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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책크리틱/장이지/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박시하 시집 <눈사람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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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657회 작성일 13-10-0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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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리틱/장이지/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박시하 시집 <눈사람의 사회>

 

 

1. 초월 욕망과 그 좌절의 기록

박시하의 첫 시집 <눈사람의 사회>가 나왔다. 생물학적인 구분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박시하의 시들은 여성적이다. 남성적인 시인들이 편집증적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데 골몰하는 반면, 여성적인 시인들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예민한 감관을 통해 받아들인다. 이러한 구분이 온당한지에 대해서는 사실 자신이 없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 두 대극의 경향이 있다는 것이고, 박시하가 예민한 감관의 소유자이며, 그런 의미에서 서정시의 이념을 충실히 체현하고 있는 시인이라는 점이다. 서정이라는 것이 세계를 마음의 필터로 걸러내는 것이라면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시를 위트나 요설로 채우고 있는 시인들이 창궐하고 있는 이즈음의 시단에서 박시하의 위치는 특별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한 자의 아름다움, 많은 것을 잃고 미적인 것을 향해 날아가려고 하는 결여된 자의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한없이 노래에 가까워지려는, 그것도 “부르지 않은”(「꿈에 관한 꿈」) 노래에 가까워지려는 아름다움이다.

 

손톱만큼만 확연히 자라고 싶지만

짓눌린 구두 굽들은

거꾸로 자란다

전동차가 덜컹댈 때

나와 너는 함께 덜컹댄다

오로라

오로라, 오로라

검은 새 한 마리 돌아오며 묻는다

아름답지 않니?

나는 어느새 울고 있다

오로라를 본 적이 없습니다

발밑으로

검은 오로라가 흘러간다

―「오로라를 보았니?」 부분

 

박시하는 ‘오로라’를 보지 못했다고, 다시 말해 아름다운 것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발밑에 있는 그림자에게 ‘오로라’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아름답고 화려한 삶을 살고 싶지만, 일상은 “짓눌린 구두 굽들”처럼 누추하게 마모되어 간다. 자신의 그림자에게 ‘오로라’라는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옥죄는 삶의 잡다한 조건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이것을 초월 욕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꾼다. “지구를 떠나다니 정말 멋진 일이지요”(「우주 정복」)라는 블랑쇼의 말에 그녀는 밑줄을 긋는다. 그러나 언제나 이 초월은 실패한다. “검은 오로라”는 여전히 발밑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오로라’의 상징은 「검은 새」에서는 ‘새’의 상징으로 변주되고 「우주 정복」에서도 “별빛 속에서 푸드덕대는 소리”로 활강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녀는 로드 킬로 희생된 비둘기 날개가 자동차 타이어에 으깨지는 도로의 풍경(「바닥이 난다」)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인간이 ‘날개’를 달지 않은 이유(「조세핀의 날개」)를 곰곰 반추한다.

 

2. 패러독스로 가득한 세계, 정치로서의 시

박시하는 세계를 ‘새장’으로 규정한다(「오래된 새장」). 그리고 그 세계를 그녀는 역설이 가득한 곳으로 파악한다. <눈사람의 사회>에는 유독 패러독스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수사법의 편향에는 그녀의 세계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조금은 이유가 있고/조금은 이유가 없으며”(「잡job」)라고 그녀는 직업의 세계를 요약적으로 설명한다. 세계는 “눈 뜬 눈먼 이들”과 “눈먼 눈 뜬 이들”(「4:85 p.m.」)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란 장소가 아니면서 장소이기도 하다(「우주 정복」). 세계는 설명하기 어려우며 때로는 반대로 매우 쉽게 설명되어 버린다. 어떤 의미에서는 엉터리다. 이 엉터리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이 초월에 대한 꿈은 매번 좌절된다. 초월이 좌절된 인간이 이 패러독스로 가득한 세계에서 패러독스로 가득한 세계의 주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편으로 초월에 대한 꿈을 계속 꾸면서도, 한편으로 지상에서의 연대를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눈사람의 사회」에서 박시하는 모나지 않게 동그래진 눈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악수를 청하지 않는 정경을 그린다. 모나지 않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이 반드시 어떤 연대나 우의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눈사람의 사회’란 그러니까 동정 없는 사회, 공감 없는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연대나 우의, 공감이 넘치는 사회를 상상한다.

이 시집에 대한 추천사에서 이문재는 박시하의 시가 “나쁜 문학-미학”이 아니라 “좋은 윤리학-정치학”에 가깝다고 평했는데, 그러한 지향이 박시하의 시에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2부 ‘타인의 고통’에 묶인 시들에서 시와 정치의 결합이 두드러진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시인이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측은지심으로 약한 자의 편을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도 박시하의 시가 1980년대에 태어난 젊은 시인들의 시보다 강한 ‘공감력’의 산물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박시하의 시에 나타나는 ‘정치’가 1980년대 운동권 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광장의 불확실성’에 대해 노래한다.

