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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정우영의 시평/몽상과 갱신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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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312회 작성일 13-10-07 16:08

본문

48호(겨울호)

정우영의 시평

몽상과 갱신의 시학

 

 

 

1. 일몰의 우울 속에 잠긴 주체적 갈망

‘저녁’에 눈이 간다. 아침보다는 저녁 어스름에 마음 사로잡히는 시간 늘어간다. 여명의 아름다움 쪽이 아니라, 낙조의 황홀함 쪽으로 자주 몸 기울어진다. 익는 중인가. 늙는 중인가.

나는 익어가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나, 거울 저편의 사내는 점점 더 추레해지고 있다. 채 익기도 전에 벌써 낡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연륜 깊어질 나이에 이 무슨 청승인가 싶다. 나는 거울 저편의 추레한 나를 거두고 거기에 경륜의 나를 세워 본다. 썩 어울리지는 않지만 못 봐 줄 모양새는 아니다. 일모日暮의 그림자 길게 늘어지니 제법 그럴싸하다.

이와 같은 그럴싸한 모양새를 기반으로 나는 이시영의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를 펼쳐든다. 이 시집에는 그만의 득의의 문체인 ‘건조한 인용체 시’들과 함께 ‘몽상 시’들이 적잖게 실려 있다. 그런데 이 ‘몽상 시’들은 ‘건조한 인용체 시’들과는 사뭇 다른 풍모를 보인다. 고즈넉하면서도 쓸쓸하지만, 웬지 따사로운 통증 같은 게 느껴지는 것이다. 일몰의 우울 속에 잠긴 주체적 갈망이라고나 할까.

마침 때는 저녁 참. 나도 시 속의 그처럼 저녁을 바라보고 선다. 애틋하고 서러운 무엇인가가 툭 마음속에 떨어진다. 가을이라 그런가 싶어 가슴 다독이고 다시 시인의 시선을 따라 간다. 여전히 저녁 풍경은 애잔하고 그윽하다. 아무래도 이 느낌은 내게서 나온 게 아니라 그의 시들이 펼치는 감성이 내게서 발현한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나는 그 감성 통째로 받아들인 채 저녁의 몽상에 잠긴다. 안서호에서 저녁을 맞고 선 시인이 저기 보인다.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으스스 몸이 시릴 때, 아니 내 삶이 내 삶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때, 그것이 또한 오로지 남의 탓이 아닐 때 등을 돌리고 서면 거기 안서호의 황혼녘에 오리들이 몇 유쾌한 직선을 그으며 나아가고 있었나니, 나 425호 남의 연구실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 대고 그것들의 한없이 자유로운 유영을 지켜보곤 하였으나 내가 저 오리가 되기엔 너무 늙었거나 조금 일렀으며, 생은 어디에 기댈 데도 없이 저처럼 뭉툭한 머리를 내밀고 또 물밑에선 죽어라고 갈퀴질을 해대며 쌩까라*고 저 홀로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는데, 그때쯤이면 해가 풍덩 가라앉은 저녁 안서호의 따스한 물결이 내 가슴 통증께로 조금씩 밀려오곤 해 나는 서둘러 텅 빈 가방을 챙겨 의대에서 오는 여섯시 막차 퇴근버스를 타러 언덕길을 총총히 내려가곤 했다.

―「저녁의 몽상」 전문,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 2012, 이하 같음)

 

저녁은 참 묘하다. 풍경 속으로 생각을 끌어들인다. 내 뒤를 돌아다보게 하는 휴지기休止期를 제공한다. 그 휴지기가 어쩔 수 없이 조성된 것이라 해도 상념의 빛깔이 바래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 보이는 시 속의 그도 마찬가지다. 이 저녁 풍경은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다가왔다. 어떤 시간의 틈새에서 맞닥뜨린 예기치 않은 정황이다. 그래서 늘 보아왔을지도 모르는 이 정경이 문득 새롭고 서늘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당신도 그와 같이 그 자리에 한 번 서보라.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으스스 몸이 시릴 때, 아니 내 삶이 내 삶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때, 그것이 또한 오로지 남의 탓이 아닐 때” 그 심사 어떨 것인가. 그는 등 돌려 “안서호의 황혼녘”을 바라보고 있는데 당신이라고 혹은 나라고 해서 다를 리 없을 것이다. 패배자적 응시 같은 나른한 감상성感傷性이 속속 배어나오지 않을까.

