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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신작특선/김왕노/창녀를 찾아서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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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겨울호)신작특선/김왕노/창녀를 찾아서 외 5편
김왕노
창녀를 찾아서 외 5편
아비뇽으로 가나 해 뜨는 집으로 가나
너는 늘 눈 부셨고 너는 늘 출렁였으므로
너의 팔찌로 너의 귀걸이로 쩔렁거리기 위해서
너의 비둘기로 너의 꽃으로 발랄하기 위해서
창녀를 찾아 너를 찾아서
너는 처음에는 물방울이었어. 소녀였어. 풀꽃이었어.
너는 처음에 우리의 꿈이었어. 우리의 로망이었어.
지금은 너를 찾아 압해도로 가나 서울로 가나
흐린 창에 그리움이라 쓰고 코끝을 창에 대고 밖을 내다보는
네 위로 강물로 흘러가는 사내의 쓸쓸한 등을 다독이는
너를 찾아 맘마미아, 맘마미아, 요조숙녀인 너를 찾아
세월의 뒷골목을 정거장처럼 수없이 오가는 남자를
세상 모든 사내를 사랑해버리려는 네 숙원사업을 위해
밤마다 꽃등 켜는 너를 찾아 맘마미아, 너를 찾아
미치도록 슬프다는 노래 러브홀릭의 인형의 꿈
가장 슬픈 음악 우울한 일요일을 틀 줄 아는 너를 찾아
길 건너 너를 문득 내가 알아볼 때까지 찾아
맘마미아, 너를 찾아, 내게 불이고 공기고 물인 너를 찾아
맘마미아, 맘마미아, 너를 찾아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애초부터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이건 처녀에게 폭력적인 것일까, 언어폭력일까. 내가 알던 처녀는 모두 아줌마로 갔다. 처녀가 알던 남자도 다 아저씨로 갔다. 하이힐 위에서 곡예 하듯 가는 처녀도 아줌마라는 당당한 미래를 가졌다. 퍼질러 앉아 밥을 먹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아저씨를 재산목록에 넣고 다니는 아줌마, 곰탕을 보신탕을 끓여주고 보채는 아줌마, 뭔가 아는 아줌마, 경제권을 손에 넣은 아줌마, 멀리서 봐도 겁이 나는 아줌마, 이제 아줌마는 권력의 상징, 그 안에서 사육되는 남자의 나날은 즐겁다고 비명을 질러야 해. 비상금을 숨기다가 들켜야 해. 한때 거들먹거리면서 피어싱을 했던 날을 접고 남자는 아줌마에게로 집결된다. 아줌마가 주는 얼차려를 받는다.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란 말은 지독히 아름답고 권위적이다. 어쨌거나 아줌마는 세상 모든 처녀들의 미래, 퍼스트레이디
날아라, 가족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도 그 가족은 다 살아남는다고 했다. 엄마는 바람나서 딸은 날라리여서 아들은 비행소년이어서 아버지는 속이 비어서 하여튼 날아라, 가족
날아라, 가족, 딸은 날라리로, 날라리의 날개를 활짝 펴서 날라리 나라로, 날라리가 시민이고, 날라리가 일상이어서, 날라리가 명분이고 날라리가 아군이고, 이웃이고 날라리의 비행쇼가 열리는 곳으로, 날아라, 딸아, 세상 모든 딸들아, 날라리가 평범한 나라로
날아라, 가족, 엄마는 바람을 타고서, 스카프 나폴나폴거리면서, 다시 처녀 같이 부끄러움이 있는 곳으로, 다시 꿈의 궁전으로 찾아가는 정부의 차가 대기한 곳으로, 날아라, 엄마, 날아라, 엄마, 가족이란 천 근 무게를 털고 천형을 벗어나 마음껏, 몽환의 비가 내리는 곳으로
날아라, 가족, 속이 비었다는 가장인 아버지고, 날아다니는 모든 가족을 축하하면서, 속이 비어서 즐거운 날을 찬양하며 날아라, 아버지, 비행소녀인 아들과 가까스로 스치기도 하면서 바람 타기 좋은 날, 구름의 그늘을 박차고 때로는 바람난 아내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날아라, 가족, 날아라, 비행소년 아들아, 때로는 음속을 돌파하면서, 때로는 상공으로 치솟으면서, 비행운을 꿈처럼 길게 남기면서, 아버지가 엄마가 동생이 날아가는 하늘로 빨간 마후라를 부르면서, 게임기의 자판
기를 두드리면서, 삥을 뜯으면서
날아라, 가족, 뿔뿔이 흩어져가는 날아라, 가족으로, 날아가는 집과 고지서며, 날아가는 거리와 세월이며,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날아라, 가족으로 날아라, 나르는 가족은 이 시대의 표상, 이 시대의 반영, 날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날에
비열한 거리에서
비열한 거리가 내게 왔다.* 끊임없이 구름을 모아도 첫눈을 내리지 못하고 초겨울 찬비만 내리는 우울한 하늘을 지나서 한 권의 책이 왔다. 대구, 갠지스 나, 저 흰 몸 열고 들어가고 싶어라, 는 시가 실린 시집, 비열한 거리가 왔다.
