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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연재/하종호연작장시④/보유 시경 제1작품 외 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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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292회 작성일 14-01-2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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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겨울호)연재/하종호연작장시④/보유 시경 제1작품 외 11편

 

 

하종오

 

 

 

보유 시경 제1작품 외 11편

 

 

님께서 태어나신 날, 저도 태어났습니다. 한 배에서 나와 형제가 된 우리가 첫 울음을 울 때 남들의 첫 울음도 들었습니다. 울음소리가 가득한 이 세상부터 알게 된 우리는 울음소리로만 우리를 알렸습니다. 우리를 알아주어도 그만 몰라주어도 그만인 이 세상에서 님께서 자지러들면 저도 자지러들고 제가 그치면 님께서도 그치셨습니다. 마을에서 개도 닭도 돼지도 소도 따라하여 누리에는 울음이 어스름을 끌고 오기도 하고 햇빛을 당기기도 했습니다만, 님께서 울다 잠드시면 저도 울다 잠자고 제가 잠깨어 울면 님께서도 잠깨어 우셨습니다. 그러면 남들도 울며 잠들고 잠 깨며 울었습니다. 저와 님을 우리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울음이 많은 땅에서 그런 형제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보유 시경 제2작품

 

 

 

님께서 걸음마 하신 날, 저도 걸음마 하였습니다. 님께서도 저도 울음을 울지 않게 되었는데도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곳이 있기에 찾아가려 했습니다. 님과 제가 서로를 바라보며 스스로 바닥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떼었을 때 뒤에서 남들이 따라왔습니다. 우리가 쓰러지기 전에 남들이 쓰러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가는 데까지 남들이 온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님과 제가 울음소리에 귀 밝아진 데는 울음이 우리가 온 길이어서 우리가 갈 길이기도 해서였습니다. 남들이 울음소리를 찾아 먼저 떠나가지 않은 것은 남들에게는 울음이 길이 아닌 까닭이라 여겼습니다. 그때 님과 저는 울음소리에 닿으면 성큼성큼 걸을 수 있는 이 세상의 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뒤뚱뒤뚱 걷기만 했습니다.

 

 

 

 

보유 시경 제3작품

 

 

 

 

님께서 말문이 트이신 날, 저도 말문이 트였습니다. 우리 눈에 꽃과 새가 보이고 우리 귀에 꽃피는 소리와 날갯짓소리가 들렸을 때, 우리 입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님께서는 꽃의 말소리로 사람에게 호통치실 수 있었고 저는 꽃의 말소리로 사람을 타이를 수 있었습니다. 님께서는 새의 말소리로 사람을 유혹하실 수 있었고 저는 새의 말소리로 사람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또 각기 다른 말소리로 꽃과 새에 대하여 만족과 불만족을 내뱉기도 했지만 같은 모양으로 서로 알아보고 같은 뜻으로 서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형제라는 사실을 소리 질러 퍼뜨렸더니 님과 제가 훌쩍 자랐습니다.

 

 

 

 

보유 시경 제4작품

 

 

 

님께서 아버지와 겸상을 하시던 날, 저도 겸상하였습니다. 님과 제가 부엌에서 밥상을 양쪽에서 들고 안방에 들여놓고 앉자, 아버지가 수저를 들었다가 놓고 나가셨습니다. 님과 저는 아버지가 남기신 밥을 먼저 차지하려고 잡아당기다가 엎질러 그릇을 깨고 말았습니다. 미안해해야 할 형제가 화를 내며 잘잘못을 따지면서부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집에서 형제는 밥그릇을 두고 삿대질하다가 돌아앉았습니다. 밥상이 님과 저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무릎걸음으로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둘이서 밥상을 맞잡아 부엌에다 내놓은 뒤라야 안방에서 뒹굴 수 있는데 님과 저는 외면한 채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날 후 님께서는 눈 치뜨고 저를 보셨고 저는 눈 내리깔고 님을 보았습니다.