오리들의 “한없이 자유로운 유영을 지켜보”며 그는 아, “내가 저 오리가 되기엔 너무 늙었”구나 하는 회한과 그래도 아직 조금 이른 거 아닌가 하는 안도를 동시에 맛본다. 그러다가 그는 저 오리를 보며 속으로 이렇게 다짐하곤 한다. “생은 어디에 기댈 데도 없이 저처럼 뭉툭한 머리를 내밀고 또 물밑에선 죽어라고 갈퀴질을 해대며 쌩까라*고 저 홀로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속으로는 불끈 주먹 한 번 쥐면서 ‘아직 내 생 끝나지 않았어’ 하고 호기도 부리면서 말이다. 그러자 마침 맞게 위안처럼 “해가 풍덩 가라앉은 저녁 안서호의 따스한 물결이 내 가슴 통증께로 조금씩 밀려”와 준다. 그의 애잔한 저녁은 이제 “따스한 물결이 내 가슴 통증께로 밀려”와 감싸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음 구절이다. “나는 서둘러 텅 빈 가방을 챙겨 의대에서 오는 여섯시 막차 퇴근버스를 타러 언덕길을 총총히 내려가곤 했다”는 것이다. 서둘러 가방을 챙겨 총총히 언덕길을 내려가는 모습과 오리가 “저처럼 뭉툭한 머리를 내밀고 또 물밑에선 죽어라고 갈퀴질을 해대”는 것이 무에 다른가. 그렇다면 앞에서 “쌩까라*고 저 홀로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그의 다짐은 한낱 몽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시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삶이며 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의 허접한 삶의 양태는 반복될 것이라고. 벗어날 길 없는 물밑 ‘갈퀴질 삶의 비애’가 절절하게 가슴을 물들인다.

 

 

2. 몽상과 갱신의 시학

저녁이 이와 같은 비애만 보여주는 게 아니다. 나와 너의 정체성도 들먹인다. 나는 과연 나이며 너는 과연 너인가를 묻는다. 내 삶을 산 것은 과연 나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럴 때 저녁은 또 다른 몽상이며 몽환夢幻이다.

 

싸락눈 내리는 저녁, 길을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부르는 사람은 없고 그때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있지. 누군가 내 생을 다 살아버렸다는 느낌! 그런데 그 누군가는 누구이며, 과연 나에게 생 같은 것이 있기는 있었을까? 잘 구르지 않는 수레에 시커먼 연탄 같은 것을 싣고 가파른 언덕길을 죽어라 밀고 왔다는 느낌뿐. 그런데 코밑에 연탄가루 잔뜩 묻은 그것을 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싸락눈 그친 저녁, 길을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그때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있지. 누군가 내 생을 다 살고 간 것 같은 느낌! 그런데 그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이며, 과연 내가 이 생에 있기는 있었을까? 시간은 때로 뱀처럼 미끄럽게 손아귀를 빠져 달아났고 운명은 늘 제 얼굴을 가린 채 차갑게 나를 스치고 갔을 뿐 한번도 제 모습을 똑바로 보여준 적 없지.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이렇게 싸락눈 내리는, 그친 길 위에 문득 나를 멈춰 세워 날카로운 질문만 던질 뿐. 과연 내가 살기는 살았을까? 아니, 생을 제대로 살고 있기는 있을까?

―「싸락눈 내리는 저녁」 전문

 

이런 생각 들면 아득하다. “누군가 내 생을 다 살아버렸다는 느낌!” 내 삶을 내가 산 게 아니라, 누군가 대신 산 것 같다고 느낄 때 그 심정 어떨까. 아마도 그 순간, 나라는 존재감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말 것이다. 마치 저기 보이는 싸락눈처럼.

그러면 나를 대신 산 “그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런 의문 끝에 또 드는 생각. “과연 나에게 생 같은 것이 있기는 있었을까?” 당신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막막해진 눈으로 싸락눈 바라볼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을 것 같다. 싸락눈 맞으며 ‘이것이 진정 내 생인가, 이게 나인가’ 하염없이 자문하면서. 왜 아닐 것인가. “시간은 때로 뱀처럼 미끄럽게 손아귀를 빠져 달아났고 운명은 늘 제 얼굴을 가린 채 차갑게 나를 스치고 갔을 뿐 한번도 제 모습을 똑바로 보여준 적 없”는데. 내 생이란 이렇듯 불확실했는데. 돌아보면 운명은 또 그와 같은 시간은 내게 “갑자기 생각난 듯 이렇게 싸락눈 내리는, 그친 길 위에 문득 나를 멈춰 세워 날카로운 질문만” 던질 뿐인데.

