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9호(봄호)미니서사/김혜정|그 겨울의 찻집
페이지 정보

본문
김혜정|그 겨울의 찻집
내가 노파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이맘 때였다. 여느 때처럼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카페가 문을 열 즈음 집을 나섰다. 겨울 들어 처음으로 눈발이 날릴 거라는 예보를 들어서인지 약간 우울했다. 지방신문으로 등단했지만 책 한 권 낸 적 없는 무명작가로 마흔을 앞둔 이혼녀라는 처지가 돌덩이처럼 머리를 짓눌렀다. 글을 몇 줄 쓰지도 못하고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을 게 뻔한데 눈까지 오면 느끼게 될 상대적 결핍감.
나는 자판을 두들기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맞은편에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꼿꼿한 등은 회색 머리칼과 어울려 기품이 있어 보였다. 옷매무새나 커피를 마시는 손동작만으로도 그저 가사 일만 하면서 늙은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저 나이에도 이런 곳에서 기다릴 사람이 있다니. 누구든 만날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서 열등감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 달째 이 카페 말고는 간 곳도 없고 만난 사람도 없는 데다 첫눈 소식이 새삼 그런 감정을 부추겼다.
그 후 일 년 동안 이따금 그녀를 보았는데 늘 그 모습으로 혼자였다. 화장실 한 번 가지도 않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내가 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그녀가 내 앞자리로 건너왔다. 단정한 옷매무새며 걸음걸이, 무엇보다 일자로 다문 입매는 마치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처럼 익숙했다.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라고 나는 약간 목소리를 띄웠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자기가 살아온 생을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에게 말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오랫동안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엇에 홀린 듯이 나는 그녀의 말을 받아 적었고, 나는 그것을 소설로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 대가로 그녀에게 막걸리를 샀다. 그리고 오늘 그녀와 이 카페에서 이 시간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알람소리를 듣지 못해 늦게 일어났다. 후다닥 고양이 세수를 하고 카페로 달렸다. 카페 입구에서 나는 우두망찰했다. ‘임대문의’라고 적힌 종이가 유리창에 붙어 있었다. 커피값도 싸고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를 주지 않는 카페는 드물었다. 게다가 겨울을 제외하고는 트레이닝 바람으로 나와 앉아 있어도 되는 곳은. 어제 마신 술이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친절한 아르바이트생이 쿠키까지 얹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마지막 손님이 될 것 같다면서. 왜 점포를 내놨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후락한 동네에 대학가에나 있을 법한 카페가 유지될 리 없었다.
“할머니는요?”
“할머니요?”
“늘 오시는 할머니, 어제 저랑 여기 앉아 있던 할머니요.”
“그런 분 없었는데요. 어제도 혼자 계셨잖아요.”
아르바이트생이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김혜정∙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장편소설 <달의 문門>으로 서라벌문학상 신인상 수상.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장편소설 <독립명랑소녀>로 ‘2010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경기국제통상고등학교에 재직 중.
- 이전글49호(봄호)정우영의 시평에세이/몽글, 솟는 삶의 시향詩香-박경희 시집 <벚꽃 문신> 14.03.04
- 다음글49호(봄호)미니서사/박금산|피 속도 14.03.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