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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정우영의 시평에세이/몽글, 솟는 삶의 시향詩香-박경희 시집 <벚꽃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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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영
몽글, 솟는 삶의 시향詩香-박경희 시집 <벚꽃 문신>
얼마 전 혹한이 몰아치는 날 밤, 보일러를 끄고 자다가 동사하신 할머니 이야기가 뉴스에 나왔다. 누구든 떠오르는 첫 생각은, 이럴 것이다. “아니, 그게 얼마나 된다고 그걸 목숨하고 바꾸시나, 그래?” 나도 그랬다. 보일러 값 몇 푼이나 된다고 그걸 아끼시다가 자식들 가슴에 통한의 못을 박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다 어머니 마음이다. 자식들은 뜨신 방에 재워도 스스로는 냉방을 고집한다. 어머니들은 평생 그렇게 살아오신 것이다. ‘나’보다는 ‘내 새끼’가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지금 이 사회의 권력은 돈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그러니 어찌 그 돈 허투루 쓸 수 있겠는가. 돈이 상전인데. 가장 깊은 곳에 모셔두고 마음 조아릴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 할머니의 죽음을 가벼이 무지몽매無知蒙昧로 몰아붙이지 말 일이다.
나도 숱하게 보아왔다. 우리 장모님도 보일러 켜는 걸 엄청 두려워하셨다. 나는 켜고 내가 물러나오면 장모님은 끄셨다. 이것은 단순히 근검절약이 아니다. 나는 모성 본능이라고 여긴다. 언제 닥칠지 모를 위기를 이렇게 대비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보면 권력의 칼날은 얼마나 살벌했던가. 그 권력이 지금은 돈, 금력이다.
시골 사람이라 하여 어찌 돈의 위력을 모를 것인가. 다 안다.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도 더 뼈저릴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가진 것 없는 자, 무지렁이의 배고픈 설움이 뼛속깊이 각인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 그런지 할머니들(특히 시골 할머니들)은 옆에서 지켜보면 참 답답하고 어리석은 나날을 산다. 설령 그와 같은 할머니의 절약이 곳곳에서 예기치 않은 봉변에 된서리를 맞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전기세 아낀다고 새벽 감나무 그늘 친 뒷간에 나섰다가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눈두덩이 찢어진 할매
읍내 사는 아들네 달려와 보니
다친 눈은 어디 없고 허리를 움직일 수 없다고
장작개비 누운 듯 빳빳하다
방바닥에 드러누운 할매 둘러업고
불러 온 모범택시 타고 달리는데
에구구, 소리에 물오리들이
청라 저수지 내치며 우우우, 새벽을 건드린다
종합병원 응급실 떠나가게 소리 지르며
꿰맨 자리로 앉은 푸른 엄살
전기세 몇 푼이나 된다고 그러고 다니느냐는
아들 면박에 점점 커지는
이 빠진 앓는 소리
댓잎을 쓰는 싸라기눈이
쌓아둔 장작더미 속으로 스러진다
―「푸른 엄살」 전문
스스로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아끼고 살지만, 알고 보면 이 할매의 경우처럼 허방이다. 자본주의는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쓰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그걸 가만 놔두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빼앗아 가는 것이다. 끝끝내 소비하려 하지 않는 자에게는 글머리의 저 할머니와 같은 죽음을 예비해 두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말 자본주의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다 그렇게 되는 걸까. 박경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시집 <벚꽃 문신>에서 아직 자본에 길들여지지 않은 본원本源의 삶이 아직도 존재함을 보여준다. 물론 이 같은 삶이 대부분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의해 구현된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든 동시대를 사는 누군가는 자본 물질문명에 완전히 굴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경희는 그들의 삶을 “푸른 엄살”이라 부르는데 나는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 여긴다. “전기세 아낀다고 새벽 감나무 그늘 친 뒷간에 나섰다가/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눈두덩이 찢어진 할매.” 그가 “종합병원 응급실 떠나가게 소리 지르는” “에구구,” 신음 소리에서 박경희는 “꿰맨 자리로 앉은 푸른 엄살”을 본다. 왜 푸른 엄살일까. 그 속에는, “전기세 몇 푼이나 된다고 그러고 다니느냐는/ 아들 면박”을 제압하는 기묘한 응전과 함께 “풋!” 