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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김구용시문학상/김중일/해바라기 전쟁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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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일 대표시
해바라기 전쟁 외 4편
구형 턴테이블 위에 낡은 LP버전의 지구를 올려놓고 모래바람의 목쉰 노래를 듣는 밤입니다. 보내주신 계절들은 잘 받고 있습니다. 항상 부족한 계절만큼 우리는 또 한 무리의 어린 병사들을 잃어야 합니다.
한 번도 울어본 적 없다는 신의 동공같이 까맣고 건조한 대사막의 밤은 아름답습니다. 별들을 무수히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백전노장, 불멸의 전장영웅 밤과 하늘은 나란히 선봉에서 지금도 우리를 지휘하는 중입니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어린 병사들의 계급장으로 쌓은 계단을, 끝없이 밟고 구름 위로 오르는 야간행군은 얼마나 고되고 가혹한 훈련인지요.
배신자들. 오래전 우리는 해바라기를 되찾기 위해 출정했습니다. 시간의 해방군으로부터 마을이 점령당하고, 해바라기들은 모두 흩어졌지요. 우리는 더듬이가 잘려나간 귀뚜라미처럼 숨어서 울어야 했습니다.
마음의 한 가지 얼굴. 미친 해바라기들. 고작 하나의 마음일 뿐인 그것들은 변변한 몸 없이도 우리를 떠나 행복할까요. 오늘도 나는 대사막 한가운데에서 얼굴 없는 해바라기들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턴테이블 위에서 아직도 노래는 계속됩니다. 해바라기의 목쉰 노래를 따라 나는 턴테이블 위를 둥글게둥글게 돌고 또 도는 야간행군을 하는 중입니다. 먼저 간 병사들의 시체가 내 그림자 대신 발목에 매달려 질질 끌리는 밤입니다.
당신은 안전하십니까?
나는 마리오네뜨처럼 유쾌하고 분주하고 심각합니다. 검고 질긴 비가 내 손목을 휘감아 들어올립니다. 지금은 비의 리듬을 따라, 슬퍼하지 않고 우는 법, 기뻐하지 않고 웃는 법을 연습 중입니다.
―시집 <국경꽃집>(2007.4)
담장 속으로
담장을 확 치며 전동차가 들어옵니다
나는 온몸으로 담장을 밀고 담장 속으로, 들어갑니다
긴 대열에 합류한 난 빙벽에 걸린
자일 하나를 겨우 차지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깜박 졸기도 합니다 꿈속에서만
잠깐씩 등장하는 마법사가 말하길,
대열 속의 사람들이 하는 말은
몽땅 다 거짓말, 이 충고도 어쩌면 거짓말
나 또한 대열 속에 있으므로
나는 캄캄한 담장에 둘러싸인 채
담장을 따라 퇴근을 합니다
땅속으로부터 솟구쳐 한강 위를 달리는
담장 한쪽은, 오늘도 둥글 불덩어리 시계가 걸렸던 자리
내가 뒤돌아선 그림자의 어깨를 툭 치며
지금이 몇 시쯤 됐을까요?
물었을 때, 떠난 애인이 말없이 돌아보며
다 녹아 뚝뚝 떨어져 내리는 시곗바늘을 가리켰지요
담장 너머로 가기 위해 나도 잠시
담장에 기대어 피곤한 눈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꿈결처럼 뒤돌아보며 오늘이
무슨 요일인가요? 아득하게 물었을 때
죽은 할머니가 꽝꽝 얼어버린
시곗바늘을 입김으로 녹이고 있었지요
담장 한쪽은, 오늘밤도 둥근 얼음 시계가 걸릴 자리
나는 분명 담장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사방은 허허벌판, 무슨 일인지 마법사에게 물었을 때
이 저녁, 장밋빛 붉은 얼굴로 줄지어선 너희가 담장이니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자꾸 허물어져 내리는 담장 한쪽을
울음벽돌로 채워 넣는 일뿐
도대체 담장 너머엔 무엇이 있기에
자꾸 모두가 내 반대쪽으로만 허물어져가는 것일까요
―시집 <국경꽃집>(2007.4)
아무튼 씨 미안해요
1.