지금껏 세상을 흔든 것은 태풍이 아니었다. 심장의 관통을 그리워하는 총알이 아니었다. 나를 흔드는 것도 사랑이 아니었다. 한 권의 책이다. 고서점에 잘 보관되어있는 책들이었다. 애야 넌 어디를 가니 물어오는 비열한 거리가 왔다. 우표가 붙고 소인이 찍힌 비열한 거리가
한때 내게서 발생한 어둠으로 악취로 내가 생산해내던 야비함으로 이루어졌던 비열한 거리가 그렇게 하고서도 끝끝내 등져버리고 배반해 버린 그 비열한 거리가 비열한 거리가 드디어 돌아왔다. 내가 날린 부메랑처럼 지금 내 손에 들려져 있는 비열한 거리 육식성 투견 잘못된 기록 가족사가 있는 비열한 거리가 왔다.
지금껏 세상을 울게 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내가 숱하게 보여주고 싶어 했던 깊은 상처도 아니었다. 마음껏 휘날리던 수의 자락이 아니었다. 지금껏 세상을 울게 한 것은 한 편의 시다. 지금껏 순결한 눈물을 보이게 한 것은 읽혀지지 못하고 세월의 뒷골목에 서성이는 한 편의 시였다.
비열한 거리가 내게 왔다. 비열한 나에게 자성에 이끌린 쇠붙이 같이 오! 즐거운 인생 반성 저것들과 함께 라는 시가 실린 비열한 거리가 내게 왔다. 비열한 창문 비열한 거래 비열한 노래 비열한 그리움을 정리하고 비워두었던 가슴으로 이제부터 비열하지 않으리라 맹세하던 혀끝으로 비열한 거리가 왔다.
지금껏 세상을 흔든 것은 영웅이 아니었다. 지금껏 뜨겁게 세상을 부둥켜안은 사람도 선지자가 아니었다. 환전되지도 않는 시를 쓰며 긴 밤을 지새우는 시인이었다. 시인의 야윈 손끝이었다. 비열한 거리가 내게 왔다.
* 언제인가 퇴근하니 박미영 시인의 시집 <비열한 거리>가 와 있었다.
막다른 곳에서 부르는 노래
귀가할 때마다 이곳이 바로 막다른 곳인 줄 안다.
막다른 곳에서 핀 사철나무며 막다른 곳으로
찾아온 사철나무며 다문화 가정이며 다 막다른
곳을 꿈으로 이어주는 기술자, 막다른 곳에 온
박새마저 꿈의 전도사, 막다른 곳이지만 기쁘게
십 수 년 간 귀가하는 것도 막다른 이웃이 있기에
최첨단은 아니지만 평당 제법 돈을 주고 입주한
이 아파트가 세상 그 어디보다 더 막다른 곳
날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여기저기서 도깨비처럼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독거노인이 폐휴지 리어카에 철사처럼 뒤엉켜
간신히 끌고 가도 아무도 밀어주지 않는 이곳
싸움을 하고 위급한 소리가 들려도 아무도
창문을 열어보지 않는 이곳이 막다른 곳 중
더 막다른 곳이란 생각을 조금씩 키워왔던 것이다.
이 막다른 곳에서 막장사고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소녀가 날아버리기도 했다.
치정에 얽힌 사람이 자살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내 아들의 친구인 치킨 집을 하는 젊은 아버지가
과로로 돌아가시기도 했다.
누가 스프레이로 아파트 단지 앞 벽에다가 종말이
와야 할 곳이라 검고 커다랗게 낙서를 해 놓기도 했다.
하나 막다른 곳이 반동의 밑바닥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얀 기포가 수면으로 튀어 올라 터지고 흐트러져
자유를 만끽하고 또 다른 우주로 편입해 가듯이 이곳이
세상 가장 막다른 곳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처음이고
세상 가장 아름다운 곳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라 생각한다.