하고 터지는 여유의 해학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푸른 엄살”은 본질을 꿰뚫는 혜안의 시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박경희 시가 가진 득의得意의 면모라고 생각한다. 그는 시골 정경이나 현재의 살림살이를 핍진하게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 여기, 시골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겉과 속을 절묘하게 풀어놓아서 우리 안에 내재한 울림들을 디잉 건드린다. 피해가기 어렵다. 어디 이뿐일까. 생생하게 구사되는 능청스런 고장말은 또 어떤가. 내가 마치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2. 미미한 인생들의 생생한 존재감
드물기는 하지만 여전히 농경시 혹은 농민시들은 씌어진다. 그러나 그 시들이 우리 눈앞에 도달하기까지에는 장애가 많다. 그 하나가, 농촌이 우리 삶의 중심에서 비켜난 것처럼 이 시들이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밀려나 있는 현실에 연동되는 것인데 밀도 있는 농민시를 쓰는 시인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와 같은 악순환이 불행히도 굉장히 급속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삶의 공동체를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고리들이 문득문득 지워지는 것이다. 사람은 사라져도 기억이 남아 있는 한, 그 존재는 지워지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얼마나 갈까. 그 기억. 지금처럼 우리가 훌훌 벗어버린다면.
그러할 때 박경희라는 시인의 등장은 우리에게 얼마나 든든한가. 그는 우리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공간과 시간, 그 속의 미미한 인생들을 시 속에서 생생하게 불러낸다.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그려지는 이 삶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인정人情의 낙원 아닐까 싶다.
아버지는 이십 년 넘게 목욕탕에 간 적이 없다
아들에게 등을 맡길 만도 한데
단 한 번도 내어준 적 없다
아버지의 젊은 날이
바큇자국으로 남아 있는 한
자식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등
경운기와 사투를 벌이며
빨려 들어가는 옷자락을 얼마나 붙들었던가
논바닥에 경운기 대가리와 뒤집어졌을 때
콧구멍 벌렁거리며 밥 냄새에 까만 눈 반짝이던
삼 남매의 얼굴이 흙탕물에 뒹굴었으리라
바퀴가 등을 지나간 뒤
핏물 위에 가득했던 꽃
울지도 못하고 깨진 창문에 덧댄 비닐처럼
벌벌 떨었다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앓는 소리를 들으며
개구리처럼 눈만 끔벅이다가
부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졸았다
경운기와 씨름한 샅바가 붉게 물들어
아버지 등에 감겼다, 병원에 가자고
등에 손을 얹은 어머니의 눈물
뒤집어지던 꽃잎 훌러덩훌러덩
등에 새겨졌다
―「벚꽃 문신」 전문
시집 표제작인 <벚꽃 문신>에서 보이는 아버지는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부성상父性像이다. 그의 생애에는 아마도 강한 아버지, 식구를 책임진 아버지로서의 굳센 의지가 오롯이 감겨져 있을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등에 새겨진 ‘벚꽃 문신’이다. 그는 아들에게 이 흉터를 보여주기 싫어서 “이십 년 넘게 목욕탕에 간 적이 없다/ 아들에게 등을 맡길 만도 한데/ 단 한 번도 내어준 적 없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이/ 바큇자국으로 남아 있는 한” 자식들에게 한사코 등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이 고집에는 남다른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아마도, 이 ‘벚꽃 문신’에 스며있는 가난과 고통일 것이다. 그는 자기 대의 그와 같은 과거를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강한 아버지를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초라함이다. 경운기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이 무슨 꼴인가, 하는 자괴감 같은 것이 수치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보다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이 더 컸을 거라 여긴다. 그가 “논바닥에 경운기 대가리와 뒤집어졌을 때/ 콧구멍 벌렁거리며 밥 냄새에 까만 눈 반짝이던/ 삼 남매의 얼굴이 흙탕물에” 함께 뒹굴었다. 그때 떠올랐던 삼 남매의 그 눈빛, 그는 어찌 평생 동안 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이 악물었을 것이다. 내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고. 그러니 어찌 나중에라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등 내맡길 수 있으랴.
