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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미니서사/김혜정/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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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971회 작성일 13-10-0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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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

미니서사

김혜정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여자는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스러지는 해를 바라보며 회환에 잠겼다. 처음 이 마을로 왔을 때는 황금빛 들판을 보거나 낙엽이 지는 오솔길만 걸어도 몸속의 무언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어. 솟구치는 피의 열망을 들으며 여자는 하루에도 수십 번 되뇌었다. 산과 들, 개울과 바람의 소리를 화폭에 옮긴 적은 없지만 내면에 스며드는 모티브들이 있었다. 그것이 여자를 살아 숨 쉬게 해주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 스러지는 해의 색조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은 자신이 여자는 낯설었다.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라고 느꼈다.

여자는 갑자기 어지럽고 머리가 부서지는 것 같았다. 이미 기력이 소진한 심장이 언제라도 여자를 놓아버릴 듯이 위협했다. 귓속에서 날벌레들이 윙윙거리며 울어댔다. 고통을 떨치기 위해 여자는 손에 힘줄이 도드라지도록 흔들의자를 붙들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하지만 이렇게 끝나고 나면 더 이상 고통은 없겠지. 여자는 스스로 위안했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구름을 타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너울거렸다.

저만치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늦가을! 여자는 심장 박동이 조금씩 커지는 것을 느꼈다. 저 자는 또 뭐지? 왜 하필 지금 나타나는 거야? 나더러 다시 살아가라고? 붓을 들고 내면에 스며있는 모티브들을 차례로 화폭에 옮겨야 한다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여자는 붓을 들지 못했다. 매번 발작처럼 충동을 느꼈다가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것은 전보다 더 생생해지곤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여자는 더 이상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그와 마주하기 싫어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여자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돌아가, 돌아가 줘. 나는 이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싶어. 그가 고개를 저으며 여자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었다. 당신이 얼마나 나를 기다려왔는지 알아. 나를 놓아줘. 제발! 아니,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해. 당신도 그걸 알잖아. 여자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부질없는 짓이야. 곧 겨울이 올 테니까.

 

김혜정∙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장편소설 <달의 문>으로 서라벌문학상 신인상 수상.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장편소설 <독립명랑소녀>로 ‘2010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경기국제통상고등학교에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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