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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봄호)집중조명해설/김윤정/박선우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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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726회 작성일 14-01-2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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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겨울호)집중조명해설/김윤정/박선우의 작품세계

 

 

집중조명해설 박선우의 작품세계

 

 

김윤정

 

 

혼돈의 전체성과 부분으로서의 인간

 

 

 어둠, 공포, 불안, 위기, 이들로 뒤얽힌 카오스의 세계는 문명 창출의 가장 강력한 동기이자 동력이었다. 기독교 성서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로고스도 태초에 있던 카오스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고, 근대와 더불어 등장한 계몽주의 역시 중세암흑의 카오스를 극복하기 위한 고투였다. 분석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세계, 암묵적인 전제에 기대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세계는 인간의 내면 역시 무기력한 카오스의 상태로 밀어넣는 바, 이때 어둠의 밀반죽과 같은 끈적끈적한 카오스 속에서 탈출할 수 있던 방법은 문명의 빛을 따르는 길이었을 터이다. 불가해한 혼돈의 세계를 기억 저편에 봉인시켜 버리고 불안과 공포를 비정상적 정신이라 억압하는 길이 인간이 카오스와 결별하였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우리는 흔히 이성의 패러다임으로 명명해왔다.

그렇다면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달과 화려한 첨단문명의 전개 한가운데에 놓인 오늘날 우리는 무한한 해방과 완벽한 질서를 실현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이성은 충분히 명석하여 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 불안과 공포는 문명화된 인간에게 비정상적 징후일 뿐인가? 이러한 물음들은 박선우의 시를 읽을 때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이다. 그것은 박선우의 시가 발 디디고 있는 영역이 곧 찐득하게 엉겨있는 질료의 세계이자 시의 주된 목소리가 그러한 세계로부터 헤엄쳐 나오려 허우적대는 화자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공포가 나사를 조이듯 조여 오고 있는 밤

못 볼 것을 보고야 만 보름달은 경직된 채 사산을 하고

 

애기 동백꽃 같은 사산아를 안고 보름달은 짐승처럼 운다 후두염을 앓는 쉰 소리로 개들은 짖어대고

 

대숲에서 은신 중인 바람이 술렁인다 기립으로 대숲이 휘청인다 공포를 방관하고 있는 밤도 휘청인다

 

휘청이는 밤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는 여린 짐승

소리로 밤을 장악하려는 사냥견의 맹공

 

정복과 피정복의 대립도 필사이다

공포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릴 때마다

 

여린 심장에선 한 움큼씩 뜨거운 피가 빠져 나가고

그 피를 겨냥하는 공포는 사정없이 비수를 꽂는다

―「불온한 밤」 전문

 위의 시에서 자아와 대상의 분리와 대립, 그리고 주체의 세계를 향한 파악과 장악이라는 근대인의 기본적 인식틀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주체의 환상적 인식이라는 탈근대적 경향과도 위의 시는 거리를 둔다. 위의 시에 나타나는 인식 경향에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 설정이라는 전제 자체가 사상되어 있다. 주체라는 중심이 올곧이 서 있는 상태에서의 세계에 대한 사실적 인식 혹은 환상적 인식을 위의 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시에는 근대 및 탈근대의 기획에서 읽을 수 있는 주체의 자리가 흔적조차 없다.

대신 위 시에 나타나 있는 세계는 주체와 객체가 뒤엉킨 상태일 따름이다. 주체와 객체, 이 둘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 어느 것이 인식의 주체이고 어느 것이 외적 대상인지가 분별되거나 가름되지 않은 상황이 위 시에 있는 세계의 모습이다. 이 둘은 서로 구분되기 전에 하나이고 서로 끈끈하게 뒤섞여 있다. 위의 시에는 객체가 스스로 주체가 된 양상, 또한 주체가 스스로 객체가 되는 양상이 서로 혼합되어 뒤엉겨 있는 것이다. 가령 ‘은신 중인 바람의 술렁임’, ‘공포를 방관하고 있는 밤의 휘청임’은 무엇이 주체이고 객체인지 분간할 수 없게 한다. 그저 사건만이 발생하는 상태, 사태만이 세계를 가득 채우는 상태가 위 시의 주된 내용이다. 역시 ‘여린 심장에서 한 움큼씩 피가 빠져 나가’는 상황도 같은 이야기를 성립시킨다. 시에 나타나 있는 내용이란 그 어떤 것도 아닌 지배적인 사태 그것뿐임을 알 수 있다.