다소간 완고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벚꽃 문신>의 아버지는 부성 상실의 시대를 아프게 조감토록 이끈다. 권위 없는 아버지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맞다. 모성만큼 부성도 여전히 중요하다. 이 둘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인간은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부성상의 존재감을 그린 <벚꽃 문신> 같은 시들도 의미 깊지만, 이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는 「말복」이다. 박경희의 능청스런 해학이 마음속에 서늘한 그늘을 늘이고 색다른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계모임에서 옻닭 먹고 온 엄니 밭머리에서 게트림 길게 하고 연거푸 이를 세 번 닦았다는데, 옻 안 타는 엄니 옻 잘 타는 아부지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멀찌감치 떨어져 다니던 엄니가 뒷간 들어갔다 나온 뒤, 아부지 들어가고 똥김도 빠지지 않았는데 그 위에 쭈그려 앉았다고, 밤새 간지러움에 뒤척이다가, 자 어매 여 좀 봐봐 엉덩이 까 보여주자 거시기며 엉덩이가 벌겋게 오돌오돌 옻이 올랐다고, 니미 어떤 인간이 옻닭 처먹었느냐고 똥을 싸도 날 지나 싸지 왜 내 앞에 싸고 지랄이냐고, 옻 똥김 지대로 맞았다고 사흘 밤낮 벅벅 긁다가 세 들어 사는 집 구석구석 살폈다는데 수시로 빤쓰 속에 손 드나드는 통에 동네 아낙 여럿 낯 붉어졌다는데 한동안 대숲 뒷길로만 다녔다는데, 말도 못 하고 쥐 죽은 듯 몸 사리며 가끔 아부지 빤쓰에 손 집어넣고 원하는 곳 시원하게 긁어줬다는 엄니
―「말복」 전문
나는 시집 맨 앞에 놓인 「말복」 몇 행을 읽다가 마음을 툭 놓아버렸다. 아니, 아니다. 내가 마음을 놓기도 전에 시가 스스로 긴장을 풀어버렸다고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처럼 이 시는 아무런 막힘없이 흘러든다. 이성도 아니고 감성도 아닌, 살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다. 나는 노글노글해져 버린다. 그러고는 웃음기를 삼키지 못하고 내처 흩뿌리고 있다. 웃을 수 없는 정황이지만, 어찌 웃음 참을 수 있을까. 사실, “거시기며 엉덩이가 벌겋게 오돌오돌 옻이” 오를 경우, 그 가려움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긁자니 더 도질 것 같고 가만있으려니 미칠 지경일 터이다. 그러니 제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니미 어떤 인간이 옻닭 처먹었느냐고 똥을 싸도 날 지나 싸지 왜 내 앞에 싸고 지랄이냐고, 옻 똥김 지대로 맞았다고” 투덜거릴 수밖에는 없다. 문제는 엄니이다. 옻닭 먹은 원죄로 “말도 못 하고 쥐 죽은 듯 몸 사”린 엄니는 얼마나 안절부절못했을 것인가. “가끔 아부지 빤쓰에 손 집어넣고 원하는 곳 시원하게 긁어줬다”고는 하지만, 아버지 옻독 가실 때까지 좌불안석이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니는 속으로, 잘코사니 심사 아니었을까. 평생 반듯하게 살아옴직한 아버지, 옻독으로 완전 흔들린 모습에서 새로운 면모를 봤을 수도 있다. 반듯한 인간이 보기에는 그럴싸해도 살아가는 잔재미는 별로 없다. 이 시는 그와 같은 균형추를 건드린다. 가려진 삶을 드러내어 흥미롭게 긁어주는 것이다. 겉과 속, 양陽과 음陰이 서로 간섭하고 부딪치는 거기에서 들춰지는 삶의 체취가 뭉클하다.
