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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신작시/신운영/달팽이 사육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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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운영/달팽이 사육기 외 1편
지불이 끝나고 달팽이는
유리병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때맞춰 밥을 주는 당신은 자상한 보모
빨간 토마토를 먹고 빨간 똥을 싸고
노란 참외 껍질을 먹고 노랗게 마른 시간을 싼다
피망을 연거푸 먹은 날
설사를 하고 피망처럼 속이 텅 비어버렸다
내가 하는 일이란
당신에게 부지런히 발바닥을 보여주는 일
강아지가 벌렁 누워 주인에게 배를 보여주듯,
유리병 안쪽을 빙빙 돈다
햇빛과 마주서기에 얄팍한 껍질
꿈이 부르터 있다
당신의 눈을 떠난 잠깐의 어둠 속에서
우린 서로를 더듬어 보았을까
너의 발이 내 머리를 만지면
나는 벌써 네 벗은 발을 흉내 내곤 했다
변신은 너무 쉽게 길들여지고
자웅동체의 사랑은 복제된 어둠을 낳는다
미리 발바닥을 보여주는 것이
달팽이의 진화이론,
팔다리의 흔적을 지운 뱀은
날름거리는 혀 아래 독니를 감춘다
붉은 새
새는 구름을 몰러 가는 중이다
산초나무 숲에서 바람은
밤새 어둠을 향해 얼마나 바늘을 쏘아댔는지
서릿발 쓴 마른 풀들이 하얗게 떨고 있다
겨울은 화약을 품고 있는 중이다
더 나가지 못하고
길이 물잔처럼 흔들리며
비명을 터트린다
금방 깨질 것 같은 울음으로 주저앉아
구름을 몰러 가는 새를
오래 바라보았다
새가 남기고 간 자리를
나뭇가지가 공들여 문지르고 있다
구름이 들어 올리어진 허공에
주사로 그린 벽화처럼 잘 익은
거울 하나
새의
뾰족한 부리에 찍힌
겨울 하늘이
사금파리처럼 시퍼렇게 깨진다
신운영∙2012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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