막사로 기어들어오려는 새끼 표범 한 마리를 쐈더니 목구멍에서 가는 신트림이 가르랑 올라온다 하얗게 저물어가는 새벽의 거대한 궁둥이를 향해 할 말이 있다
엽사는 개머리판을 잡고 있던 손바닥에 찬 땀을 바지춤에 닦으려다가 멈춘다 자신의 굵은 손금을 따라 붉은 초원을 횡단하는 새까만 누 떼가 보인다 그들은 첨벙첨벙 엽사의 손금에 발 담그고, 목 축이고, 계속 행군한다
엽사는 무리 중 한 마리를 잽싸게 조준한다 암사자에게 공격받아 개껌처럼 짓뭉개진 오른팔 대신 엽총을 어깨에 걸고, 총구에서 기필코 오른손이 불쑥 튀어나와 악수를 청할 때까지 엽총을 단단히 틀어잡고, 숨을 멈추고…… 사실 엽총 따윈 없다
죽는 건 죽이는 것보다 항상 먼저 벌어지는 일 멸종위기종을 죽이고 얻은 밤들은 당연히 조금씩 멸종되고 있다
엽사는 광활한 새벽을 무성한 털처럼 뒤덮고 있는 잿빛 안개에 기대 목마른 기린의 길게 늘어지는 엿가락 같은 목소리로 외친다
모두들 그곳에서는 안녕하시오오?
모두들 그곳에서는 안전하시오오오?
한 번은 하늘을 빼곡히 메운 새들을 모두 명중시킨 적이 있다 떨어진 새들을 헤아려보니 한마리가 사라져 행방이 묘연했다 결국 찾지 못하고 새의 장례마저 포기하자 다음날부터 아내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분만 중 아내는 아이와 함께 죽었다 뒤늦게나마 새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엽사는 낡은 엽총을 분해 소제한다 엽총에 나사처럼 박힌 나선형의 바람과 함께 유체이탈한 짐승들의 영혼이 화약 열기와 뒤섞여 풀려나온다
늙은 사냥개의 건조한 콧등처럼 씩씩대는 쌍발엽총의 총구로, 여전히 사냥감의 냄새를 기막히게 맡는 새까만 총구로, 대초원의 가장 거대한 짐승 모든 짐승들의 아버지 새벽의 무성한 털 잿빛 안개를 구석구석 헤집는다
총구에서 잃어버린 손이 활짝 피어나 용서의 악수를 청할 때까지 엽총을 놓지 않으며, 숨을 멈추고, 하나 두울 세엣…… 이미 엽총 따윈 없다
외팔이 엽사는 건조하게 웃는다 웃음은 초원의 모래바람과 함께 금세 흩어진다 아무튼 웃는다 아무튼 말한다
2.
나의 총알이 궁둥이에 박히고도 평화롭게 진흙목욕을 즐기는 코끼리가 있었소. 솔직히 말하면 그건 실수였소. 그 두툼한 갑주 같은 궁둥이에 값비싼 은탄을 박아넣은 거 말이오. 아무튼 그 코끼리는 백일 밤낮을 지독한 건기의 대초원에서 마지막 남은 워터홀 주위를 떠나지 않았소. 아무튼 작은 씨앗처럼 은탄이 심어진 궁둥이 부근에서는 급기야 자작나무 밑동으로 추정되는 엉치뼈가 드러나기 시작했소. 아무튼 단속반에게 그것을 건기의 극심한 가뭄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도 없었는데, 궁둥이에 잎이 나고 지고 나고 지고 잎이 지며 진물이 뚝뚝 떨어졌소. 아무튼 총알을 맞고도 목숨이 붙어 있다면 그때부턴 식물의 시간을 사는 겁니다. 아무튼 덤 같은 거죠. 아무튼 이번 생은 소원하던 대로 옆으로 누워 자고 있는 자작나무의 우듬지가, 코끼리 코 옆으로 삐죽하게 솟아 있는 걸 맙소사, 엽사 인생 반백년 만에 발견한 것이었소.
아무튼 코끼리는 그저 평화로워 보였소. 고독해 보였지만 고요해 보였소. 그런 합체, 아무튼 나는 이상하고도 엄청난 고독에 압도당하여 나도 모르게 사과를 하고야 말았소. 유감스럽게도, 아무튼 코끼리에게는 아니오. 가물고 가물어 쩍쩍 갈라지고 터진 초원의 한 줌 땅덩어리 같은 코끼리, 아무튼 씨의 궁둥이에 사과했소. 목마름에 대열을 이탈한 어린 누처럼, 한밤에 쏴 죽인 새끼 표범처럼, 그 새처럼, 먼 대륙의 군락지에서 훠이훠이 날아와 한 마리 거대한 짐승의 몸속에 깃들고 움트고 잠든 자작나무, 아무튼 씨에게 사과했소.
