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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미니서사/박금산/믿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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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
미니서사
박금산
믿음에 대하여
나는 마을 독서실, 대학교 도서관, 대학원 도서관, 공공 도서관 출신이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독서실에서 보냈고 대학생 때는 학교 도서관을 오랫동안 이용했다. 그 다음에는 대학원을 나왔고 그 다음에는 갈 곳이 구립 도서관, 시립 도서관 등으로 정해졌다. 그때마다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 책을 통해 성공해 보겠다는 절치부심의 침묵이 베어들어 있는 의자에 앉아 우리는 지나가는 청춘을 서로 용인하면서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듯이 식이습성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잊히지 않는 케이크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학위논문 주제를 상담하러 갔을 때 지도교수가 말했다. “이거 아이들 가져다 먹여라.” 지도교수는 녹차 롤 케이크를 내밀었다. 나는 플라스틱 나이프로 단면을 예쁘게 잘라 아이들 입에 넣어주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스승의 날이 끼어 있었던 달이라 지도교수 연구실에는 선물이 많았다. 그 중 하나를 그 분이 내게 주셨던 것이다.
나는 제빵회사 로고가 박힌 종이 가방을 들고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논문은 쓰기 전까지만 의미 있는 것’이라는 명언을 지도교수는 종종 말하곤 했다. ‘욕망이란 채우고 나면 허망해지는 것’이라는 정신분석 이론가의 말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학위를 받고 나면 그 내용이 어디로 갔는지 말끔히 잊히곤 하는 것이 학위논문이기도 하다.
집에 갔더니 손이 몹시 허전했다. 도서관에서 짐을 정리하던 도중 옆 사람 책상 위에 케이크 가방을 잠시 올려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밤사이에 케이크가 상할 것이 염려스러웠다. 그리고, 내일은 잊지 말고 가져와야지, 생각했다.
이튿날이었다. 롤 케이크는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버렸구나.’
‘이 몹쓸 여자가 버려 버렸구나.’
옆 자리에서는 사회학 전공 예비 박사가 부산스럽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녀는 나를 흘끔거리면서 무슨 말인가 하고 싶다는 눈치를 보였다. 나는 케이크의 행방을 묻고 싶었다. 그런데 버렸을 것이라는 판단에 확신이 들어서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나는 화딱지가 나서 여자를 코너로 밀어놓고 삿대질을 하고 싶었다.
‘왜? 옆 사람이 네 책상에 뭘 좀 올려두었다고 해서 화가 났니?’
그러나 고요한 도서관 안에서 하고 싶은 말을 드러내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침묵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다시 이튿날이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도서관이 텅 비었을 때, 여자와 나만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 나는 기어이 묻고 말았다.
“그거 어떻게 하셨어요?”
여자가 대답했다.
“어머, 먹으라고 놓아두신 줄 알고, 먹었어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독이 들어 있었으면 어쩔 뻔했나. 어쩐지 믿음이 무모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잊지 못한다.
박금산∙1972년 여수 출생.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생일선물>,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연작소설 <바디페인팅>. 장편소설 <아일랜드 식탁>, <존재인 척 아닌 척>.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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