물론, 이 시집에서 대종을 이루는 시는 「말복」류가 아니다. 그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의 의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이 시집에는 또 다른 풍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바로 할매, 할배들의 일상을 옮겨놓은 것 같은 시들이다. 박경희는 거의 아무도 관심 기울지 않은 삶의 끄트머리에 선 이들을 싱싱하고 천진하게 그린다. 시 속의 노인네들은 전혀 낡아가는 인생 같지가 않다. 할매, 할배들의 시 속 생활이 팽팽한 것이다. 나는 이 어르신 시편들을, 박경희 시의 새로운 발견이라 여긴다.
낼모레면 칠십 넘어 벼랑길인디
무슨 운전면허여 읍내 가는디 허가증이 필요헌가
당최 하지 말어 저승 코앞에 두고 빨리 가고 싶은감?
어째 할멈은 다른 할매들 안 하는 짓을 하고 그랴
워디 읍내에 서방 둔 것도 아니고 왜 말년에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여
오 개월 걸려 딴 운전면허증에
한 해 농사 품삯으로 산 중고차 끌고 읍내 나갔던 할매
후진하다 또랑에 빠진 차 붙들고
오매, 오매 소리에 초상 치르는 줄 알고 달려왔던 할배
그리 말 안 듣더니 일낼 줄 알았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풀린 다리 주저앉히고 다행이여, 다행이여
혼잣말에 까딱까딱 해 꺼진다
―「상강霜降」 전문
연전에 백 살 가까이 사신 할아버지가 운전면허를 따 차를 모는 장면이 화제가 된 적 있는데, 그게 그 분만의 욕구가 아닌 모양이다. 이 시 「상강霜降」에도 문명 바람은 마실 와 있다. 그런데 운전면허를 따겠다는 이가 할배가 아니라, 할매이다. 할배는 그런 할매 걱정이 태산이라, “낼모레면 칠십 넘어 벼랑길인디/ 무슨 운전면허여 읍내 가는디 허가증이 필요헌가/ 당최 하지 말어 저승 코앞에 두고 빨리 가고 싶은감?”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까짓 지청구에 그만둘 할매가 아니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매는 마침내, “오 개월 걸려 딴 운전면허증에/ 한 해 농사 품삯으로 산 중고차 끌고 읍내 나갔”다. 아마도 기분 오졌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어떻게 딴 면허증인데. 하지만, 어찌 운전이 호미 들고 밭 매는 것과 같을 것인가. “후진하다 또랑에 빠진 차 붙들고” 할매는 “오매, 오매 소리” 새되게 내지르는 것인데. “초상 치르는 줄 알고 달려왔던 할배”는 “그리 말 안 듣더니 일낼 줄 알았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풀린 다리 주저앉히고 다행이여, 다행이여” 혼잣말로 뇌까린다. 나는 할배의 이런 마음이 진짜 사랑이라고 여긴다. 드러내어 쓰다듬고 핥아주고 얼러준다고 해서 다 진짜배기는 아니다. 속 깊이 누질러 근심하고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이 참사랑 아니겠는가.
이런 할배, 할매만 있으면 그 또한 너무 숭고하다. 삶의 진자리에서는 아직 풋풋한 젊은이들처럼 감정싸움의 승강이질도 곧잘 벌어진다. 할매, 할배가 삐치고 콧방귀 뀌고 부러 성깔 부려 서로 마음 후비는 것이다.
장대 끝을 돌려야 감이 따지지 반대로 돌려서 언제 따!
