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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추천/이생용/여자만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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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용/여자만 외 4편
―화사花蛇
하연 벼꽃 너머 붉은 노을이 꽃피고 있었지. 구불구불한 들길은 몇 마리의 화사花蛇, 핏빛 물들이며 관기 들녘을 기어가고 있었지.
청보리 올라오는 이른 사월, 막 허물 벗은 화사 한 마리와 대면했었지. 뱀도 놀라고, 우리도 놀라고, 뱀도 달아나고 우리도 달아나고, 그러다 뒤돌아서 밭두렁의 돌멩이 하나둘 집어들고 무참하게 후려팼지. 황토에 스며드는 검붉은 피를 보며 우리는 전사처럼 우쭐거렸지. 발그레한 얼굴로 우리는 뱀무덤을 만들어 주었지. 여름이 되기 전 드러난 하얀 뱀뼈에 또 한 번 놀랐지. 뱀뼈에 발이 찔리면 그대로 썩어 문드러진다 하였지. 어미뱀이 아직도 밤마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돌무덤을 빙빙 돈다 했지. 가슴 졸이며 하얀 뱀뼈 풀섶으로 옮겨 안장했지. 우리들 손등에 붉은 꽃들이 피고 있었지.
하연 벼꽃 너머 붉은 노을이 꽃피고 있었지. 구불구불한 들길은 몇 마리의 화사花蛇, 핏빛 물들이며 관기 들녘을 기어가고 있었지.
무위無爲
덕양역을 지나 여수로 가는 폐 선로가 엿장수 마음대로 철거되고 있다. 기차가 아무리 빨라도 세월만큼은 아니라시던 어머니는 가까운 기억부터 하나둘 잃어가고 있다. 빠른 기차가 지워지고, 맛있는 바나나, 원숭이 엉덩이 같은 빨간 사과마저 지워진다. 기억은 들녘 말뚝에 묶인 소나 염소가 아니다. 밤새 뒤척이다가 무위사無爲寺로 가는 아침이 무겁다. 차창 밖 남도의 가을이 한 폭의 화첩畵帖이다. 월출산 자락 푸른 동백의 입口 속에 앉은 무위사無爲寺는 텅 비어 있다. 넘친 것이 아니라면 채우기 위함이다. 눈동자가 없는 관음보살, 천불千佛의 부처가 보여주는 미소들, 이파리 다 떨군 늙은 감나무의 허허로움이다. 파랑새 한 마리 날아간 허공으로 어머니 훌훌 날아가신다.
당신의 부채
바지랑대 끝에 어둠이 내리면
할머니는 저녁 모깃불을 피우셨다.
젖은 쑥대, 건초더미 위로 매운 연기가 피어났다.
멍석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면서
북두칠성, 전갈자리, 별자리 몇 개 중얼거리면,
느그 할미 별은 어딧냐
손에 든 부채로 가슴의 열증을 쓸어내렸다.
바람은 어딘지 습하고 무거웠다
산비탈 내려오는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썩을 놈들, 오살할 놈들, 호랭이나 물어 갈 놈들
씨부리시던 여름이 끝나면 팽팽함이 사라진 부채 위에는
앙상한 뼈대가 드러나는 여름밤의 잔해가 누워있다.
여순사건 소용돌이에 빠져 죽은 큰아버지의
발굴되지 않은 갈비뼈가 돋아났다
뱀춤
밀꽃 피는 날이면
낮술에 취한
암놈, 숫놈의 뱀, 뱀, 뱀, 뱀, 뱀, 뱀, 뱀,
뱀들이 꼬이고 꼬여 한 몸, 한 몸, 한 몸
비로소 발그레지며
영글대로 영글어가는 밀밭
꽃섬, 꿈꾸다
낙타를 타고 사하라에 가서 구절초를 볼까나 하던 형은,
그 해 가을, 사하라 마라톤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체력단련 중 뇌출혈로 시든 구절초 꽃잎이 되어버렸네.
