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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여름)신작특선/김승기/지심도 동백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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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기
지심도 동백 외 5편
사람들은 아직 꽃이 덜 피었다고 투덜댄다 일주일만 늦게 올 걸 그랬나 아쉬워하며 나도 바닥만 보고 다닌다 동백은 절정에서 모가지를 꺾는다 사람들은 떨어진 동백을 의자에 모아놓기도 하고 진달래 가지를 꺾어 가지마다 꽃을 달아 땅에 꽂아놓기도 한다 선착장 근처 한 노인이 짓무른 동백을 한 삼태기 두엄 위에 던진다
두엄 위 동백들이 툭툭 털고 일어난다
한참 내려온 적멸의 뒤를 무심히 돌아본다
다시 묵묵히, 내리막길을 걷는다
갑자기 벼랑 쪽으로 방향을 튼다
아찔한 벼랑 밑은 푸른 바다
눈 깜짝할 사이 뛰어내린다, 뒤따라오던
수천 개의 동백이 뒤를 잇는다
남해바다가 환하다
經을 읽는 낭랑한 소리
불면증
스위치를 내렸다 꺼지지 않았다 스위치를 또 내렸다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밤새 스위치를 내렸다
어둠이 몰려와 강철 같은 물상들 테두리를 뜯어먹는다
배가 터진 어둠들이 흐물흐물 밤새 머릿속을 흘러다녔다
전구알이 창백하다 관음사 새벽 종소리 지나간다
날아다니는 온도계
새 소리 하나,
1도
새 소리 둘,
2도
새 소리 셋,
3도
……
여기저기 새소리 가득,
?도
봄
육각형 속에 갇혔던 계절이
숲속을 마음껏 날아다닌다
속도
어둡고 미끄러운 雨中 아스팔트, 그 위에는
오직 네 바퀴들만이 있을 뿐, 아니
그 바퀴가 만들어내는 빨간 동그라미들만 있을 뿐
질주하며 포효하는 동그라미, 그 짐승들은
누가 막아서거나 걸리적거리면
가차 없이 잡아먹는다
동그라미의 흰 이빨 사이엔
선 붉은 피가 묻어 있고
오늘 여행 재미있었어?
동그란 짐승들은 주차장 네 바퀴 속에 갇힌다
막무가내
서둘러 한적한 곳을 찾는다 오랜만에 빈대떡 하나 부쳐놓고 푸짐하다 편지를 꺼내 서둘러 읽고 부드럽게 부빈다 편지 봉투도 뜯어서 넓게 펼친다
그렇게 막무가내를 마무리를 하는데, 난데없이 시골집 안방 낮잠 생각이 난다 시골집에만 가면 자도자도 밀려오던 잠, 앞으로는 그런 단잠은 잘 수 없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수면제에 의탁해야 하고
변비에 고생하는
가난
참 부자였다
마음껏, 터지게, 째지게,
은근히 그 막무가내가 그리운 것이다
머리 없는 여자
그녀는 머리가 없다
가슴과 이고 선 푸른 하늘뿐이다
가끔 머리 부분이 허전해 무작정 거리로 나서면
발밑은 머리들로 득실댄다
꼴통에 걸려 넘질 때도 있다
털고 일어서면 은근히 화가 난다
그럴 때면 세상에게 실컷 술을 먹인다
징그런 머리들이 사라지고 무겁던 하늘이 뒷걸음질 친다
홧김에 술을 더 먹이면
원시림 같은 가슴들이 출렁댄다
정말, 그녀는 머리가 없다
비린 가슴과 이고 선 시린 하늘뿐이다
시작메모
리비도 타나토스와의 한 판 씨름
시는 무엇인가?
왜 시를 쓸까?
어떻게 써야 하는가?
30년 넘게 써왔으면서도 이런 질문에 접하면 여전히 난감하다. 이 기회에 이 문제들을 제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나의 시 쓰기는, 막무가내 식 의식적 행위였다. 가령 ‘죽음’이란 단어에 매달려 날밤을 세우는 식이었다. 아침에 손에 주워든 것은 내가 바라본 관념이었고, 그것을 가지고 무언가 내가 정리된 듯했다. 그러나 이는 가짜 시각 페르조나에서 벗어나는 소리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주워든 알량한 관념은 ‘언어의 표상 내지 기표’였다. 이렇게 무수한 추상적 관념들은 하나하나 내 식으로 정리, 아니 창조되어 갔다. 그러나 그것이 ‘시’라 하기에는 허전하고 부끄러웠다.