자작나무의 말로 코끼리의 말로 우물쭈물하다가, 자작나무의 핼쑥한 얼굴을 하고 코끼리의 잿빛 장화를 신은 채 아무튼의 갈라진 입술로 아무튼 씨에게
아무튼 씨 미안해요
제가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말입니다.
―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2012.4)
천사
나는 그것을 흔히 천사라고 부르는데, 간혹 천사는 비를 타고 오기도 했다. 흥분한 비가 흥건히 우리를 적시면 기립한 우리는 모두 이곳의 발기다. 비틀거리는 산천초목은 지구의 적록색 구토다. 거대한 토사물 속에 천사는 산다. 천사는 나라는 나락의 가장 말단인 손톱을 붙들고, 메아리 같은 몸으로 매달려 있었다. 내 꿈을 덮는 홑이불처럼 말이다. 우리의 이런 관계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막 태어났을 때 내 손끝에는, 미완성의 잠언 끝에 박힌 작고 단호한 문장부호처럼 손톱이 찍혀 있었다. 내 손톱은 나를 붙잡고 있던 천사가 끝내 손을 놓아야 했던 마지막 순간 꾹 힘줘 눌렀던 자국이었다. 그날 이후 내 열개의 손톱은 밤이면 밤마다 나로부터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 별들의 그림자가 일력처럼 뜯겨나간 흔적. 나는 해변 위에 그 신성한 손끝으로 이 글을 읽는 무고한 당신에게 저주의 문장을 쓰고 망설이고 망설이다 지우지 않고 돌아왔다. 나의 두 손이여, 청색 파도가 밀려오는 열개의 붉은 해변을 돌며 녹색 안개의 이빨에 물어뜯긴 내 손톱이여, 오늘의 혼魂들이 읽고 있던 한 장의 나를 어제로 넘기는 갈피여. 하루 한 페이지 두께로 손톱은 하얗게 조금씩 부풀었고. 잘라도 잘라도 내 손끝에는 열개의 말줄임표가 돋아났다.
―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2012.4)
밀주
단 한 번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고 비웠고 멀리 던져 깨버렸다. 여독 속에 내 무릎을 훔쳐 베고 잠든 너의 두 눈은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에 덮여 있다. 꿈을 꾸고 있다는 건 꿈을 빌리고 있다는 것. 너의 감은 눈. 감은 눈은 달빛에 깊이 찔린 상처 같다. 너의 긴 속눈썹은 너라는 하얀 주머니를 급기야 꿰맨 자국이다. 감은 눈의 너. 지금 여기 내 무릎을 벤 너라는 주머니 속에는 나와 같은 부피의 죽음이 밀주密酒처럼 가득하다. 나는 누가 볼까봐 황급히 너의 눈을 두 손으로 꼭 틀어막았다. 내 손바닥의 수면 아래서 노오란 꿈들이 치어처럼 일렁이는 감은 눈으로 너는 우리가 기대앉은 나무를 보았다. 나무가 흔들리는 건 나무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건 바람이 기억한다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옆을 돌아봤을 때 번번이 거기에 없는 것은 그냥 이제 없는 것이다. 내 무릎을 베던 너는 내 무릎을 베어 낡은 베개처럼 옆구리에 끼고 갔다. 잠의 노점상 같은 너의 침대로 더 깊은 잠을 빌리러 갔다. 너의 눈에 가만히 입술을 대고 너의 이름을 불렀다. 새파란 밀밭에서. 너는 혼자 비어가는 술병처럼 넘어졌다. 경전을 베듯 무릎을 베었다. 아그니에서 수리아까지 미트라에서 인드라까지 오랜 방문이었다. 밤하늘 멀리 우리를 메모해둔 휘파람들은 사라졌다. 밀밭의 까마귀 떼가 물고 갔다. 호주머니를 뒤집자 작은 돌멩이처럼 툭 떨어지던 불과 태양, 맹약과 용기 등의 낱말들. 그 잿빛 낱말들을 하나하나 가만히 올려보던 취한 입술도 함께.