여기에는 어떤 계산이 깔려 있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억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 착시 현상이 아니다.
삶이란 어디서나 대동소이한 것, 사람의 풍경이 곧
모든 것의 배후가 되므로 막다른 곳에 사는 사람의 풍경이
막 돼먹지 않았으므로 어느 집에서 들려오는 기타 치는 소리
베란다로 흘러넘치는 아이 웃음소리, 세탁기 물 내려가는 소리
떨어진 아이 신발을 주워 경비실 아저씨에게 전해주는 것
빙판에 미끄러진 딸을 부축해 집으로 데려다주는 손
층간 소음을 줄이려 조심조심 걷는 저 나직한 기척
난 이 모든 것이 막다른 곳에서 벗어나는 노래라 생각한다.
어떤 인연이 어떤 운명이 우리를 이 아파트 단지
심하게 문명의 납골당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곳으로 불러 모아
층층이 드러누워 꿈을 꾸고 층층이 깃들어 새처럼 살게 하지만
무엇하나 가진다는 것이 얻는 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결국 우리가 이렇게 모여 한 호흡으로 한 걸음으로
막다른 곳에서 벗어나 사통팔달에 이르기 위해 노래하는 것
밤이면 어둠 위로 환히 들어 올려진 UFO 같은 아파트를 타고
끝없이 꿈으로 노를 젓고 저어 남쪽 나라로 가고 있는 것
슈가슈가 슉 슈가 스마트폰 공화국
스마트폰을 열어 먼 나라의 날씨에 대한 정보를 검새하는 저녁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한 철새가 어지러워 고개를 처박는 저녁
스마트폰 위로 먼 산간지역 뒤란의 산죽 위로 눈이 내리듯 눈이 내리고
손끝은 달짝지근한 스마트폰 위를 수면처럼 스쳐가는 데
슈사슈가 스마트폰 위로 끝없이 눈이 내린다.
지하철 안에서나 관공서나 직행버스 안에서 누구나 손끝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슈가 슈가 슉 슈가하면서 터치하는데
누구나 스마트 폰 속으로 눈보라처럼 몰려가는 저녁
여기는 슈가슈가 스마트폰 공화국이라서 스마트폰을 놓아버릴 수 없는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꿈과 길과 풍경에 젖어
가끔 길을 놓치기도 하는 그러나 곧 위로의 문자가 슈가슈가 오는
스마트폰 밖은 너무 추워 스마트폰 공화국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의 길은
너무 써
그 어디로 전향하기에 슈사 슈가의 맛은 너무 오래가 뿌리칠 수 없어
집 밖으로 떠돌던 모든 소식들도 스마트폰으로 줄줄이 귀가하는 시간
스마트폰 안의 나라는 어디나 과즙 풍부한 과일, 꿈꾸지 않아도
모든 꿈이 줄줄이 들이닥치기도 하는 여기는 모든 대세가 기울고
슈가 슈가 슉 슈가 공화국, 젓가락 문화의 피날레
손가락이 혀가 되어 날름거리는 여기는 슈가 슈가 슉 슈가 공화국
시작메모
나란 시의 짐승
나는 이 세상을 피할 수 없다. 피한다는 것은 비겁이고 비굴이다. 세상과 마주칠 때마다 상처가 나고 슬픔이 생기지만 그 때마다 새살이 돋듯 시가 돋아난다. 시는 나의 편견일 수 있고 나의 독설일 수 있지만 나는 시가 털처럼 무성한 짐승이 된다. 나는 시의 짐승 한 마리로 가끔은 포효하면서 가끔은 웅크려 상처를 핥으면서 문학이란 거대한 산맥을 넘어간다. 시가 상처에서 새살처럼 돋아나기를 때로는 뜸들이듯 기다리고 때로는 강림하듯 내게 오는 시를 기다려 안개를 기다리는 새벽 미루나무숲 같이 샛강 같이 숨죽인다. 박주가리 씨앗처럼 뿔뿔이 흩어져간 내가 알았던 사람들, 벗들이 나의 시를 보고 나의 생존을 인정해 주기 바란다. 시는 내가 살아있음을 먼 우주까지 알리는 푸른 신호인 텔레파시이다. 시의 짐승으로 세상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 때마다 나의 시는 나를 떠나간다. 시는 내 영혼의 노래가 되어 누군가의 창을 꽃의 창을 닫힌 창을 기웃거린다.
김왕노∙경북 포항 출생.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 <사진속의 바다> 등.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문학상 수상,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시와 경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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