그 정리된 ‘언어의 기표 내지 표상’들을 수 천 번 되뇌며(그때만 해도 내가 쓴 것은 다 외웠었다) 탈고 전에 진화되어 갔다. 그 진화 과정에 ‘언어 표상’과 닮은꼴의 ‘대상’을 접했을 때, 나는 그 대상을 떠날 수 없었고 그 주위를 끝없이 맴돌았다. 그러면서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소묘해 갔다.
대부분의 ‘대상표상’들의 겉은 의식 속에 묻혀 있었다. 좀 더 또렷이 보려면 전의식을 파내야 했고, 완전히 진을 빼는 작업 끝에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일반사람과 구별되는 금단의 작업이었다. 그 작업이 끝났을 때는 알지 말아야 할 비밀을 알아낸 죄로 형언할 수 없는 허탈감이 몰려왔고, 나는 술잔 앞에 앉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렇게그렇게 나는 주점에 있는 시간이 도서관에 있는 시간보다 많아졌고, 덤으로 시인이란 명칭을 얻었다.
꿈틀대는 욕망 내지 본능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것은 ‘표상’이나 ‘정동’에 단지 에너지(리비도, 타나토스)로 부착될 뿐이다. 그 부착되어 일으킨 화학반응이 결국 우리 마음이다.
표상 중에서도 ‘언어 표상’은 의식레벨이고, ‘대상표상’은 무의식 레벨이다. 내가 밤을 새워가며 한 시 작업(?)은 ‘의식 레벨의 옅은 언어 표상 줍기’였으며, 수 천 번 되뇌며 고쳐나간 과정은 그 언어표상이 파생되어 나온 무의식 속의 ‘대상표상’으로의 접근 작업이었다.
이렇게 ‘언어표상’은 ‘대상표상’으로 나아가고, 무의식 속에 신체 심리적 경험의 산물인 ‘정동’과 조우하며, 마침내 욕동 내지 본능의 본 실체로 거슬러 오르며 연역된다.
아마도 가장 훌륭한 시는 그 대상에 부착되어 있는 욕동 내지 본능을 다짜고짜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리라.
나의 시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언어표상 그리기, 고맙게도 이 단계는 건너뛴 것 같다. 적어도 바로 ‘대상표상 그리기’의 수준은 된 것 같다. 그리고 아직 엄청난 정신에너지를 부착 보유하고 있는 ‘정동’을 겨우 맛만 보고 있는 상태인 것 같다.
최근 들어 가장 각광을 받는 시인은 ‘정동’ 쪽을 잘 캐취, 그 속에 숨어 있는 신체적 언어(신체의 움직임 : Moved body)와 쾌/불쾌와 연결된 어떤 특질을 소유한 심리 쪽을 잘 묘사하는 능력의 소유자들인 것 같다.
결국 시인은 비의식과 익숙한 사람들이고, 그것을 기어이 형상화하고 마는 무당들이다. 그런데 라깡이라는 사람은 이 비의식 중 가장 광범위한 무의식을 협소화시켜 놓았다.
정동은 무의식에 설 자리가 없고, 오직 표상과 언어적 기표들만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한때 우리 시단에도 라깡이 한참 인기 있었고 ‘언어표상과 기표놀이’의 시들을 양산케 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쪽에 종사하고 있다.
어쨌든 내 시가 요즘 맘에 안 들고 성에 안 찬다. 과작이었었는데 요즈음은 여간해서 붓을 안 든다. 그러다 시상이 썩어 문드러지기도 하고, 잊어버려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썩어 문드러진 것들을 뒤적거리다 보면 쓸 만한 시를 줍기도 하고, 잊어버릴 것이라면 애초 시가 될 수 없다며 나름 게으름을 정당화하며 산다.
주․객체가 만나며 일으킨 화학반응, 그것을 뛰어넘고 싶다. 다짜고짜 리비도 타나토스와 한 판 씨름을 하고 싶다.
김승기∙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 역驛.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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