그러다가 다시 또 드는 생각. 이 땅에 “과연 내가 살기는 살았을까? 아니, 생을 제대로 살고 있기는 있을까?” 싸락눈 내리는 저녁, 내리는 눈 맞으며 자가 자신에게 퍼붓는 통렬한 자기반성이 몹시 아프다. 나도 덩달아 내 생을 돌이켜 본다. 내 생은 어떤가. 나는 내 주체로서 온전히 내 생을 살고 있는가. 천만에, 천만에다! 싸락눈처럼 흩어져 녹아버릴 생밖에는 안 되고 그 생마저 주체로서 전혀 살아낸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 무엇일까. 이 몽상과 몽환 속에서 돋아나는 새 살의 느낌은? 자기 부정과 반성의 뒤끝에 새 삶의 속살 같은 게 언뜻 스치는데, 갱신이다.

이 갱신은 「아침의 몽상」에서 더욱 뚜렷해지는데 이로써 그는 시적 몽상의 새로운 판타지를 이끌어낸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가 어디지 하고 아주 잠깐 놀랄 때가 있다. 서울이고 마포고 십칠년째 살아온 그 방 여전한 침대건만 나는 이 낯선 영혼의 시간, 이 세상이 아닌 듯한 처음인 곳이 좋다. 그것은 밤 사이 내 정신이 육체를 떠나 아주 먼 곳을 서성이다(어쩌면 열사의 후끈한 바람 부는 안드로메다 성좌까지!) 이제 막 제 거소를 찾아 문밖에 도착했다는 신호! 그분이 돌아오면 내 늙은 몸은 일어나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해야지. “안녕하십니까, 따르꼬프스키 씨! 집에는 별고 없으십디여?” 그러면 따르꼬프스키 씨는 촬영도구들을 챙기다가 햇빛을 역광으로 받아서인지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대답하겠지. “당신 배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빨리빨리 세수하고 이빨 닦으시오!” 그럼 나는 공손하게 일어나 다시 한번 인사해야지. “그런데, 지금, 여기가, 어디지요?” 그때 저만치 어디에서 수탉의 울음소리가 째지듯 들려왔다.

―「아침의 몽상」 전문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가 어디지 하고 아주 잠깐 놀랄 때가 있다.” 이 순간, 여기를 뭐라 불러야 할까. 각성 이전 미명未明에 사로잡힌 이때를. 그는 “낯선 영혼의 시간, 이 세상이 아닌 듯한 처음인 곳”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곳은 자유로운 영혼의 태초적 적소인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무시되고 질서와 무질서가 뭉뚱그려진 그런 혼돈의 소우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밤 사이 내 정신이 육체를 떠나 아주 먼 곳을 서성이다(어쩌면 열사의 후끈한 바람 부는 안드로메다 성좌까지!) 이제 막 제 거소를 찾아 문밖에 도착했다는 신호!”가 들리기도 하니까. 거기에다가 다시 돌아온 내 정신의 소유주는 또 누구인가. 전설적인 영화감독 따르꼬프스키 아닌가. 늙은 내 몸은 “일어나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한다. 아마도 젊은 시절의 나인 듯한 ‘영화 속 소우주의 새로운 창시자’ 따르꼬프스키에게. “안녕하십니까, 따르꼬프스키 씨! 집에는 별고 없으십디여?”라고.

나는 실은 이 부분에서 자지러진다. 이 만남은 얼마나 다의적인 갱신인가. 세상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갱신이 여기에는 다 들어 있다. 동서고금, 나와 너, 상상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 질서와 무질서. 그리고 나와 또 다른 나까지.