나 혼자 사하라로 가는 게 싫어
낙타 대신 배낭 메고 이 섬 저 섬 헤매다가
봄 햇살 튕겨내는 은빛 바다 위로 떠오르는 섬
슬픔의 무게로 발자국도 선명한 꽃섬 보았네
붉게 멍든 동백꽃은 말이 없고
앞 다투어 피다 진 꽃들은
마른 꽃잎을 바람에 날리고 있었는데
슬픔은 오래 흔들릴 뿐 바람 따라 떠나지 않고
기억 속의 꽃잎처럼 선명하기만 하였네
저 꽃잎 낙관 조각을 내어
순넘밭넘* 구절초 꽃밭에 묻고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 하나씩 지울 수 있다면
슬픔을 꽃으로 피우는 섬에서 나는
낙타를 타고 끝내 사하라로 가려 하네
*여수 화정면 하화도(꽃섬)내 구절초 꽃밭 지명 이름.
소감
여수의 아픔을 시로 승화시키는 작업
어느 해 문학 강연에서 지역에 있는 시 지망생이나 시인들은 지역적인 시를 써야 한다고 가장 지역적인 것을 시로 표현하여 다른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지역을 사랑하고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거라는 강의 내용을 담아 왔었다. 지도에서 보면 여수는 반도의 끝에 자리 잡은 호리병이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여수를 사랑한다. 여수의 풍경을 사랑하고, 여수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바다를 내 시에 옮기고, 그 바다 안에 갯벌과 섬, 동백꽃을 곳곳에 심어둔다.
시인은,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도 살고 아직 가보지 않는 먼 미래에도 갈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박물관에서 보았던 빗살무늬 토기의 곡선에서 여수의 서부 해안선인 여자만을, 빗금 그어진 사선의 무늬에서 가을철이면 여수에서 흔하게 잡히는 전어의 뼈대를 상상하고, 토기를 채우는 밀물썰물의 흔적만큼 곳곳에 들어나지 않는 여수의 아픔을 시로 승화시켜 보는 것, 그게 내가 하여야 하는 詩作이 아닐까 반문하여 본다. 그런 시를 적었던 나의 졸시에 끝까지 관심을 가져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그리고 늘 시야 놀자에 함께 하여준 갈무리 회원님께 감사드리고, 부끄럽지 않는 시인이 되고자 다시금 다짐한다./이생용
추천평
향토성과 역사성이 담긴 서정시
이생용의 「여자만」 외 4편을 추천한다. 화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여자만」과 기타 작품을 읽으며 나는 오랜만에 향토적인 정서에 푹 빠졌었다. 문학의 기능 중 근간이 되는 것의 하나로 시인이 태어난 국토를 든다면 그 국토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그 흙에서 자란 정서일 것이다. 그런 작품들을 만나면 다른 작품보다 친근감이 들고 반가운 것도 은연 중 정서적인 공감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리라.
특히 나는 요즘 수많은 문학지에서 실린 시인들이 시를 읽으며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이 극히 드믄 형상에 대해 섭섭함을 금할 수 없다. 또 서정시를 쓰는 시인도 한두 명 어쩌다 시단에 나오는 현상이다. 시는 서정시가 근간이다. 서정시가 사라진다면 시를 읽는 맛이 사라질 것이다. 서정시의 부활 같은 것은 거론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시점에 이생용 시인의 작품을 만나 더 기쁜지 모르겠다.
이생용의 서정시는 유년의 추억을 모티브로 하여 향토색 짙은 색조를 나타낸다고 할까. 그러면서도 그 서정성이 서정으로 끝이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의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데에 이생용 시인의 장점이 있다고 보았다. 「여자만」에서는 유년에 뱀을 만나 죽이고 묻어주는 토템신앙까지 곁들어 있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화를 면하기 위해서건 어째서건 나름의 휴머니즘이 엿보이는 점이라 하겠다. 작품 「무위」도 폐 선로의 철거와 더불어 온갖 추억이 사라지고 지워지는 작품인데 그 속에서도 하나의 위안으로 무위사 가는 대목이 깃들어 있다. 「당신의 부채」도 위의 작품과 마찬가지다. 할머니 가슴의 열증을 쓸어내리는 부채와 그 드러난 부채살에서 여순사건 때 죽은 큰아버지의 발굴되지 않은 갈비뼈를 보는 역사의 아픈 물굽이도 짚고 있다. 나는 이 점이 이생용 시인 서정시의 아름다운 점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천거하는 바이다./강우식(시인, 글), 장종권(시인), 고명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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