 

 

보유 시경 제5작품

 

 

 

님께서 옷을 기우시던 날, 저도 옷을 기웠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만드신 웃옷 한 벌을 님과 제가 동시에 골라잡았습니다. 님께서는 이쪽 팔소매를 잡아당기시고 저는 저쪽 팔소매를 잡아당기니 실밥이 터지면서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님과 저는 형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서로 노려보았습니다. 형제가 번갈아 입으면 될 옷을 혼자 차지하려다가 각각 한 팔 소매밖에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을 확인한 다음 순간, 우리는 달려들어 깁기 시작했습니다. 온전한 한 벌 웃옷을 어머니한테서 더 받으면 되는데도 그리 하지 못한 것은 님께서는 형이라서 먼저 입어야 한다고 여기셨고 저는 동생이라서 먼저 입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형제간에 따지기에는 작은 일이기는 했어도 선후를 분명히 하려는 데에는 어머니가 처음 만드신 웃옷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보유 시경 제6작품

 

 

 

님께서 새 집에 드시던 날, 저도 새 집에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생애 처음으로 집을 지어놓고 앞마당에 와서 대추나무를 심고 뒷마당에 가서 감나무를 심으시는 사이, 이 방 저 방을 서로 차지하려고 님께서 들어가시면 저는 나오고 제가 들어가면 님께서 나오시었습니다. 아버지 몰래 형제가 다투다가 집을 나왔습니다. 집에서 보면 님께서는 저쪽으로 올라가시고 저는 이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형제는 점점 멀리 갔지만 아버지는 모르고 집 울타리를 치셨을 텐데, 제가 아버지의 새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때는 너무 먼 곳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님께서도 그러하셨겠지요. 저는 제 집을 짓고 싶어 주인 없는 땅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님께서도 그러하셨겠지요.

 

보유 시경 제7작품

 

 

 

님께서 멀리 가버리신 날, 저도 멀리 가버렸습니다. 제 앞에 놓인 땅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님께서 아니 계시니 대지는 더 넓고 더 거칠어서 저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다가 들꽃이 피고 새가 날고 강물이 흐르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저와 똑같은 모습으로 님께서도 도착하셨습니다. 발은 부르트고 손은 갈라지고 등은 굽고 얼굴은 검게 타서 님과 제가 함께 온 형제임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껴안고 그간 배가 고팠다는 말과 그리웠다는 말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러자 들꽃들이 향기를 내뿜고 새들이 우짖고 강물이 출렁거렸습니다. 제가 오니 님께서 오시고 님께서 오시니 제가 온 걸 아는 무리들이 날마다 몰려들어 님과 저를 둘러쌌습니다.

 

 

 

 

보유 시경 제8작품

 

 

 

님께서 식사를 준비하시던 날, 저도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님과 함께 차려놓은 식사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열매와 뿌리와 잎이었습니다. 배고프면 마음대로 거두도록 지천에 널려 있어서 님과 저는 상만 차리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언제나 한 끼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종일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열매와 뿌리와 잎을 거두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아버지는 둑을 쌓아서 남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만, 님과 제가 머문 곳은 누가 와도 막을 수 없으므로 주인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식사를 하고 난 뒤에 님께서나 저나 열매든 뿌리든 잎이든 몸에 두르면 한 벌의 새 옷이 되었고 잠자리를 만들어 누우면 한 채의 새 집이 되었습니다.

 

 

 

 

보유 시경 제9작품

 

 

 

님께서 아버지 어머니를 잊으신 날, 저도 아버지 어머니를 잊었습니다. 님과 저는 서로 다른 땅에 다다랐기에 서로 달라져야 했으므로 님께서는 님대로 사시고 저는 저대로 살았습니다. 먹을거리가 많았기에 다투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는데 아버지 어머니를 잊은 날부터 님께서는 종일 걸어서 발자국이 남는 데까지 자신의 땅으로 삼아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밀려나서 님으로부터 하루 만에 까마득히 멀어졌습니다. 저도 발자국이 남는 데까지 제 땅으로 삼으려고 걸었을 때는 이미 님께서 다 차지하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같은 형제라도 옷과 밥과 집이 나오는 땅덩어리를 나눈다는 걸 진작 알았으면서도 저는 그렇게 늦고 말았습니다.

