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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신작시/김정수/첫사랑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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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겨울호)신작시/김정수/첫사랑 외 1편
김정수
첫사랑 외 1편
금방 읽어 좋은 짧은 시
한눈에 다 들어온다
잠시 눈 감으면
미처 들어오지 못한 여운까지
오래오래 가슴에 머문다
그런 날
종이에 손을 베인다
낡다
종로 번화가 헌책방에서
인질로 잡혀 있던 시인 몇 명을 사왔다
한 사람 몸값의 절반에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을 지불했으므로
밀고당기는 협상의 기술도 발휘하지 않았으므로
난 횡재한 셈이다 다양한 종류의 인질들을
초췌한 몰골의 시인이 인쇄된 비닐봉지에 담아
나만의 아지트로 돌아왔다 인질들과 본격적인 밀담을 나누기 전에
뒤표지에 붙어 있는 스티커 바코드를 떼어 냈다
감쪽같았다 표지 어디에도 헌책방에서 사왔다는
표시가 남아 있지 않았다 비로소 그들은
온전한 시인으로 거듭난 것은 아닐까 생각하다가
그중에서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시인과
대화를 시도했다 허우대 멀쩡한 놈이 말이 참
요란했다 자기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빈 깡통처럼 떠벌렸다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해진 난
그 놈의 뒷덜미를 잡아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휴지통 안에서도 그는 쥐새끼처럼 바스락거렸다
이번엔 두툼한 정장을 차려입은 시인을 안락의자에 앉혔다
앉은 폼새가 어딘지 권위적이었다 대화 내내
속이 거북했다 말을 끝낸 그가 불쑥
해설을 들이밀었다 불콰해진 난 그의 멱살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 태워버렸다
타다 남은 뼈를 곱게 갈아 철 지난 목련 아래 묻어버렸다
서재에 들어오자 중년의 사내가 대뜸 협박을 해댔다
내가 전화 한 통이면……
난 급히 그의 입을 막곤 담장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내가 돈조차 안 받고 인질을 집 밖으로 내친 건 그가
처음이었다 방 한쪽 구석에 풀처럼 누워 있는 그를 발견한 건
그 순간이었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 눈을 마주치자
칼바람에 목 베인 풀잎 소리가 갈피마다 쟁쟁했다
한 정신이 툭툭 먼지를 털고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나가자
남아 있던 인질들이 일제히 누워버렸다 얼결에 나도
그들 곁에 모로 누웠다 누워 손으로 비닐봉지를 문질렀지만
램프의 거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난 아무 조건 없이 인질들을 풀어주었다
활활
불길에 타오르던 상처가 저 혼자 산책을 떠났다
김정수∙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서랍 속의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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