주체와 객체가 분간되지 않는 데에는 그것들을 한데로 압축해 버리는 거대한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세계에의 이해를 불가능하도록 하는 동시에 객체를 온전히 고정된 사물로 있게 하지 않는 압도적 힘이 주체와 객체를 한데 묶어 압박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을 에워싸는 압도적 기운은 주체와 객체 모두를 압박하고 모두에게 스며들어 모두를 뒤틀고 혼돈에 빠지게 한다. 모든 주체와 객체는 외부에서부터 죄어오는 이 거대한 기운에 지배당한다. 이 기운 아래서 능동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제 아무리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으로 무장된 자라 할지라도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세계를 장악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이성적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는 주체도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그는 그저 사태의 일부이자 거대한 힘에 종속된 피동태일 뿐이다.

시에 나타나 있는 압도적 기운은 ‘공포’다. ‘보름달’을 ‘경직된 채 사산하’게 하고 ‘보름달을 짐승처럼 울’게 하는 알 수 없는 기운, ‘일제히 개들을 후두염을 앓는 쉰 소리로 짖게 하’는 그것, ‘밤’을 타고 ‘나사를 조이듯 조여 오고 있는’ 그 힘의 실체는 곧 세계를 모두 몸 둘 곳 없이 불편하게 하는 ‘공포’인 것이다. ‘공포’는 알 수 없는 시공에서 피어나 모든 존재들을 조여가면서 그들을 들썩거리게 하고 뒤흔든다. ‘개들이 짖어대고’, ‘바람이 술렁이’며 ‘대숲이 휘청이는’ 것, ‘사냥견이 밤을 장악하려 으르렁대는’ 것도 이 ‘공포’ 때문이다.

이러한 ‘공포’가 사태 전체를 장악해 들어가는 탓에 주체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며 객체 역시 단순한 사물이 될 수 없다. ‘공포’는 주체와 객체 전체에 스미면서 단일한 사태를 형성한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아닌 모든 것이 뒤엉킨 상태의 발생은 이와 같은 조건에서 비롯한다. 때문에 사태는 ‘공포’의 세계 장악력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공포’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그 앞엔 ‘공포’에 저항하는 세계가 있다. 곧 여기에서는 ‘공포’의 스미는 힘과 그에 저항하는 힘이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복과 피정복의 대립이 필사’인 것은 이러한 사태를 암시해준다. ‘심장에선 한 움큼씩 뜨거운 피가 빠져 나가’는 사태 역시 ‘공포’의 세계 장악력을 드러낸다. 주체에게 ‘공포’는 불가항력이다. ‘공포’는 압도적 힘으로서 그 무엇도 구별하거나 예외로 두지 않는다. 이러한 ‘공포’는 ‘피를 겨냥하며 사정없이 비수를 꽂아’댄다.

이처럼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기 이전 이들을 한데로 뒤얽는 거대한 힘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세운 문명이 얼마나 협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말해준다. 세계를 정복하였다는 믿음위에 세워진 문명이란 언제어디서든 단일한 사태를 양산해내는 거대한 ‘힘’에 비해 볼 때 매우 피상적인 것이다. 세계를 에워싸며 지배하는 ‘힘’ 앞에서 ‘문명’은 세계의 극히 일부에 국한된 미소微少한 것이다. 박선우가 보여주고 있는 세계는 이처럼 구획되거나 분리되기 이전의 혼융된 상태 그것이다.

 

물컹한 고구마 같은 어둠이다

야생 고양이 담을 훌쩍 넘고

하늘엔 별꽃이 하나둘 개화를 시작

밥상에 앉은 마을들 도란도란

보리가 익어가는 냄새에 이끌려

설거지를 놔두고 들길을 걷는다

서로를 기대고 누워 있던 들풀들이

모조리 일어나 경계태세를 한다

미안하다는 손짓을 보내며

돌아오는데 농축된 어둠이 제법 딱딱하다

실실 불어오는 실바람이 좋고

풀물이 들어도 풀냄새가 좋고

농축된 고형물질 같은 어둠이 좋은

오월과 유월 사이

―「오월과 유월 사이」 전문

 

