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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신작시/서동인/아일랜드 여우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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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인
아일랜드 여우 외 1편
운동장 울타리에 찔레꽃이 피었어
훈풍은 불지 않아
섬은 지금 나처럼 낮잠을 자고 있어
꿈속에 나타난 여우가 빨간 등대로 변신한다는
소문이 진짜였으면 좋겠어
변신술을 배워 차라리 여우가 되고 싶어
농어를 잡으러 간 아버지는 아직도 오지 않아
엄마는 수화로 걱정했지만 그런 엄마가 싫어
배고픈 방파제는 온종일 해변의 모래알을 씹어 먹어
올해도 해당화 피기는 글렀어
친구도 없는 학교에 가기 싫어
내년이면 문을 닫는 학교는 교문도 없어
운동장엔 나팔꽃이 끝종을 울려
태극기는 뭍으로 도망치는 갯바람을 달래느라
지쳤어, 여우가 진짜 나올까
할머니는 공룡 발자국을 얘기했지만
여우 발톱이 더 보고 싶어, 뭍에서
미용실 하는 언니 손톱을 닮았을까
피아노 가르치며 손가락을 때린
교회 목사 사모님 눈꼬리를 닮았을까
여우가 보고 싶어 꼬리 아홉 개 달린
아일랜드 여우가 보고 싶어
고구마
섬마을 비탈밭에
고동처럼 착 달라붙은 할머니들
서울 간 아들 얘기며, 손자 얘기
흙손으로 푹푹 찔러 넣는구나
땅속에 들어간 영감도
요 손끝으로 사랑을 싹 틔웠는디
자식들 주렁주렁 영글어 갔는디
인자는 요걸 숨거도 영 재미 없당께
뭐니 뭐니 해도 영감이 최고여
전화도 자주 안 허는 자식놈들
아무 필요 없당께
암만, 영감 고구마가 최고지
주저리주저리 할머니들 입담에
숨죽은 고구마순이 귀를 쫑긋 세운다
농사도 영감이 있어야 제맛이지
가실 고구마는 탱탱해야 쓸 것인디
할망구 심은 고구마는 물렁물렁허당께
밭고랑에 내려앉는 찰방진 햇살이
살짝 웃다 뒤로 넘어진다
서동인∙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가방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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