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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신작특선/남태식/놀며 피는 꽃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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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겨울호)신작특선/남태식/놀며 피는 꽃 외 5편
남태식
놀며 피는 꽃 외 5편
복지사회란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이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영혼의 탐구는 경제적 조건이 해결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마치 소학생들이 숙제시간표 만드는 식으로 시간적 절차를 둘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개발은 호흡이나 마찬가지다. 호흡이 계속되는 한 영혼의 개발은 계속되어야 하고, 호흡이 빨라지거나 거세지거나 하게 되면 영혼의 개발도 그만큼 더 빨라지고 거세져야만 할 일이지 중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중단될 수도 없는 일이다.―김수영, 1960.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종일을 피어 있는 꽃이 있다.
한낮에나 어슬렁거리고 나와 한나절만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종일을 싸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 잠깐 피는 꽃도 있으며,
낮에는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달뜨는 밤에만 나와 피는 꽃도 있다.
여러 철을 이어서 피는 꽃도 있지만, 봄에만 피는 꽃도 있고,
여름에만 피는 꽃도 있으며, 가을에만 피는 꽃도 있다.
겨울에만 피는 꽃도 있고, 언제 피었지? 모르는 새 지나간 꽃도 있으며,
피울까 말까 고민하다가 끝내 안 피는 꽃도 있다.
어떤 꽃이 보기에
한낮에 피는 꽃은 한나절을, 해질 무렵 피는 꽃은 종일을 논 꽃,
밤에만 피는 꽃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꽃일 수 있다.
한 계절만 피는 꽃은 집 말아먹을 꽃,
모르는 새 피었다가 진 꽃은 멍청한 꽃,
끝내 피지 못한 꽃은 말을 말아야 할 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늘은 언제나 어김없이 모든 꽃들에게
고루고루 물과 바람과 흙과 햇빛을 내리시고,
꽃들은 또 고루고루 내리시는 하늘을 탈 잡지 않으며,
제 필 때를 알아 피고 함께 피어 있으니,
누가 보시더라도 이건 공정하고 조화롭다.
상식의 집에서의 일이다.
상식의 집에서는 이건 그냥 상식이다.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듯,
호흡이 또 상식이듯.
첫 키스의 추억
(첫 키스는 달콤했어라.
단숨에 아랫도리 허물어졌어라,
가슴 무너졌어라, 너는.
너는 사랑에 빠졌어라.
첫, 사랑이었으라.)
(하여 너는 또
첫 키스의 순간이 그리운 것이다.
달콤한 기억이 궁금한 것이다.
궁금해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첫 키스에 이어 첫 사랑,
첫 사랑은 짝사랑,
짝사랑에 뒤따르던 시간들은 무엇이었나.
그 시간은 오랜 시간, 폭력과 치욕의 시간.
짓밟히고 내동댕이쳐져 얼굴을 다 잃은 무참한 시간.)
(너는 오직 첫 키스의 달콤함에만 끌려
그 무참한 순간들을 막무가내 지우는 것이다.
폭력과 치욕의 시간마저 자꾸 불러내는 것이다.
악몽의 벼랑길을 달려가는 것이다.
벼랑 끝에 서서 발가락을 곧추세우는 것이다.)
(아서라, 아서라,
첫 키스의 순간에 괄호를 치고 또 치는
나부끼는 손사래를 걷어내며
너는 그저 첫 키스의 달콤함만 외치다가
올 리 없는 첫 키스와 영영 이별하는 것이다.)
집중
안개가 짙다. 안개가 짙으면 안개에만 집중해야 한다.
안개의 몸피를 더듬어 가늠하고 손가락 발가락의 수를 세어보아야 한다. 안개의 표정은 맑은가 어두운가, 입술은 여태껏 앙다문 채인가 배시시 열리는 중인가, 안개의 속살은 두꺼운가 부드러운가 또 얼마나 깊은가 음습한가 헤아려보아야 한다. 안개의 속살 사이에 들어앉은 나무와 풀과 집과 그 안의 숨결들, 웃음들, 빈 들판의 눈물들, 쉼 없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한숨들을 코로 귀로 숨으로 느껴야 한다. 감전된 듯 감전된 듯 온몸을 떨어야 한다. 언젠가는 걷힐 안개에 뒤따르는 햇살, 뒤따라 날아오르는 새 떼들의 날갯짓 따위는 잠시, 어쩌면 오래도록 잊어야 한다.
바야흐로 때는 안개가 짙을 때, 어김없이 안개가 짙고, 지금 우리는 오직 이 안개에 집중해야만 한다.
첫눈, 당신, 당신의 당신
첫눈 내리던 날, 당신의 당신은 거리로 나섰지. 눈바람 속에서 종일 당신을 기다렸지.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는 당신의 약속을 믿고 나선 거리였지만 기다려도 약속했던 당신은 오지 않고 당신의 당신은 찬바람만 맞으며 시간을 눈발과 함께 날려버렸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당신의 당신은 당신과 언제 그런 약속이라는 걸 한 적이 있긴 있었든가 의심하다가 돌아섰지.