내일까지 딸껴? 자 아배, 이리 줘봐
밥 세끼 먹고 아궁이에 불만 처넣었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어
어째 그리 심이 읎어 그 밥심 뒀다가 어데다 쓸껴!
할매 잔소리에 장대 내동댕이친 할배
내가 왜 심이 읎어 읎낀 지랄 맞은 할망구
화통을 삶아 묵었나 목청이 자래* 질거리** 넘어 북망산까지 가겄구먼
할멈은 좋겄어 호미대학 쇠스랑과 나와서
산고랑에 밭 일궈 먹으니 맛나겄구먼
할배 맞장구에 장대 내동댕이친 할매
부엌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고
먼 산 보고 담배 태우다가 불똥 떨어져
홀라당 구멍 난 앞섶 쓱쓱 문지르는 할배
도랑에 떨어진 감만 뻘겋게 성질나 있다
(* ‘저 아래’를 뜻하는 충청도 방언. ** ‘길거리’를 뜻하는 충청도 방언)
―「11월」 전문
하지만, 이런 투덕거림도 순정하지 않은가. 마치도 아이들 소꿉놀이 같다. 늙어가는 것과는 상관없이 할매, 할배의 마음은 “도랑에 떨어진 감”마냥 이렇듯 여릿여릿한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이랴. 뉘라서 나이 들어감을 막을 것인가. 그러니 그 서러움을 할매, 할배는 이처럼 서로 툴툴거리며 할퀴는 걸로 대신할밖에.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표현의 겉과 속을 우리는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겉으로는, 할배의 힘없음을 타박하는 것 같지만 기실 할매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밥 세끼 먹고 아궁이에 불만 처넣었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어/ 어째 그리 심이 읎어 그 밥심 뒀다가 어데다 쓸껴!” 하는 힐난의 밑자락에는 할매의 안타까움이 실려 있다. 감 하나 따는 데도 힘 부쳐하는 할배의 쇠락이 할매는 서러운 것이다. 할배도 다르지 않다. “할멈은 좋겄어 호미대학 쇠스랑과 나와서/ 산고랑에 밭 일궈 먹으니 맛나겄구먼” 하고 비아냥거리지만, 일생 그리 살게 해서 미안타는 속마음이 거기에는 담겨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언했구나 싶은 할배는 “먼 산 보고 담배 태우다가 불똥 떨어져/ 홀라당 구멍 난 앞섶 쓱쓱 문지르”고 섰는 것이다.
이런 관계가 부부간에만 어려 있는 것은 아니다. 모자간에도 진득하게 얹힌다. 앞에 나온 「푸른 엄살」의 할매 같은 이가 도처에서 출몰한다. 전형적이라는 말은 이때 써야 할 것 같다. 생긴 건 다르지만 할머니들 하는 짓은 어찌 그리 똑같은지.
저녁상 물리자마자 약 봉지 들고 나와 물 앞에 앉은 할매
삼십 분 뒤에 먹어야지 약이 밥이냐고
아들 면박에 입에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데
봉지 슬쩍 밀쳐놓고 담배 한 대 들고 맨발로 밖에 나가자 뒤에 대고
밖에 돌아다니는 고라니도 얼어 죽었다는데
어째 엄니는 한여름이여, 양말은 팔아드셨나
그리고 담배가 뭐가 좋다고 그리 피워대
기침이 떨어질 새가 없잖어
듣는 둥 마는 둥 담배 한 대 물고 와서
약 탁, 털어 목구멍에 넣다가
사레 걸려 얼굴 벌겋게 기침한 할매
깜짝 놀라 달려와 등 두드리는 아들
약포지에 남은 가루약이 폴폴 날리는 밤이다
―「가루눈」 전문
낯설지 않은 정경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도 자주 목격했던 풍경이다. 나이 드신 할머니와 장년의 아들 사이에는 이런 퉁박과 지청구가 흔히 날아다닌다. “밖에 돌아다니는 고라니도 얼어 죽었다는데/ 어째 엄니는 한여름이여, 양말은 팔아드셨나” 하는 아들의 역정은 어쩐지 모성의 역전 같지 않은가. 어머니가 하던 잔소리를 이제 아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듣는 둥 마는 둥 담배 한 대 물고 와서/ 약 탁, 털어 목구멍에 넣다가/ 사레 걸려 얼굴 벌겋게 기침한 할매”는 아들 하던 짓 같고. 나는 사람이 나이 듦에 따라 몸과 마음의 품안이 이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심母心만이 모시는 게 아니라, 자식들도 마땅히 모심母心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다. 이건 고리타분한 효성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인생의 품앗이를 말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드문 풍경이 되었지만, 이는 자연스런 관계 아닌가. 보살핌을 받고 자라서 다시 보살피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런데 이런 자연스러움이 언젠가부터는 특이함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되돌려야 하지 않을까. “가루약이 폴폴 날리는 밤에” 창밖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모심의 회복만이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할 텐데, 하고.
