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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신작시/허청미/배경이 되는 것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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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겨울호)신작시/허청미/배경이 되는 것들 외 1편
허청미
배경이 되는 것들 외 1편
―꿈속은 제로소음이다
거창한 출정식을 하고 저들이 출발했다
등정을 위하여 모두 전진했다
천산 어디쯤일까 혹은 죽음의 계곡을 기어오르는
저 검은 행보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이 기시감,
뾰족뾰족 날선 바위를 타고 넘는 다리들이 낄낄대는
그 뒤를 따르는 내 다리의 행보가 참 익숙한 것은
가파른 절벽을 오르다 결국은 기우뚱, 검은 아가리로
대롱대롱 열 손톱이 뒤집어지고
소리소리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낭패는
어느덧 내 손등을 밟고 하산하는 저들에게 나는
투명인간일 뿐,
인원 점검도 하지 않는다
저희들끼리 둘러 앉아 불을 피우고 불판을 달군다
육질이 좋은 고깃덩어리를 굽는다
지글지글 오그라들며 흘러나오는 붉은 육즙
저것은 내 허벅지다 심장이다
걸신들린 허기를 다 채우고도 남을 비육이 뒤틀린다
뜨거워― 뜨거워― 따. 겁. 다. 구―우―
―모기소리 같은 귀 울림이 웽웽―
딱― 수면睡眠을 깨고 모기소리가 비상한다
민소매 팔뚝이 자꾸 가렵다
꿈속에서 내 살을 태워 번제를 치르는 동안
꿈 밖에선 모기가 피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변기에 앉아 오줌을 눈다 생시의 제의처럼, 귀뚜라미가 운다
몇 cc 오줌이 배설되는 동안 한 계절이 넘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검은 속도들이 지구의 둘레를 잰다
수면 아래 제로소음이 자라 수면 밖 배경이 되는 소음들
배경이 되는 것들․2
―오징어순대
그때 그 오징어순대 참 맛있었어요
오래전 오징어순대 한 입 베어 문 그의 희극적 얼굴이 떠오른다
우거지 두부 숙주나물 찰밥 고기로 속을 꽉 채운
오징어순대는 바다와 육지의 합체물이라던
썰어 놓으면 둥글둥글한 것이 구수한 것이
질리지 않고 오래오래 포만감으로 느긋해지는 것이
참이슬 한 잔이 금상첨화라던
기억 속 미감이 실감처럼 표정이 말한다
어머니 환갑상에 아들 돌상에 (제상엔 빼고) 감초 같은
대대로 전수되어 온 오징어순대가 내 배경의 모서리쯤이라는 듯
그때 그 오징어순대 생각나는데요
어쩌죠, 지금은 아이들이 잘 먹지 않아서……
요즘 해체가 대세잖아요
통합은 못 견디잖아요
그러면서 퓨전음식점 앞을 기웃대는 저 괴변들을 보세요
가끔 나는 오징어순대를 만들어 놓고
속만 빼내어 하나하나 그 속을 음미해보는데
속들은 이미 제 본질이 와해된 유명무실인데
해체불가, 요지부동의 맛, 오징어순대!
세월이 꽤 흘렀지만 레시피 잊지 않았어요
바다에 육지를 꾹꾹 눌러 재구성한 맛을 보러
오세요, 과거에다 미명 같은 미래를 당겨 솜씨를 내 볼게요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놓을 게요
다시 해후할 때 우리의 배경은 오징어순대일지도 모를
허청미∙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꽃무늬파자마가 있는 환승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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