그런데 이때 따르꼬프스키 씨는 어떻게 대답하는가. “촬영도구들을 챙기다가 햇빛을 역광으로 받아서인지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배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빨리빨리 세수하고 이빨 닦으시오!”라고. 전혀 엉뚱한 이 대답으로 판타지에서 현실 공간으로 미명의 빛은 빠르게 이동하고 나의 갱신은 흔들린다. 그리고 내가 “그런데, 지금, 여기가, 어디지요?”라고 물을 때 “그때 저만치 어디에서 수탉의 울음소리가 째지듯 들려”온다. 물론 이때 들리는 수탉의 울음소리는 아직 미명의 공간 속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각성으로 나아가는 입구쯤에 이 수탉은 서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의 갱신도 여기에 머무른다.

자, 그러면 그 다음은 어찌 되었을까. 이를테면 수탉은 갱신과 몽상을 열고 닫는 문지기처럼 여겨지는데 시는 그 다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가 할 일은 그 여백에 자기 갱신을 적어 넣는 일이다.

나는 그의 시 「이런 꿈은 또 어떨까」를 그 다음에 붙여 놓고 읽는다. 그러자 그의 ‘몽상의 시학’이 아련토록 깊이 드러난다.

 

꿈에 공릉恐陵스님*께서 수하에 까까머리 나어린 스님을 스물씩이나 거느린 어느 큰절의, 백석白石식의 자박수염 난 공양간 스님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손끝이 어찌나 맵짜고 정갈하던지 큰 코를 들썩이며 성궁미 짓는 솥 가며 부엌 바닥이 반지르르할 뿐만 아니라 뜸이 들어 갓 퍼올린 밥알들이 또 얼마나 고실고실하고 윤기가 흐르던지 나 속세의 인연으로 그 밑에 들어가 어른 팔뚝만한 장작을 입 이따만하게 벌린 아궁이에 들이대며 불 때다가 그 앞에서 자지가 노릿노릿해질 때까지 조울다가 또 지청구 먹는 영원한 불목하니가 되고 싶었다.

―「이런 꿈은 또 어떨까」 전문(*공릉스님: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의 법명)

 

그의 몽상과 갱신은 따르코프스키를 지나 공릉 스님에 다다른다. 공릉 스님이 누구인가.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이다. 머리는 밀고 다니지만 그의 행색은 스님 형상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가 꿈속에서는, “수하에 까까머리 나어린 스님을 스물씩이나 거느린 어느 큰절의, 백석白石식의 자박수염 난 공양간 스님이 되어 있”다. 그것도 그저 단순한 공양간 스님이 아니다. “손끝이 어찌나 맵짜고 정갈하던지 큰 코를 들썩이며 성궁미 짓는 솥 가며 부엌 바닥이 반지르르할 뿐만 아니라 뜸이 들어 갓 퍼올린 밥알들이 또 얼마나 고실고실하고 윤기가 흐르던지” 모른다. 이를테면 그는 공양간 스님으로 법열의 세계에 오른 것쯤 보인다. 그러므로 화자인 나는 그의 친구라는 속세의 인연을 핑계 삼아 그 밑에 들어가 “영원한 불목하니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어른 팔뚝만한 장작을 입 이따만하게 벌린 아궁이에 들이대며 불 때다가 그 앞에서 자지가 노릿노릿해질 때까지 조울다가 또 지청구 먹는” 그런 불목하니. 아하, 불목하니이다. 다른 불목하니도 아니고 조금은 모자란 것 같은 그런 불목하니. 생명의 상징인 “자지가 노릿노릿해질 때까지 조울다가 또 지청구 먹는” 인간. 나의 갱신은 공릉 스님이 아니라 이와 같은 불목하니인 것이다.

당신은 말할 것이다. 따르꼬프스키와 불목하니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고. 그러면 어떤가. 꿈속인데? 꿈속에서는 따르꼬프스키나 불목하니나 뭐가 다를까.

나는 이 지점이 몽상과 갱신의 집약점이라 여긴다. 하찮은 것과 귀한 것의 경계가 홀연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평등한 가치와 생명 있는 것들의 존재적 무게감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3. 기우뚱과 떨림을 살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심이 흔들린다. 몽상과 갱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을 더 내려놓아야 할까. 어떤 것을 더 내려놓아야 중심 바로설 수 있을까.

