/ 꽃밭이야, 꽃밭.”(꽃 씨)이라는 너른 인식의 대지로 흩어진다. 세밀하게 읽으면, 깊은 사유와 과정을 버무린 표현들이 발목을 잡는다.
박혜연 시인은 다른 작품에서도 “울기 위해서 나는 몸을 입었으니/울기 위해서 나는 몸을 벗는다.”(「매미」)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나아가 “나의 손은 허공 속에서 허공을 어루만지며/ 공중에서만 사는 너의 잠에 가 닿는다.”(「새」)는 ‘지향志向’을 분명히 한다. 아, 아름다운 이 작품들에는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자기 갱신’, 아니라면 ‘시적 전환’의 면모들이 잘 표현되고 있다.
글의 맨 앞으로 돌아가 되묻고 싶어진다. ‘시인(A)=시(B)’라는 공식을 변증법적 상승과정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박혜연 시인은 이 ‘경로’(직접적 대입은 불가능하지만)를 어떻게 자신의 시작 상황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필자의 판단으로는 적절하고 충분해 보인다. 설명 이전에 시인의 꿈을 함께 보고 싶다.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것들에게 날개의 문패를 달아주고 싶어. 처음 나를 호명하던 그 떨림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아침, 뼈 마디마디에서 너를 부르는 징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갑골문자」). 이제 ‘뭇 생명’에서 ‘시인’이라는 ‘존재’로 자신의 ‘생(언어)’의 체계를 바꾸었으니, 당분간, 잠시간의 어색함은 아름답게 받아들여야 하리라. 아름다운 ‘시인의 길’을 달리 찾을 수 없다면, 아니 찾게 되더라도, ‘외눈도다리’, 가능성으로서의 ‘꽃 숨’이었던 그 날들은 사라지지 않으리나.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시적 형상화’를 통해 스스로 드리라 믿는다.
백인덕∙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오래된 약, 단단함에 대하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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