―≪문학사상≫(2012년8월호)
심사평/예심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다섯 권의 시집
김구용시문학상은 등단 15년 미만 신진 시인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고, 故김구용 선생의 시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뜻 깊은 문학상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새로 발간된 시집들 중, 김구용시문학상 제정 취지에 부합하는 시집들을 한 자리에 놓고 우리들은 장시간 숙의했다. 1차 토의 결과, 30여 권의 심사 대상 시집들 중에서 10권의 시집들을 선별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 시집들의 깊이와 개성, 해당 시인들의 시적 도정, 또 김구용 시와의 연계성 등을 중심으로 우리들끼리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결과 본심에 추천할 다섯 권의 시집들이 결정되었다. 우리는 이 다섯 권의 시집들이 어느 모로 보나 많은 사람들이 공명할 수 있는 울림통을 지닌 가작들이며, 저마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개성으로 충만한 시집들이라는 데 흔쾌히 동의했다. 여기에서 해당 시집들의 추천 사유를 밝히면 다음과 같다.
이현승의 시는 단정하다. 거친 사유나 혼란스러운 이미지가 횡행하는 시단에 그의 시가 지닌 논리 정연함과 단정함은 하나의 미덕이 될 수 있다. 사물들의 이면에서 존재의 비의를 읽어내려는 그의 집중력, 그의 뚝심은 근 2, 3년 사이, 그의 시적 성숙을 대변한다. 하나도 허황된 이야기가 없이, 읽는 편편마다 위트와 페이소스가 알맞게 배합되어 있다.
하재연의 시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냉정한 관찰력이 도드라진다. 인간중심적인 환상을 제거함으로써 얻어진 이 세계와 맞서는 힘, ‘不和力’은 차가우면서도 의연함을 더불어 갖추고 있어서 놀랍다. 출산과 관련하여 쓰인 시편들이 보여주는 육체에 대한 기묘한 감각도 주목할 만하다. 첫 번째 시집에서 두 번째 시집으로 이어지던 시인의 개성이 근래에 발표하는 시편들에서는 다른 방식(인간의 감정에 좀더 집중하는 방식으로)으로 변모하며 시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신용목은 역사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시를 쓰는 태도를 취해왔다. 저 의식을 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저 의식을 견지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부산물이 산출된다는 점이다. 한 개인의 의식이 감당하지 못한 완강한 현실의 사실이 그의 이번 시집에 자주 눈에 띈다. 이전의 시집들이 보여주었던 단순한 서정의 어법이 이번 시집에서는 복잡다단해진 면이 없지 않은데, 이
또한 시의 품이 커지는 데 기능한 작법의 발전으로 볼 수도 있다.
김중일의 시에서는 ‘알레고리의 건축술’이 돋보인다. 이미지를 현란하게 활용하는 듯하면서도 알레고리적 사유가 만들어낸 배치 속에서 그것들을 하나의 의미 지평으로 통합하는 시작법이 개성적이다. 세계의 고통을 쉽게 자기화하지 않고 그것들과 충돌하는 내면을 호들갑스럽게 떠들지 않으면서 그 고통의 심연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시적 태도 또한 미덕이다. 벽돌을 얹듯이 대강 줄글을 쌓아올리는 것 같은데, 거기에는 또 ‘어쩔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난다.
진은영의 시는 시인으로서의 삶과 시민으로서의 삶을 중첩시켜 그 둘의 길항과 충돌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한 시인의 언어가 공동체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모색하는 태도도 높게 평가받을 부분이다. 세 권의 시집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감각적 측면이 한층 깊어져 시인의 사유 또한 더 탄력적인 것이 되었다. 올바른 생각을 쏟아내던 언어가 올바름과 그름의 구분을 넘어서, ‘언어의 활력’에 도달하는 경지를 이루었다.
예심 송종원, 이영주, 장성규
심사평/본심
김구용시문학상의 꿈
김구용시문학상이 금년으로 3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심사위원으로서 김구용시문학상에 거는 꿈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시단을 이끌어 갈 신진시인들의 대표적인 관문이 되었으면 하는 꿈입니다. 지금 문단에는 수많은 상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문단은 문단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문학상을 제정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능한 신인에게 주는 상은 없습니다. 저는 이 상이야말로 우리 시단을 이끌어 갈 미래의 시인들이 어떤 것보다 받고 싶어 하는 상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비록 3회이지만 예심위원을 비롯하여 모든 분들이 양심껏 심사하여 왔다고 자부합니다.