 

마른 나뭇잎 하나를 몸에서 내려놓고

이 가을 은행나무는 우주의 중심을 새로 잡느라고

아주 잠시 기우뚱거리다

―「저녁에」 전문

 

이런 물음 앞에 이시영은 가을 날 어느 저녁, 은행나무를 가리킨다. 그의 저녁 풍경에 들어온 가을 은행나무는 무구하다. 화려하지도 부산하지도 않다. 현란한 노랑은 전혀 없다. 그렇다고 헐거움은 아니다. 다 떨군 자의 가벼운 몸놀림으로 은행나무는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조용히 응시하면서 그는 갱신하는 중이다. 세상에 조응하는 깊은 응시를 담아 그는 “마른 나뭇잎 하나를 몸에서” 마저 내려놓는다.

그런데 단순해 보이는 이 행위의 결과가 실은 만만치 않다. “마른 나뭇잎 하나를 몸에서 내려놓”는 순간, 그는 기우뚱, 축이 기울어지고 동시에 그와 함께 우주의 중심도 기우뚱 흔들리는 것이다. 조응 속 갱신이며 갱신 속 떨림이다.

나는 이 떨림에 흠칫 소름 돋는다. 마른 나뭇잎과 가을 은행나무와 우주는 이 떨림으로 교감하고 또 서로 갱신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중심을 흔드는 것은 어떤 거대한 물질이 아니다. 아주 미미하고 사소한 존재들이다. 은행나무가 마른 나뭇잎 하나를 내려놓을 때조차 우주의 중심축은 흔들린다. 우리가 보지는 못하지만 또 그런 중심축을 새로 잡느라고 은행나무는 아주 잠시 기우뚱거린다. 무언가 내려놓을 때의 이와 같은 기우뚱거림, 나는 이것을 ‘은행나무의 몽상’이며 ‘은행나무의 갱신’이라 여긴다.

자, 저녁의 비애에서 비롯된 그의 몽상은 이제 기우뚱과 떨림으로 귀결되는 갱신을 낳았다. 나는 바로 이것이 이시영 시의 새로운 득의의 미학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건조한 인용체 시들이 겉이라면 이와 같은 몽상 시들은 그 속이다. 이 둘이 내가 보기에는 이시영 시학의 겉과 속인 것이다. 그러니 이시영 시를 말할 때 이 둘은 한 쌍으로 함께 운위되어야 하리라 여긴다. 아마도 이시영이 그리고자 하는 세계는 이 둘이 한 몸으로 섞이어 있는 그 어떤 공간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삶도 죽음도 함께 어우러져 “때론 더운 김도 내뿜으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공간.

 

평생을 저 앞들에 엎드려 일하시다

죽어 북망이라 찾아든 곳이 겨우 동네 뒷산 야트막한 가래뜸

흥대댁 논실댁 곡성댁 새터댁 냇가물댁 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이좋게 누워 때론 더운 김도 내뿜으며

저세상을 새로 살고 계시구나

―「저세상」 전문

 

그 모든 우여곡절을 넘어 우리가 당도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기운차게 세상을 누비던 이도, “평생을 저 앞들에 엎드려 일하시”던 이도 “죽어 북망이라 찾아든 곳이 겨우 동네 뒷산 야트막한 가래뜸”이다. 이것이 삶이요 죽음이다. 누군가는 원대한 우주를 품은 그릇이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평생 동안 호미나 잡는 인생이었지만 북망은 한 곳이다. 다르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흥대댁 논실댁 곡성댁 새터댁 냇가물댁” 들 삶을 찬찬히 그려본다. 살아서 그들은 온갖 악다구니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날보다는 산과 들과 사람들과 함께 서로 어울리는 도란도란한 날들이 더 많았을 거라 여긴다. 서로 깊이 교감하지 않으면 시골 삶은 정말 살기 어렵다. “평생을 저 앞들에 엎드려 일하”셨지만 그들이라고 하여 어찌 이 같은 천지조화 속을 모르겠는가.

공간이야 비록 아주 작은 골짝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루하루의 삶은 그들을 늘 새로운 갱신의 날들로 이끌었으리라 나는 짐작한다. 그러니 “동네 뒷산 야트막한 가래뜸”에서 저렇게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이좋게 누워 때론 더운 김도 내뿜으며/저세상을 새로 살고 계시”는 것 아니겠는가.

죽음도 이쯤 되면 참으로 다정한 인생이겠는데 당신은 어떤 삶의 종결을 바라시는가. 나는 오늘 저녁쯤 내 삶의 새로운 갱신을 위해 이시영 시의 몽상에 기우뚱 빠져 보려 한다네.

 

정우영∙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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