 

사라진 길에게

사라진 길의 안부를 묻는 저녁이네

나는 광장의 일몰처럼 천천히

붉은 팔을 활짝 펴고

눕네

과연 혁명은 일어나지 않지만,

광장은 광장이 아닌 것이

아니네, 아직은

―「광장의 불확실성」 부분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 광장은 1980년대의 그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작동을 하지 않는다. 광장은 역사의 소문으로만 전해진다. 광장은 거의 망각될 뻔했다. 그러나 박시하가 말하는 광장의 불확실성에는 ‘아직’ 광장이 광장 아닌 것이 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또한 포함되어 있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상상력이 더 힘을 얻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박시하 시에 나타난 정치적 상상력의 기저에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하는 선의와 자유에 대한 갈구가 깔려 있다. 그녀는 「팬클럽」에서도 ‘광장’을 호명해낸다. 광장에서 주인공은 “강경대나 박종철 오빠”처럼 언제나 남성이었고, 여성들은 그 남성들의 연인이거나 팬으로서 존재해왔음을 그린 시로 여겨진다. 그런데 나는 「팬클럽」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우선은 광장의 군중들이 ‘팬클럽’으로 유비되는 것이 아쉽고, 더 본질적으로는 박시하의 정치적 상상력이 광장을 넘어서 군중들을 광장으로 집결시키는 동기로서 구체적인 사회 문제들을 제대로 부각시키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조강석이 박시하 시의 ‘정치성’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나는 호의라고 생각한다.

 

3. 순간을 산다는 것

박시하가 ‘광장’에 대한 사유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들의 세목으로 더 깊이 끌고 내려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내 문제의식이 더 낡고 도식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눈사람의 사회>에서 매우 빛나는 부분을 발견했다. 박시하가 성숙한 시인이라는 것을 나는 「빛나는 착각」과 「구름의 상실」에서 확인했다.

 

여긴, 광장이다

눈이 하얗다

하늘이 파랗다

새들은 어떤 착각으로 날까

어제가 있었다

내일이 있다

직선이 존재한다

나는 아름답다

얼룩으로 아름답다

네가 더욱 아름답다

두려움으로 아름답다

우리가 사랑한다

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빛나는 착각」 부분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어느 순간 착각으로 판명되는 것을 ‘환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푸른 하늘을 날아오른 새는 자유를 위해 날아올랐을 수도 있지만, 창공에 자유가 있었는지 우리는 확정할 수 없다. 역사는 무수한 실패, ‘광장의 실패’를 보여준다. ‘나’는 “얼룩”을 가졌을 뿐이고, ‘너’는 “두려움”에 떨었을 뿐인데, 서로는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보고 사랑에 빠진다. 박시하는 이 ‘착각’을 ‘환멸’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빛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른다. ‘착각’이기 때문에 광장을 분쇄한다거나 사랑을 무르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착각도 삶의 일부기에 그 착각의 대가를 떠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마지못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박시하는 이 ‘착각’의 힘을 긍정하면서 삶의 오묘함, 삶의 위대함을 부각시킨다.

 

너는 잼 뚜껑을 열고

나는 수많은 하나의 순간을 연다

연민과 거부와 대기로 이루어진 전 세계

붉은 별들이 내려앉은

너의 환상과 나의 사랑을

 

그 순간들을

우리는 밀고 간다

―「구름의 상실」 부분

 

‘나’와 ‘너’는 전혀 다른 존재다. ‘나’와 ‘너’가 ‘우리’로 묶인다고 해도 그것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나’와 ‘너’를 균질적인 상태로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 ‘나’와 ‘너’인 채로 매 순간을 살아간다. 어제의 ‘우리’를 오늘의 ‘우리’가 밀어낸다. 그런 맥락에서 삶이란 ‘상실’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를 교정하지 않고 ‘너’는 ‘나’를 계몽하지 않는다. 다만 ‘순간들’을 살아낼 뿐이다. 삶은 착각의 연속이지만, 그것이 비록 먼 훗날 착각으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이 순간들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지금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던 욕망이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순치된다. 이 과정을 성숙의 과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눈사람의 사회>의 드라마다.

나는 초월에 대한 박시하의 꿈도 이해할 수 있고, 광장에 대한 그녀의 사유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심정이지만, 우리가 순간순간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데 이르러서는 옷깃을 여미고 싶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작위가 아니라는 점을 나 스스로 수긍했다는 의미다. 박시하가 훌륭한 시인이라는 데 재론의 여지가 없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연구서로 <한국 초현실주의 시의 계보>, 번역서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있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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