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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신작시/박수빈/생일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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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빈
생일 외 1편
우리 헤어지자. 그동안 나는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날들. 사각의 식탁. 얼룩진 식탁보. 쌓인 먼지. 그 위의 목마른 잔. 이가 빠진 접시. 키가 다른 한 쌍의 젓가락. 그 밥에 그 나물. 멈춘 시계. 울리지 않는 전화 그러므로 나는 단내 나는 입.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고 싶은 쓸쓸.
창문 밖 나무가 헤드뱅잉을 하고 있다.
나를 향해 울부짖는다.
첫눈이 내리듯이, 매년. 태어난 날을 맞듯이.
관습으로부터 권태로부터 잊으라 한다.
잊지 못하면 견디고 자르라 한다, 개처럼 꼬리치던.
등에 꽂히던 비수는 이제 그만.
맞으라 한다, 고여 출렁이는 갈증을. 혁명처럼 태풍처럼
뜨겁게 섬기다
코끼리 발바닥이 스윽 지난다
건기와 우기를 오가는 사바나
물결치는 숲의 흔적들이 갑골문자로 달궈진다
퍽퍽하거나 축축한 시간 너머
상처가 길이 되고
뜨거울수록 환한 길이 데인다
물이 그리운 오그라든 어깨
금이 간 주머니에서 퍼지는 밀림의 냄새
지나온 모래벌판은 태양이 타오르는 등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밀려왔다 쓸려가며
바닥을 받치는 초식성 꿈이 어느새 하얗다
어쩌지 못해
고인 주름들, 얼룩들, 내게서
증발하지 못한 갈증들
더운 바람 서걱거리는 등을
분무하면서 견디고 있다
박수빈∙2004년 시집 <달콤한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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