3. 몽글, 솟는 삶의 시향詩香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계가 살져야 하지 않을까. 살 없이 어찌 너와 나의 어우러짐이 윤택할 수 있으랴. 그러니 관계 돈독해지려면 뼈와 뼈가 부딪는 세상을 덮는 살 냄새 먼저 폴폴 풍겨와야 할 것이다.
살 냄새가 난다, 고
두륜산을 오르던 애인이
내 목덜미에 코를 댄다
순간, 바위에 앉아 숨 고르던
바람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동백꽃을 건드린다
내 몸이 놀라 저 멀리 달아난다
애인은 허공을 쥔
내 손을 붙잡고
오르는 내내
살 냄새가 나, 살 냄새가 나
떨어지는 햇살처럼
가슴 아래서 부서졌다
젖꼭지가 맹감처럼
빨개지는 초겨울
산중
―박경희, 「色」 전문
나도 이제 살 냄새 맡고 싶다. 화자처럼 애인의 목덜미에 코를 들이대지 않아도 좋다. 그저 보송보송한 살 냄새 속에 잠기고 싶다. 생각해 보면 엄마의 살, 아내의 살, 아기의 살 냄새는 얼마나 환한 삶의 기쁨이었던가. 그 모든 살 냄새가 실은 살아가는 에너지인 적도 있었다. 그런 살 냄새들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버린 것인가, 세월이 앗아간 것인가. 아니면 흐르는 세월을 따라 사라진 것인가. 도시화에 물든 우리의 삶이 이 같은 살 냄새 혹 몰아내 버린 것은 아닌지. 무엇이 근본원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려나 살 냄새는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지금 여기에는 빡빡한 돈 냄새만 팔랑거린다.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 노래져 있을 때, 어디선가 살 냄새 살근 솟구친다. 박경희의 시 「色」이 환기한 것인가. 몽글, 솟는 삶의 시향詩香에 몸과 맘이 두근거린다. 그와 함께 시집 여기저기서 살의 냄새이자, 살아가는 냄새, 삶의 냄새 포근포근 풍겨나온다. 나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문득 환기해 보니 이제껏 헤쳐온 박경희의 시들이 다 실은 생의 젖줄들 담뿍 담고 있었음을. 그렇게 가슴 여는 “순간, 바위에 앉아 숨 고르던/ 바람”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며” 새로운 시향이 나를 시집의 첫줄로 안내한다. 나는 기꺼이 내 감성 내어주기로 한다. 그러자, “젖꼭지가 맹감처럼/ 빨개지는 초겨울” 내 몸속으로 마치 “떨어지는 햇살처럼” 몽글고 따뜻한 시간들이 갈앉는다. 무언가 윤택한 손길이 “가슴 아래”께로 미끄러지고 있다. 곧 본원本源<?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이 열릴 것이다.
정우영∙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살구꽃 그림자>.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시는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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