저녁이면 당신의 당신은 어느 골목을 서성였지. 그 골목은 당신과 함께 할 때만 존재하는 골목이었는데 그 때는 이미 함께 하던 당신은 사라진 골목이어서 벌써 없는 골목이었지. 당신의 당신은 그 골목을 차마 내치지 못하고 골목의 이 끝에서 저 끝, 저 끝에서 이 끝까지 밤새워 돌고 또 돌았지. 그러다 당신의 당신은 그 골목의 그림자만 안고 그 골목을 떠났지.
그런데 당신, 당신은 정말 당신의 당신과의 약속을 잊었던가, 당신의 당신과 함께 할 때만 존재하는 그 골목에서 사라졌던가, 혹 당신, 당신의 당신과 그림자놀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어쩜 당신은 오랫동안 그 거리에 서서 기다리던 당신의 당신을 모르는 척하고 그 골목을 돌던 당신의 당신마저 애써 안 보면서 그림자만, 그림자만 보고 또 보고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했지.
그리하여 당신은 그림자놀이를 멈추었지. 당신의 당신이 기다리는 거
리로 나섰지. 당신의 당신이 서성이는 골목으로 돌아갔지. 첫눈이 내리리라는 예보만으로도 여전히 눈발 맞으며 당신을 기다리는 당신의 당신의 그림자를 걷었지. 없는 골목에서도 밤새워 돌고 또 도는 당신의 당신을 온전히 안았지. 첫눈은 아직 내리는 중이지. 펑펑 함박눈으로 바뀔 준비가 되어 있지.
다시 불리어진 노래
어수선산란한 바람에 휘둘리는 밤과 새벽까지 피울음을 삼키는 아침의 날들이 있었다.
들지도 깨지도 않은 피 먹은 듯 늘 붉은 눈의 잠이 있었다.
노래가 있었다.
기억의 실을 자아내지 않고도 추억의 그물을 촘촘히 짜 때때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반복해서 들려주어 반복해서 듣던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가 불리어졌다.
일순간 과거에 사로잡힌 세뇌된 광신의 무리들에게서 집단적으로 불리어진 향수의 노래에 오래 애써 쌓은 둑이 무너졌다.
그 시절, 우리가 반복해서 듣던 노래는 무엇인가.
그 후, 우리가 오래 애써 쌓은 둑은 또 무엇인가.
향수의 노래를 부른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묻는 사이,
밤을 휘두르는 어수선산란한 바람과 새벽까지 삼키다가 아침을 맞는 피울음의 공포로 들지도 깨지도 않은 붉은 눈의 잠이 다시 이어졌다.
잠
몸은 치인 돌처럼 무거워
마당의 나무는 종일 바람에 시달린다.
바람 멈추고,
나무 고요한 침묵에 이르면,
잠은 기절처럼 찾아와 강물 깊이 가라앉으리라.
찬 숨 거친 기운 내지르는 바람이야
일단 감당을 미루고,
나무 다잡는다.
나무 다잡는다.
우선 나무 다잡는다.
마침내 몸은 붙박인 바위처럼 굳어
미처 오지 않은 잠은 길을 잃는다.
시작메모
쓰자, 안개의 시, 안개무덤의 시
선택의 시간은 지나고, 지금은 무덤에 안개가 짙다. 온갖 먼지들이 겹겹이 껴있는 안개다. 안개에 껴있는 먼지는 오래된 먼지다. 과거의 논리로 따지자면 한편 굳건한 먼지이기도 하다. 이런 먼지와 안개가 뭉쳤으니 안개는 너무 두꺼워 애써 벗기려 한다고 쉽사리 벗겨질 것 같잖다. 해서 이제 무덤은 그냥 무덤이 아니라 안개무덤이다.
이때껏 무덤이라도 보려고 하기만 하면 보기는 했으나 안개가 너무 두꺼우니 이제부터는 보려 한다고 볼 수도 없다. 무덤이 무슨 잊지 못 할 애인이라고 못 보는 것이 서러워 무덤 속으로 뛰어들 일이야 없겠지만, 무덤 앞에서 무더기로 봉사 귀머거리 벙어리가 될 수도 있으니 이건 서러워 아니할 수가 없다.
잠을 설친다. 속은 쓰리고, 하루, 이틀, 사흘, 연속해서 잠을 설친다. 잠이 대체 내게로 올 생각을 않는다. 오는 잠이야 애써 쫓을 일 없겠지만 아예 오지를 않으니 이건 또 어쩔 도리가 없다. 해서 잠을 설친다. 갔으면 싶은 속 쓰림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잠은 대체 오지를 않아, 나흘, 닷새, 잠을 설친다.
그리고 이렛날. 잠을 가로막은 벽이 무너진다. 이 잠의 벽을 무너뜨린 건 무엇이었나. 아니 이 잠의 벽을 쌓은 것은 무엇이었나.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중요한 건 벽이 아니라 끝, 시작의 반대편에도 있으나 옆자리에도 있는 끝,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잠은 기절처럼 와서 강물 깊이 가라앉는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14시간을 내쳐 잔다. 자고 일어나 생각한다. 안개가 짙을 때는 안개의 시를 쓰고,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시를 썼으니, 무덤에 안개가 덮였으면 안개무덤의 시를 쓰자. 시작이나 희망 같은 상투적인 말없이 여태처럼 본대로의 시를 쓰자. 해서 무덤가에서 이제까지 쓴 시가 무덤의 시라면 이제부터 쓰는 시는 안개무덤의 시다.
남태식∙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내 슬픈 전설의 그 뱀>.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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