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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신작시/임경섭/심시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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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겨울호)신작시/임경섭/심시티 외 1편
임경섭
심시티 외 1편
아름답다의 다른 말을 생각해보자
허물다
짓다
허물고 짓다
추억하다와 같은 말을 생각해보자
무너지다
세워지다
무너지고 세워지다
아프다의 다른 말을 생각해봐
추악하다와 같은 말을 생각해봐
떠오르지 않을 거야
그런 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이 도시계획엔
네 방 같은 건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시뮬레이션․1
출근길에 생각했다
나는 왜 저 사내가 되지 못할까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그쯤에서 서성이다가
나는 왜 저 사내가 될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등이 아주 작고 둥글게 말린
가난한 애비 하나가 선로 위에 누워있던 거다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외할머니는 그의 등을 긁어주었던 거다
자그마한 등골을 슬슬 쓰다듬으며
등이 작으면 꿈자리가 비좁지
등이 작으면 저 긴 잠 일렁이는 물결에도 별자리들이 출렁이지
출렁이기 마련이지, 혀를 찼던 거다
외할머니 연곡 뒷산에 묻고 오던 날
어린 그에게 감을 따주었다는 셋째 외삼촌과
그날 따먹은 건 감이 아니라 밤이었다는 첫째 외삼촌,
그는 그 중간쯤에 서 있는 담 정도의 존재였을 거다
혹은 이듬해 연곡천에서 끓여먹던 개장국 안에
흰둥이의 눈깔이 들어있었다는 사촌누이와
처음부터 대가리는 들어가지도 않았었다는 막내의
의견, 그는 그 의견 같은 것이었을 거다
있거나 말거나 있었거나 없었거나
그러니까 선로 밖으로 빠르게 발을 옮기는
인파에 휩쓸려 나가
처음 보는 동네 정류장에서 노선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나는 왜 달려오는 전동차 밑으로 몸을 던지지 못할까
그리하여 수십 수백의 일생에 단 몇 십 분
제동을 걸지 못할까 생각했다
신뢰는 이미 일당으로 환전돼 있었던 거다
오늘의 약속은 약속을 어기는 것,
우리는 약속대로 움직였던 거다
우두커니 아침을 건설하고 있었던 거다
임경섭∙2008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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