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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신작특선/손현숙/꽃, 다시 와서 아프다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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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숙
꽃, 다시 와서 아프다 외 5편
뼈마디 마디 나른하게 길가 풀섶에
고양이 한 마리 앞발 뒷발 꽃잎처럼 포개 누웠다
저, 아지랑이 못갖춘마디 얼룩이다
한때는 제 몸을 날라서 먹이를 구하고
새끼를 낳고 세상을 할퀴었겠지만
저건 짐승의 쉼표, 벌써 일주일 째
밤마다 죽은 아버지의 맨발이 포개진다
잠이나 실컷 재울 속셈으로
흙 몇 삽 떠내고 구덩이 하나 팠다
빈손으로 가볍게 주검의 무게를 받아
땅속에 꽃씨 하나 다독다독 묻었다
꽃 한 송이 자장자장 재웠다
순한 짐승의 숨소리
꽃은 잠의 물관을 빨아 다시 돌아오겠지만
동네 사람들 약속이나 한 듯
오늘은 언 땅 뒤집어서 흙 갈아엎는다
무릎에 흙 털고 아픈 허리나 짚고 일어서는데
말랑해진 흙에서 사람의 살 냄새 난다
숨은 길
화살표는 오른쪽을 가리킨다
매일 오르는 뒷산
언제 적 누구시더라, 앞서 밟고 간 발자국
위에 고스란히 발 얹었다
길은 지루하고 한길로 풀어져서
눈감고도 가는 길 아차, 하며
돌부리에 걸려 발 비틀린다
머리칼 송두리째 한 쪽으로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왜 막무가내 내일이 궁금할까
신발은 불구처럼 한쪽으로 닳아
기우뚱, 겨울이 왔다 사흘 밤낮 눈 내리고
다니던 길 지워졌다
발자국 위의 발자국도 사라지고
엎질러진 하늘처럼 산 바닥 드러났다
여기가 어디더라, 두리번거리는데
깜짝 놀란 듯 빗겨선 비탈길 열렸다
눈이 길을 덮어 숨은 길 드러난다는 거,
울울창창한 지난여름 숲처럼
살아보지 못한 이곳,
햇빛 활활 털면서 누가 걸어온다
흑백필름 한 통
급하게 떠나간 손이 내 손에 슬몃 쥐어준
밀서, 가방 깊숙이 감춰두었다
꼬깃꼬깃 가슴에 품어 빛바랜 흑백사진 같다
바람에도 들키고 싶지 않은 침묵
하릴없이 카메라의 셔터만 눌렀던
그의 긴 손가락은 무슨 이야기를 쓰다 만 걸까
유품 정리하다 손에 걸린 구닥다리 니콘 AF카메라
찍다 만 필름은 돌려 감는다 케이스 속에서
쥐눈이 콩 같은 알록달록 수면유도제 쏟아졌다
하품처럼 입 열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 한마디 없으셨다”,
말이 오고가지 못하는 시간을 지나며
그는 홀로 제 살 더듬었겠다
저만의 암실에서 유서처럼 풀어 쓴 음화
입술 꽉 다문 저 스물네 컷의 비문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흑백필름 한 통 체온이라 깊이, 깊이 품어
암등이 침묵으로 안을 밝힐
낡고 헐렁헐렁한 가방 속에 다시 밀봉한다
허기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은 담배 딱 한 모금
니코틴으로 육체를 빵빵하게 채우고 싶다
먹고 나면 불끈 힘이 솟는다는 박카스
탑골공원 박카스아줌마들이
줄줄이 종로경찰서에 붙들려왔다
한 병에 오천 원, 아니 깎아주기도 하면서
누군가의 허기를 채워주는 일
그날, 양념통닭에 갈비탕에 떡국에 허기까지 들이고
일순에 숨을 버린 그 남자
자기의 앞날을 훤히 본 거다
제 속의 걸신을 눈치 채서
육신도 저를 방어했겠지만
아무 것도 담아두지 않아서 소실점 없는 하늘,
저도 제 갈 길 멀다는 것을 알고
제 속을 아득하게 비워서 말갛게 닦아서
땅위의 티끌까지도 힘껏 빠는 중?
있고, 없고, 그리고
발자국이 발자국을 따라가는
기척이라곤 없는 산길
정수리에서 하늘까지 손가락으로 금 그어보면
태양에 온몸 기대고 있었던 듯
하늘에 올라붙는 그림자
밤과 낮 온통 섞이고 섞이면서 바람은
머리에 착 달라붙은 반달 핀 탁, 끌러 놓았다
여기, 문 없는 문 열고 산속에 들 때
기침 한 번 하는 일
무성영화 자막처럼 길게 뒤 좇아 오는 무엇,
왜 보이지 않는 것들 궁금할까
안으로 갇혀 안으로 사라지는 일
살짝 비틀렸던 발목 관절 푸는 사이
최초의 밤이 오고 또 다른 밤을 지나
꿈 없는 꿈처럼 하늘 시퍼렇다
겨울 숲 침묵으로 떠들썩하다
자살
자고 일어났는데 사방 와락 낯설다
아직은 새벽 어둑살이 묻어나는 때
왜 이렇게 환한 것이냐 눈 시리도록 네 귀퉁이
밝아서 오히려 우물 속처럼 깜깜해지는
순간, 여기가 어디냐?
어제와 오늘 손가락으로 곰곰 짚어가면서
배고픈 지금은 몇 시?
없다, 시계 하나 걸려있지 않은 방구석
함께 잠들었던 남자의 숨소리도
없다, 누군가에게 전화라도 걸어야 하는데
머리맡 스마트폰 버릇대로 터치, 터치!
묵묵 시위 하는 스트라이커다
달래고 때리고 문질러가면서 통사정 해보았지만
혀 깨물고 결심했다는 듯 끄떡없다
해적처럼 너무 많은 것들 뱃속에 들여놓았나보다
새벽 자명종 울림을 시작으로
카톡과 문자와 시 나부랭이와 음악과 소문들까지
지긋지긋 기대오는 내 몸무게 성가셨겠다
세상의 끝장은 이렇게 보는 거다
속엣 것 몽땅 비워서 깨끗하게 저를 지웠다
제가 저를 죽여서 슬며시 나를 버렸다
시작메모
시간의 무늬들은 별일까, 바람일까, 흙일까
봄비 소곤소곤 홍매소식 올라왔다. 이번 겨울은 절절하게 추워서 다시는 볼 수 없는 꽃이라 생각했는데, 자연은 기적처럼 꽃을 풀어놓았다. 겨울동안 꽁꽁 얼었던 사람의 마음도 자연의 힘 앞에서 다시 연해지는 요즘. 겨울 내내 붓을 꺾었던 타락한 나도 엄지와 검지 사이 연필을 잡았다. 겨울동안 죽음을 경험한 그 시간의 무늬들을 나는 또 무엇이라 문자를 세워서 허망한 노래를 부를 것인가. 죽어서도 제 모가지 위의 입술로 노래 불렀던 오르페우스처럼 나는 숨통 끊어져서도 막무가내 시를 붙들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나는 사람일까, 짐승일까, 바람일까, 물일까, 흙일까. 하늘과 땅 그 중간쯤의 어디에서 바람이었다가 흙이었다가 하늘이었다가 너였다가. 뭐라 이생에선 이름 부를 수 없는,
손현숙∙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사진 산문집 시인박물관(문화관광부 우수도서 선정), 나는 사랑입니다(인터파크 올해의 문학 선정). 평사리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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