위 시를 통해서도 우리는 시인에게 세계가 인식의 외적 대상이거나 주체와 구분된 객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적 자아에게 세계는 논리적으로 인식되는 대신 하나의 거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물컹한 고구마 같은 어둠’이라든가 ‘제법 딱딱하게 농축된 어둠’, ‘농축된 고형물질 같은 어둠’ 등의 표현이 그것을 말해준다. 시적 자아는 ‘어둠’이 밀고 오는 느낌에 이끌려 ‘설거지를 놔두고 들길을 걷게’ 된다. 시적 자아뿐 아니라 ‘야생 고양이 담을 훌쩍 넘고/ 하늘엔 별꽃이 하나둘 개화를 시작’하며 ‘밥상에 앉은 마을들 도란도란/ 보리가 익어가는 냄새’가 피어나는 등 시에서 모든 존재들은 개별적이면서도 다른 한편 어떤 전체적인 힘 아래에 놓여 있는 듯 통일감이 있다. 이들 존재들은 제각각 행동하는 것 같지만 기실 ‘물컹한 고구마 같은 어둠’에 의한 단일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종속되어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마을’의 모든 존재들은 독자적인 주체 혹은 객체로서 존립하기보다 밀려드는 ‘어둠’에 지배되어 ‘어둠’과 하나로 뒤엉켜가고 있다. ‘어둠’은 마을 전체를 뒤섞어 ‘농축된 고형물질’과 같이 질료화 한다. 이 속에서 시적 자아의 주체성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적 자아는 마을에 내리는 분위기에 물들어 갈 뿐 어떤 논리적 인식이나 합리적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시적 자아 및 사물들을 압도하는 것은 ‘공포’나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시에서 어스름이 내리는 이즈음 마을을 감싸는 기운은 따뜻함이나 평온함이다. 마을에 스민 이러한 느낌을 쐬러 시적 자아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산책을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실바람이 실실 불어오는’ 느낌이 ‘좋게’, ‘풀냄새’가 ‘풀물 들듯 좋게’ 느껴지던 것도 마을을 에우던 안락한 기운 때문이다. 이러한 기운은 그러나 시적 자아에게 분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응결되고 거대하며 단일한 힘으로 다가올 따름이다. 시적 자아가 대상을 인식하고 파악하기보다 느낌으로 전유하는 것도 이 점에서 비롯한다.

세계가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인식 대상이라기보다 거대한 실체이자 기운으로 느껴진다는 점은 시인이 놓인 세계의 층위가 분화되기 이전의 세계, 곧 온갖 존재들이 뒤얽힌 원초적인 상태 그것임을 말해준다. 이곳에서는 앞서 살펴보았듯 객체를 분리시키고 이를 장악하는 주체의 능동적 힘이 발휘되기 힘들다. 이곳에서 주체와 객체는 그저 등가의 존재들일 뿐이다. 이는 주객이 분리되지 않는 원초적 카오스의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결별을 선언한다」를 통해 우리는 뒤엉긴 세계에 놓인 자아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어떠한 시도를 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여름은 가을을 견제하고 가을은 겨울을 견제하는 쓸쓸함에 대해 결별을 선언한다 반쯤 헐린 빈 집을 제집처럼 찾아오는 햇볕과도 결별이고 아무나 옷섶에 파고드는 소슬바람과도 결별이고 마른 뼈들만 남은 갈대숲과도 결별이고 헐겁게 서있는 침엽수와도 결별이고 배춧잎을 야금야금 도둑질하고 있는 달팽이와도 결별이고 저만 살겠다고 가을을 비축하고 있는 사람들과도 결별이고 산 속에서 마주친 산노루와도 결별이고 빨갛게 익은 명감과도 결별이고 여름을 지우고 가을을 지우고 풍경을 지우고 나를 지우면서 결별을 통해 아픔을 본다 아픔을 돌아본다 더는 아프지 않기 위해 더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이 가을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결별을 선언한다

―「결별을 선언한다」 전문

 