 

 

 

 

보유 시경 제10작품

 

 

 

님께서 님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신 날, 저는 저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님과 제가 형제라 할지라도 우리가 될 수 없었던 건 각자 만들려고 한 세상이 달라서였습니다. 님께서는 당장에 혼자 먹지도 않으면서 나중에 여럿 나누어 먹겠다며 저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셨고 저는 나중에 여럿 먹으려는 작정을 하기 전에 당장에 혼자 먹어야 했으므로 님의 것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님과 저는 너무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려고 했기에 양쪽에서 한가운데로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서로 같은 먹이를 달리 먹게 하는 곳이 이 세상이라는 걸 알았다면 님께서나 저나 각자 세상을 만들려고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보유 시경 제11작품

 

 

 

님께서 우리라고 부르지 않으신 날, 저도 우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님께서는 한 곳에 머무르셨고 저는 여러 곳을 떠돌았습니다. 한 곳에는 님을 찾는 사람들이 늘 그늘 아래서 쉬고 있었고 여러 곳에는 저를 내버려두는 사람들이 언제나 뙤약볕 아래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님께서는 쉬실 수 있었고 저는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님께서는 저에게 우리라고 부르지 않으셨고 저도 님께 우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님께서는 다수가 될 수 없었으나 다수에게 필요하셨고 저는 다수가 되어야 했으나 다수에게 따돌리었습니다. 그리하여 굳이 우리가 되진 못했어도 님께서는 님대로 저는 저대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되었습니다. 제가 단 한 명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아무 곳이든 혼자서 살아볼 만하였습니다.

 

 

 

 

보유 시경 제12작품

 

 

 

님께서 세상을 놓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날, 저도 세상을 놓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살아볼 만한 세상이라고는 해도 살아보려면 견뎌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쉽사리 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산 아래 가 있을 때는 산그늘도, 들녘에 가 있을 때는 들바람도, 강가에 가 있을 때는 물소리도 견뎌야 했습니다. 마을에 있을 때는 사람들의 한숨과 곁눈질과 손사래도 견뎌야 했습니다. 님 때문에 저의 세상을 만들지 못하자 무엇도 저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저를 놓아버리지 않으려는 징후로 받아들이고 나니 님의 세상이 만들어진 까닭은 님께 패배한 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저에게 패배하실 님께서도 계실 터, 그때는 저의 세상이 만들어질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시작메모

 

 

원래 님과 저는 서로 다르지 않은 인간인데 서로 다른 세상을 갈구한다. 저마다의 세상을 만들려고 할수록 갈등하고 반목한다. 그래서 님과 저는 평범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 <님 시경>의 보유 시경에는 그렇게 갈등하면서 단절하고 반목하면서 분단하는 인간사를 상징적으로 담았다.

외편外篇 <님 시편>, 내편內篇 <님>, 전편前篇 <님 시집>, 후편後篇 <님 시학>, 본편本篇 <님 시경>의 전5권으로 구성된 님 연작 장시의 시초가 되었던 나의 등단작을 여기 옮겨놓으며 완결의 의미를 새겨본다.

 

 

꽃망울에 담긴/

이슬의 맑은 눈으로/

해를 여신 님은/

꽃피는 소리의 부피만큼/

살을 흔드시고/

상한 피를 흔드시고/

꽃 속에 들어가시어/

불현듯 크낙한 아침이 되시니/

저의 영혼의 꽃밭은/

한동안 미쁜 음성에 젖나이다

―「사미인곡」 전문

 

 

 

하종오∙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님 시편>, <님>, <님 시집>, <반대쪽 천국>, <지옥처럼 낯선>, <국경 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베드타운>, <입국자들>, <제국諸國 또는 帝國>, <남북상징어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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