최종심에 올라온 시인은 이현승, 하재연, 신용목, 김중일, 진은영 다섯 분의 시집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들 시인의 작품을 한두 번 지면을 통해 읽은 적은 있지만 시집을 통해 본 적은 없습니다. 김구용시문학상 심사야말로 이 땅의 역량 있는 시인들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저에게는 되기도 합니다. 하나 같이 훑어본 소감은 잘 쓰는 시인들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잘 쓰면 뭐합니까. 잘 쓰면서도 저는 세대 차이가 없는 시를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렵지만 세대차이 없는 시로 저는 이상을 떠올렸습니다. 왜 일까요. 이상 시는 어렵지만 시대를 건너뛰고 아니 세대를 초월하여 읽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 시인들이 쓰는 시는 누가 읽을까요. 자신만이 창작자고 독자일까요. 저는 문학청년시절 난해시를 쓰던 때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저에게는 난해시를 써야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 썼던 게 아니었습니다. 내 또래의 젊은이들이 많이 쓰니까 유행처럼 따라서 한때 쓴 것이었습니다. 난해시란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과 같은 과정을 밟아야 되는 것은 아닌가. 오늘 날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룩된 것인가. 그런 면에서 구용의 시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정된 상이지만 너무 구용의 시세계와 닮은 시들을 고르는 것은 앞으로 고려해 봐야 될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년부터는 좀 폭넓게 특정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시를 잘 쓰는 시인에게 눈길을 주고자 합니다.
심사위원인 박제천, 장종권, 그리고 저는 오랜 검토와 숙의 끝에 제3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작으로 김중일 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를 선정했습니다. 이 시집에 담긴 내용은 특이한 소재가 아닙니다. 개인사적인 일상성만이 아니라 아니 역사, 기념일, 사건 등을 김중일의 시각에서 보고 또 무슨 소재든지 얘기가 되게 끌고 간 시집입니다. 시집의 첫머리에 실린 작품 「물고기」에서의 상상력으로 이끌어가며 시를 폭넓게 만들어가는 솜씨와 시집의 끝에 실린 「폭설의 반대편 폭우의 건너편」에서 폭설과 폭우를 보는 시인의 일상을 무너뜨린 시각과 “물구나무를 선다면 당장이라도 하늘에 가득한 적설을 밟을 수 있습니다”라는 작위성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서정성도 깃들어 있는 면을 이 시인이 가진 좋은 능력이라 보았습니다. 즉 사물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고 표현하는 면이 뛰어난 시인이라는 말입니다. 시인이란 무엇보다 남과 다른 그런 창조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게 되고 자신의 시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입니다. 김중일 시인 앞으로 좋은 시 많이 쓰시어 일가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본심 박제천, 장종권, 강우식(글)
수상소감
내 작은 고양이들에게
연일 한파가 몰아쳤던 새해 벽두에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퇴근해서 집으로 막 들어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통유리로 된 육중한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 제치는 찰나, 벌어진 문 틈새로 검고 묵직한 물체가 제 발목을 걷어차듯 격렬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안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연일 한파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듯 보이는 길고양이 한 마리였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저와 고양이는 대치하듯 침묵 속에서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현관문 밖에는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습니다. 저는 고양이를 문밖으로 내보내려던 생각을 금세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순간에 저는 저를 압도하는 어떤 절박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저는 어느 순간 고양이에게 비밀을 속삭이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게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춥고 배고픈 한 마리 고양이에게 이번 수상소식을 처음 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요즘 부쩍 어떤 잡념에 붙잡혀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쓴 시들은 세상 그 어디쯤을 떠돌고 있을까. 나를 떠난 시들은 세상 그 누구의 마음속에도 깃들지 못하고 집 없는 고양이들처럼 한파를 피해 찬바람과 더불어 거리를 전전하며 조금씩 계속해서 궁지로 내몰리고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급기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운명을 걷고 있을 게 분명하지 않을까. 난삽한 몽상과 두꺼운 몽환의 이불로도 다 덮을 수 없는 지난하고 무거운 현실의 경계에서 던져지는 내 어설픈 물음에 응답해준 대가로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을 떠돌고 있을 나의 시편들, 내 작은 고양이들에게 한 끼의 따뜻한 식사와도 같은 이번 상을 전합니다.
“현실의 그림자는 내 외로운 시각 안에서 결정한다.”(「시각視覺의 결정結晶」, 1952.)고 쓴 젊은 김구용 선생님의 고독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차가운 2013년의 오늘밤 저는, 1952년 환난의 시대, 서른 즈음의 김구용 선생님께서 혼자 시를 썼던 짙은 밤의 색채와 온도와 외로움의 질감을 상상할 것입니다. 제게 그런 소중한 기회를 주신 김구용시문학상운영위와 리토피아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012년 1월 수상자 김중일
김중일∙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단국대 공학부 졸업하고,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2년 결성된 <불편>동인으로 활동. 시집 <국경꽃집>(창비,2007), <아무튼 씨 미안해요>(창비,2012). 제30회 신동엽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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