위 시에서 시적 자아가 모든 사물, 모든 사태,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결별’을 선언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가령 ‘쓸쓸함’과 같은 감정은 물론이고 ‘햇볕’이며 ‘바람’이라든가 ‘갈대숲’이나 ‘침엽수’, ‘배춧잎’ 등 소위 하찮은 사물들과도 분리의 선을 그으려 하는 태도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한편 시에서 화자는 ‘풍경을 지우고 나를 지우면서’ ‘아프지 않기 위해 실수하지 않기 위해’ 그리 한다고 말하거니와 이것은 모든 것과 어우러져 있는 상태 속에서 시적 자아가 겪었을 혼돈의 상황을 암시해주는 대목이다. 시적 자아에게 ‘결별’ 이전의 상황은 주객은 물론이고 사물과 사물, 존재와 존재 등의 모든 것들이 균질적으로 뒤섞인 상태였고, 이 속에서 ‘자아’는 어떠한 질적 차별성도 얻지 못하였다. 사태는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였으므로 ‘나’는 사태 속에 엉긴 채 덩어리로 반죽되어야 했다. 여기에서 고유한 ‘나’라든가 능동적인 자아란 있을 수 없다. 시에서의 화자의 선긋기는 따라서 말 그대로 ‘선언’이 된다. 그것은 사태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이자 전체를 에워싸는 거대한 힘에 지배당하고 싶지 않다는 원망願望의 표현이다. 온갖 사물, 모든 존재, 나아가 자기 자신과의 분리를 통해 화자는 외부의 어떠한 힘도 스미지 않는 궁극의 자리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나’에게 스미고 관련되는 모든 것과의 ‘결별’은 갖가지 부대낌으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순수한 ‘나’를 지키려고 하는 처절한 노력이다. 이는 비록 미약한 행동으로 나타날지라도 외부의 압도적 힘과 대결하고자 하는 적절하고도 합당한 시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외부의 거대한 힘에 의해 압도당하는 상황과 이에 대한 저항의 시도는 우리의 삶 곳곳에서 체험된다. 그것은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혹은 사회 현상 속에서도 벌어지는 사태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사태들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거니와 이 중 「ktx」는 자아를 능가하는 힘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상황적 조건을 단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경우다.

 

시간은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한다

시속 300킬로로 질주하는 속도 앞에

시간은 벌목처럼 쓰러진다

어둠도 바람도 결절된 부위에

지혈도 안 되는 피가 흐르고

ktx가 지나는 곳마다

휘어지고 꺾이고 넘어지고

그래도 속도를 지향해야 한다면

시간과 함께 동승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것일까

속도 속도를 외치다 보니

세상이 온통 속도에 올인 하기 위해

속도 속으로 머리를 처박고

ktx처럼 질주한다

―「ktx」 전문

 미개와 야만을 넘어서며 등장한 첨단 문명은 우리에게 혼돈의 원초적 상태를 극복하는 새로운 질서와 능력을 가져다 주었을까. 가공할 속도를 지닌 ‘ktx’를 통해 문명의 최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시인은 첨단문명이 일으킨 새로운 사태를 암시하고 있다. 엄청난 속도를 앞세우는 오늘의 문명은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줄지는 몰라도 세계 전체와의 화해로운 융합은 보여줄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문명에 의해 이룩된 ‘속도’는 세계의 ‘시간’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시간’은 첨단 문명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벌목처럼 쓰러질 뿐이다’. ‘문명’은 세계와 조화를 이루고자 하기는커녕 세계를 이루고 있는 원초적 질료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맹목적으로 질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의 질주는 그를 둘러싼 세계를 파괴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명의 질주 앞에서 ‘어둠도 바람도 결절된 부위에’ ‘지혈도 안 되는 피가 흐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세계는 ‘ktx가 지나는 곳마다 휘어지고 꺾이고 넘어’져야 한다. 즉 ‘문명’은 원초적 혼돈의 세계를 치유하기보다 오히려 왜곡시키고 훼손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ktx’가 지나갈 때 세계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피를 흘린다’. 이처럼 첨단문명은 세계 위에 새로이 군림하는 거대한 힘의 실체가 된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인간이 갈 방향은 더욱 큰 힘에 복속되는 길인가. 실제로 문명의 부작용을 제어하고 세계와의 융화를 이루어내야 할 인간은 그러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행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더 큰 힘에 지배당하고 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은’ ‘속도 속도를 외치다 보니’ ‘온통 속도에 올인 하기 위해’ ‘머리를 처박고/ ktx처럼 질주한’다. 인간은 ‘속도’에 의해 소외된 세계의 ‘시간’을 ‘동승시키’려 하지 않고 ‘속도’만을 좇는다. 결국 문명은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탄생하였지만 인간의 문명에의 맹목적 추종은 더 큰 혼돈을 야기하였을 따름이다.

‘ktx’를 통해 본 ‘속도’와 ‘시간’, 문명과 세계의 부조화는 인간의 능동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준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인간은 혼돈을 딛고 조화로운 세계를 창출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언제어디서든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힘의 압력이 인간을 압박해 올지라도 인간은 이를 넘어서서 인간과 세계를 아우르는 화해로운 세계를 창출해야 한다. 그러할 때 인간은 비로소 만물의 영장이자 세계의 주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이미지」는 세상을 조화롭게 운위하지 못하여 결국 파괴적 양태로 분노를 표출하고 마는 인간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킬링필드를 연상했다

가는 곳마다 세워진 사원 안에 해골들은 추정도 어렵다

폴포트의 이상이 궁금해진다

배추밭 주인의 이상도 궁금해진다

폭락이라는 명분은 폴포트 이상에 걸림돌이 된다

작대기로 목을 치고 삽자루로 살점을 찍어내는 잔인한 학살이다

분풀이로 처단, 살이 찼다고 처단

이래저래 처단한 배추의 해골들이 사원 안에

눈을 부릅뜨고 잠들고 있다

―「이미지」 전문

 위의 시는 배추값 폭락으로 인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배추’를 ‘처단’하는 농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적 화자는 정성으로 가꾼 ‘배추’를 마치 분풀이 하듯 처참하게 훼손하는 농부의 모습을 보며 ‘킬링필드’를 야기했던 ‘폴포트’를 연상한다. 화자는 파괴되는 ‘배추’를 보며 ‘잔인한 학살’이라 말한다. 화자에게 분노하고 포악해진 농부는 ‘이상이 궁금해지’는 이해하기 힘든 인물로 다가온다.

배추값 파동을 가져온 사회의 구조적 문제 앞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이란 마땅히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어 이를 해결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 벌어진 모순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 개선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배추밭 주인’은 애꿎은 배추를 끌어 모아다가 ‘학살’함으로써 문제해결은커녕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혼돈을 더욱 가중시킬 따름이다. 이때 인간이 부서뜨린 ‘배추’는 혼돈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

온갖 노동력과 시간을 투자하였음에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농부가 처한 상황은 물론 총체적 난국의 상태였을 터이다. 농부가 애지중지 기른 작물을 파괴하는 포악자로 돌변하는 것도 이때의 상실감과 좌절감을 견디지 못해서이다. 한편 이때 연상되는 학살자 ‘폴포트’와 ‘킬링필드’는 사회와 인간 그리고 자연이 모두 한데로 뒤섞인 채 겪게 되는 혼돈의 상태를 말해준다.

시에서 화자가 보고 있는 것은 혼돈의 사태라는 전체적 국면이다. 화자는 사회만을 혹은 인간이나 자연만을 보는 대신 사회와 인간, 자연이 소용돌이치듯 뒤엉킨 하나의 반죽 덩어리를 본다. 본래 그것들은 가닥을 잡기 힘들 만큼의 밀접한 관계와 구조들로 짜여져 있다. 한 부분에서 결절이 일어나면 다른 모든 부분들도 함께 뒤엉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 인간은 세계에 얽힌 혼돈을 해결하는 능동적 주체자로 기능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인간은 혼돈의 해결자로서 나서기보다는 뒤엉킨 혼돈의 한 부분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인간은 사회와 자연의 혼돈을 이겨내는 주체로서가 아닌 이에 지배되는 피동적 인물로 남겨지게 된다는 것이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주체, 객체 분리의 인식틀이 아니라 이 두 축을 아울러 바라보는 세계관을 지닌 시인에게 인간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한 부분에 해당한다. 그런 만큼 인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이성적이고 능동적인 존재이기 이전에 주변 존재들과의 팽팽한 힘의 긴장관계 속에 놓이는 피동태에 속한다. 인간은 대부분 자신을 능가하는 커다란 힘에 지배되기 마련이고 자신을 압도하는 혼돈의 힘을 이기기에 대체로 무기력하다. 전체적인 세계를 통찰하여 볼 때 사태는 인간을 아주 사소한 부분으로 우겨넣은 채 전개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인간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존재가 못 되는 것이다. 박선우 시인이 보여주는 관점은 우리에게 세계에 관한 더욱 사실적인 인식을 가져다준다. 인간을 객체와 구분되는 주체로서 보기보다 인간과 그 주변을 포괄하는 전체로 보는 시각은 인간을 에워싸는 세계의 거대함을 있는 그대로 제시해준다. 이러한 시각은 세계 내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전체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보다 겸허히 성찰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윤정∙문학평론가. 2007년 ≪시현실≫로 등단. 강릉원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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